117. 네가 있는 낙원에서
‘우리 황자님이 결혼이라니!’
오늘도 미간에 주름을 그은 레틴은 마음을 도려낸 듯한 상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착하지, 다정하지, 잘생겼지, 똑똑하지, 능력 있지, 섹시하지. 그 모든 수식어를 아우르는 황자님의 품절은 뭇 제국 여성들의 마음에 커다란 상실감을 안겼다. 레틴은 그 누구보다도 그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비록 함께할 수 없는 조건으로 태어나 앙숙에게 황자님을 뺏기고 말았지만, 다음 생에서는 기필코!
주먹을 불끈 쥔 레틴이 남들에겐 말 못 할 마음을 다지던 그때였다.
“엇!”
“……!”
복도의 귀퉁이를 돌아가던 그때, 레틴은 갑작스레 나타난 한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순발력 있게 몸의 중심을 바로잡았으나 상대편은 그러지 못했다.
레틴은 별빛처럼 흩어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가까스로 넘어지는 ‘여인’을 붙들었다.
어쩐지 데자뷔를 보는 듯한 장면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그는, 고개를 든 여인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천사의 강림인가.
그녀의 붉은 눈동자 위로 사르르, 속눈썹이 내리깔렸다. 한 떨기 꽃잎을 보는 듯한 그 작은 움직임에 레틴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었나요?”
몸을 바로 세운 테이는 구시대의 유물 같은 작업에 걸음을 뒤로 물렸다. 붉어진 뺨과 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몹시도 거슬렸다.
“……남자 화장실에서 뵌 것 같네요.”
“……?”
레틴은 나사가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다 불현듯 몸을 굳혔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테이가 입은 남성용 예복에 닿았다.
“그럼, 실례하죠.”
레틴이 넋을 빼고 있는 사이, 테이는 쌩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공간으로 레틴의 목소리가 작게 스몄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다…… 남자야?”
“나도 대체로 그렇더라.”
누군가 처진 어깨로 손을 툭 하고 올렸다. 레틴은 끔찍한 딸기향을 맡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핑크색 사탕을 입안에 굴리고 있는 도베르가 있었다.
“오늘 내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거든? 남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 힐레인보다 예쁜 붉은 눈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척이나 예뻤었어.”
“그럼 가서 이름이라도 물어보지 그랬어요?”
“남자더라고.”
도베르가 레틴을 놀리듯 싱긋 웃어 보였다.
레틴이 무심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나 자기라 불러대는 핑크 변태와 같은 처지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제 마음은 먹구름인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그녀…… 아니 그를 닮은 말간 해를 바라보며 레틴은 올해도 짝을 찾기엔 틀린 것 같은 슬픈 예감을 느꼈다.
* * *
레틴을 피해 신부 대기실로 향하던 테이는 뜻밖의 이야기에 옆을 돌아보았다.
제 나이 또래쯤 보이는 귀족가의 영애들, 그녀들은 이야기에 심취한 채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황태자님도 아직 미혼이신데…… 황자님께서 이토록 빨리 결혼을 서두르시는 이유가 뭘까요?”
“모르셨어요? 황자님께서 그분을 무척이나 귀애하시잖아요. 꽤 오래전부터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황자궁의 기사가 되는 건데 그랬어요.”
한 여인이 두 손을 모아 쥐고 꿈을 꾸듯 이야기했다. 반면 맞은 편의 여인은 입을 씰룩이며 볼멘소리를 냈다.
“흠…… 전 그런 생각도 들어요. 예비 황자비께서 쓰러져가던 가문을 일으켜 세운 것도 다 황자님이 뒤를 봐주신 덕택이 아닐까 하는.”
“……설마요!”
“그렇잖아요. 남작가였던 리야 가문이, 몇 년 만에 백작 가문이 된 것도 그렇고…….”
시샘 어린 목소리가 끝내 선을 넘었다고 생각될 무렵 테이가 걸음을 뗐다. 웬만해선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으나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몇 해 동안 애썼던 누나를 생각하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잠깐, 거기 레이디.”
그런데 그때, 장미꽃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난 누군가가 대화의 틈에 끼어들었다.
곱슬거리는 남색 머리카락, 들고 있는 장미와 똑 닮은 선홍빛 눈동자. 머나먼 북부에 살면서도 외모로 수도에까지 이름을 날린 루 하버마스 대공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루의 미소 한 번에 뭇 여성들이 볼을 붉혔다.
“대공님?”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체리노 님.”
“어머, 제 이름을 기억하시고 계셨나요?”
“물론이죠. 자, 이 꽃은 선물입니다.”
몇몇 여인들의 이름을 불러준 루 대공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꽃을 한 송이씩 나눠주었다.
딱 한 사람만 제외하고. 조금 전까지 뒤를 봐준 게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채 눈을 깜빡였다. 제 차례가 아니냐는 듯 루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향해 빈손을 내밀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꽃이 다 소진되어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루는 품에 버젓이 꽃다발을 안은 채 거짓말을 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빨갛게 볼을 붉히며 세차게 돌아섰다.
“어머, 브란스!”
“죄송합니다, 저흰 먼저 가볼게요.”
허둥지둥 사라지는 여인들을 바라보던 테이가 고개를 기울인 채 루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행동을 보면 누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누나의 지인 중에 루 대공이 있었나?
신부 대기실로 들어선 테이는 어리둥절해하는 힐레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두 사람 초면이구나.
그런데 루 대공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우뚝 걸음을 멈춘 그는 뻣뻣하게 굳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적막감 속에서 루의 시선이 하얀 면사포를, 수만 장의 꽃잎을 모아 붙인 듯한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돌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힐레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아…… 예. 초면에 죄송합니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났지……?”
루가 다급히 눈물을 훔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슬피 눈물짓던 남자는 저가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루 하버마스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루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힐레인에게로 내밀었다. 다른 여인들에게 몇 송이를 내어준 꽃다발이었으나 원체 꽂혀 있던 양이 많았던 터라 티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루는 조금 전,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꽃을 선물하고 말았던 자신을 탓했다. 다른 여인들에게 주지 말고 온전한 전부를 황자비에게 바쳤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후회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장미 향을 잔뜩 들이킨 나비가 날개를 팔락이며 두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예쁜 나비네요.”
“예, 정말로……. 아름답네요.”
루는 나비에 시선을 둔 힐레인을 보며 멍하니 읊조렸다.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 기분도 금세 잊고 말았다.
황궁의 정원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나비를 보며 루는 조금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뭔가 낯이 익단 말이지.”
루가 나간 후, 힐레인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에 머리를 흔들었다.
“또야? 예전에 도베르 경을 보고서도 그러더니.”
“그러니까 말이야. 꼭 어디선가 본 것 같고…….”
“내가 뭐?”
테이와 대화를 나누는데 문득 문 쪽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생글생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도베르와 함께 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내 얘기 중이었어? 칭찬이면 나가고, 욕이면 옆에서 들을게.”
도베르의 호칭에 아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도베르. 황자비를 계속해서 그따위 호칭으로 부를 텐가.”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듯한 말투에도 도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삐죽였다.
“저한테 자기는 친동생을 부르는 살가운 호칭입니다. 안 그래, 테이 자기?”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저와 피를 나눈 사람은 오직 누나밖엔 없습니다.”
테이의 쌀쌀맞은 대답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도베르는, 평상시보다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영영 혼자 살 것 같았던 여동생이 시집을 가게 되어 너무 기쁘다나, 뭐라나.
진심처럼 들리는 농담을 듣고 있을 무렵 뜻밖에도 아인이 도베르의 말을 막았다.
“힐레인이 영영 혼자라……. 그런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도베르가 호오? 하는 소리를 내며 아인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러운 눈빛을 건조하게 일갈한 아인이 이번엔 힐레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제레미가 아닌 내 소속 기사로 들어왔다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기울이는 힐레인을 보며 아인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오늘의 이야기는 달라졌지 않을까?”
“네?”
되묻는 물음에 아인은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인지 더 고민해 보라는 듯 조금은 사악해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면…… 황자님이 화내시겠는데요?”
“어차피 그 녀석은 신부 대기실엔 발도 못 디딜 테니 상관없어.”
신랑은 신부 대기실에 들어오지 못한다. 별 쓸데없는 관습이 아인은 오늘따라 고맙게 느껴졌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신부를.
나른할 정도로 느린 시선이 힐레인 위에 머물렀다.
그 녀석은 몇 시간 후에나 보겠구나.
아인은 초조해하고 있을 제 동생을 떠올리며 무의식중에 웃음을 흘렸다.
* * *
마침내 때가 오고야 말았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이었지만, 막상 예식장 안으로 들어서려니 눈이 뱅글뱅글 돌고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긴장감에 바르르 몸을 떨 무렵, 가만히 손을 감싸 쥐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버지.”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다독이고 있었지만 맞잡은 그의 손 또한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몸을 에워싼 긴장감도 사르르 녹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때마침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웨딩마치 속으로 아버지와 함께 발을 디뎠다.
하얀 꽃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길 끝에는 다소곳이 선 제레미가 있었다. 제비꽃을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는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내게로 고정되었다.
18년의 짝사랑. 제레미가 습관처럼 흘리던 말을 믿게 된 순간이었다.
그럼 두 살 때부터 날 사랑했느냐는 물음에 제레미는 웃음을 터뜨렸었지만, 웃음으로 흘릴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오롯이 나를 향하고 있는 신랑을 보고 있자니 그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혀 만난 적 없던 두 살 때 반했다는 건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또 모르지.
기억은 못 해도 어느 순간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마음속이 제레미로 가득해질 무렵 어느덧 걸음이 그에게 닿았다.
아버지에게서 내 손을 건네받은 제레미는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건네받은 사람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기쁨에 물들었다.
주례사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제레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물기가 스민 눈동자가 꼭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간지러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덧 식은 막바지에 닿아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지금은 뭘 해야 할 차례고?
허둥지둥하는 신부를 보며 웃음을 흘린 제레미가, 제게 맡기라는 듯 손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잠시 후 하얀 레이스 장갑 위로 약지와 꼭 맞는 붉은색 반지가 안착했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미를 닮은 반지는 영원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반지가 끼워지는 그 순간 제레미와의 사랑이 영원히 이어질 거라는 기분을 느꼈다.
제레미도 같은 기분일까. 반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제레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눈물이 밴 속삭임이 귓전을 두드렸다.
“네 덕에 나는 낙원에 올 수 있었어.”
낙원. 귓가를 파고든 그 짧은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쿵-, 심장이 울릴 때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나씩 들어맞기 시작한 기억의 조각들이 어느덧 완성된 그림을 그려냈을 때쯤, 나는 그 기억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
불쑥 고개를 들고서 멍하니 장내를 지켜보았다. 황제, 그 옆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은 황후 유디트. 그녀의 뒤로 질서정연하게 앉은 트릭샤 그리고 엘리샤도 보였다.
아인의 곁에서 눈을 빛내는 카렌에게 시선이 닿았을 무렵, 제레미가 나를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기억났어?”
조심스러워 보이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모든 기억을 홀로 안고 버텼을 그는, 오히려 나를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혹여 상처라도 받았을까 봐.
“응……. 분명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왜지……?”
“아마도 힐레인이 지금 시점으로 회귀한 적이 있기 때문일 거야. 고정된 시점에서 기억이 깨어난 게 아닐까 하는데.”
“아…….”
“괜찮아?”
“괜찮지 않을 리 없잖아. 당신이 나를…… 낙원에 데려와 주었는데.”
제레미가 떨리는 내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신랑의 애정행각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환호성 속에서 나는 모두가 살아 있는 현재를 두 눈 가득 담았다.
네 번째 결혼식. 거듭된 회귀 끝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사랑해!”
맹세의 키스를 나누라는 주례사의 말이 있기 전, 한발 앞서 제레미를 끌어당겼다. 불시에 입술을 뺏긴 제레미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달콤하게 입술을 파고든 감각에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말간 눈물이 고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