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다시 만나
힐레인이 있는 막사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루는 수 없이 망설였다. 힐레인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그 한 줄의 소식에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는데. 힐레인을 직접 마주하고 나면 무너지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지. 그런 내 모습을 보면 힐레인이 얼마나 슬퍼하겠어.
자신이 보태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짐을 이고 있었다. 거기다 몸까지 아픈 상태인데.
절대 흐트러지지 않겠다 다짐하며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담기 위해. 짧은 작별을 준비하기 위해.
차분히 가라앉은 공간 속으로 들어선 루는 제일 먼저 힐레인이 누운 침대 위로 시선을 두었다. 꼭 감긴 두 눈, 고요한 숨소리. 창백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그저 잠이 든 거라 여길 뻔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힐레인이 저 정도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제레미, 다 저 남자 덕분이겠지.
루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오직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이 힘은 이럴 땐 도무지 쓸 데가 없었다.
“대공.”
그런데 그때 제레미의 잔잔한 목소리가 루를 불렀다. 고갤 한 번 숙여 보인 루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레미가 자리를 옆으로 비켜준 덕분에 루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힐레인을 볼 수 있었다. 죽음도 그녀 특유의 반짝이는 빛은 꺾지 못한 듯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빛을 따라 힐레인의 볼을 쓸어내린 루가 조용히 입을 뗐다.
“이시스 형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거라고.”
“맞아, 힐레인이 사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회귀하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기억을 잃게 되나요……?”
“……회귀 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기억을 잃게 돼. 어렴풋이 감정 정도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지금을 기억하지 못할 거야.”
루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나비로 인한 첫 만남, 묘약이 든 초콜릿, 그 외에도 자신의 가슴을 세차게 뛰게 했던 여러 기억들. 힐레인과 함께한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을 부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루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죽어가는 힐레인을 살리기 위해서는 회귀가 필요했고, 그녀가 원하는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회귀의 당사자가 자신이 되면 안 됐다.
루는 슬픔을 삼키며 품에서 시약병 하나를 꺼냈다. 자신이 힐레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이었다.
“절대복종 상태를 풀어줄 해독제입니다. 판님을 기다릴 것 없이 이걸 가지고 회귀하세요. 형님의 말을 들어보니 작은 물건 정도는 과거로 가져갈 수 있다고 합니다.”
묘약의 해독제. 힐레인의 유언이자 꼬여버린 악연을 풀어낼 소중한 실마리였으나 이제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고마워.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아인은 약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아인은 트릭샤를 죽이는 것으로 비극의 싹을 잘라낼 거니까.
“예? 그게 무슨…….”
“회귀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아인이 될 거니까.”
“아인……? 황태자님이 회귀할 거라고요?”
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이름만 들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기분인데. 회귀하는 사람이 아인이라고? 그자의 뭘 믿고 힐레인을 맡긴다는 말이지?
차라리 자신이 회귀하는 게 낫겠다고 소리치고 싶어질 무렵, 화제의 당사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루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라도 마검을 뽑아 아인에게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루는 아인에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완전히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탓에.
제레미 또한 아인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막사를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예리하게 날을 세우고 있던 그는 어딘지 모르게 무뎌져 있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금안은 아주 오래전, 변하기 전의 아인을 떠올리게 했다. 이미 사라진 모습인데. 허상일 게 분명한데.
이내 잘못 본 거라고 단정 지은 제레미가 아인에게 물었다.
“결정했어?”
“그래.”
아인이 회귀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자신의 끝이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레미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힐레인의 모습을 찬찬히 마음속에 담았다.
그런데 그때, 아인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힐레인이 말했던 낙원으로 돌아가자.”
“뭐?”
혼란스러워하는 제레미의 손 위로 아인이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아인에게 주었던 제레미의 마력석, 그리고 그 옆에 낯선 돌이 놓였다. 완전한 구를 이루는 돌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금빛이 피어올랐다.
“마나를 압축해두었다.”
“이걸 왜 내게 주는 건데?”
“회귀하는 건 너다, 제레미.”
아인의 입꼬리에 아주 희미하게 미소가 스몄다. 찰나에 스치고 간 미소는 허깨비를 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나보고 회귀를 하라니. 갑자기 왜…….”
“나는 잘못된 길을 걸은 전적이 있으니까. 그러니 네가 해.”
잘못. 그 이질적인 단어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꼭 꿈인 것처럼.
그래, 오래전부터 종종 이런 꿈을 꿨었다. 아인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자신을 마주 보는 그런 꿈. 몽롱한 단잠에 빠져들어야, 혹은 취기를 빌려야지만 볼 수 있었던 따스한 꿈의 조각이었다.
제레미의 목소리가 잡히지 않는 꿈을 좇듯 간절해졌다.
“……진짜야?”
이젠 못 견디게 힘들어진 비현실감에 그가 아인의 팔을 붙들었다.
“나를…… 용서할 수 있어?”
아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실망감으로 가득 찰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용서하고 말고도 없었지. 네가 잘못한 일이 아니니까.”
“…….”
“그 명료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어 미안하다. 용서받아야 할 건 나야.”
오랜 방황을 깬 아인이 제레미에게 용서를 구했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제레미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뒤늦게 찾아든 현실감에 그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뿐, 그 어떤 말도 새어 나오지 못했다.
제레미는 먹먹한 감정을 느끼며 이 순간을 바랐을 힐레인을 응시했다. 정말 잘 됐다고.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도 했다.
“그러니, 네게 맡길게. 제레미.”
“형…….”
제레미가 마력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인의 힘이 깃든 구슬에서 미세하지만 따뜻함이 느껴졌다. 비로소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기 시작한 아인처럼.
“반드시, 반드시 해낼게. 우리 같이 힐레인이 말했던 낙원으로…… 그곳으로 돌아가자.”
“그래…….”
아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먼 길을 돌아와도 여전히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제레미가 시야에 담겼다.
* * *
아인과 제레미가 대화를 나누고 얼마 후 힐레인은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소임을 끝마쳤다는 듯, 너무도 홀가분하게 떠나버렸다. 봄을 틔운 겨울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훌쩍.
가벼이 떠나간 그녀와 달리 남은 이들의 시간은 고통으로 물들었다.
막사 안으로 긴 울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작은 공간에 차곡차곡 쌓였다.
“하…… 이건 너무…….”
나무 관 속에 누운 힐레인을 보며 도베르가 고개를 돌렸다. 다급히 눈가를 훔쳤지만 금세 굵은 눈물이 차올랐다.
힐레인의 죽음을 확인하는 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힐레인의 곁에 꽃을 내려놓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뒤를 돌아서고 보니 자신보다 더 괴로워하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도베르는 웅크리고 앉아 우는 루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이게 영원한 이별은 아니니까. 우리 그렇게 생각하자, 응?”
“하지만…… 저 이런 거 너무 싫어요. 대체 황자는 언제 오는 거죠? 준비는 언제 다 되는 건데…….”
점점 더 서러워지는 루의 울음에 도베르의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장마 때와 같은 눅진하고 무거운 공기가 막사 안을 감돌았다.
견고한 감옥 같은 슬픔 속에서, 아인은 손에 든 꽃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꽃을 내려놓는 것도,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염치가 없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잘못된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힐레인이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아인이 떨리는 시선으로 힐레인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제 움직이지도, 미소 짓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는 죽어버렸다.
아인의 눈에서 툭,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끝내 전하지 못한 꽃을 쥔 채 고요히 눈물을 삼켰다.
* * *
잠시 후, 준비를 마친 제레미가 힐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지인들이 전한 하얀 꽃송이 사이에 누워 있었다.
“힐레인.”
제레미가 힐레인을 불렀다. 평상시라면 곧장 맑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을 텐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고요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흰 꽃 위로 툭, 흘러내렸다.
“네가 바랐던 낙원을 만들어둘게.”
제레미는 눈물을 매단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꽃잎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그녀가 옆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남겨진 사람들이 걱정돼 떠나지 못하는 거라고. 그리 여겨졌다.
“그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 그녀를 둘러싼 꽃들이 바람에 일렁였다.
제레미는 하얀 꽃에 휩싸인 힐레인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몸을 감싼 꽃들이 순백의 드레스로 바뀌게 될 날을 바라며.
성큼,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시간으로 발을 디뎠다.
* * *
눈보라가 치던 겨울 하늘이 모처럼 맑은 해를 보였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던 골칫거리 눈 또한 말끔히 녹아 길이 미끄러울 염려도 덜었다.
때마침 맑아진 날씨 덕에 궁인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곧 수많은 초대객이 방문할 예정인데 하마터면 잘 꾸며놓은 예식장이 눈 얼룩에 물들 뻔했지 뭔가.
센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마지막 검토를 마쳤다. 마치 친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임했던 탓인지 완성된 결혼식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곧 황자비가 될 백작가의 아름다운 그녀처럼.
센은 예비 황자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생글생글, 붙임성이 좋은 것도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예의 바른 태도도.
사실 이것저것 이유를 붙이긴 했으나, 모든 걸 다 차치하더라도 그냥. 이상하게 그냥 처음부터 모든 게 다 좋았다. 가끔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여동생을 마주한 것 같아 스스로도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음에 피식, 피식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예식장 검토가 끝났으니 이젠 첫날밤의 대미를 장식할 잠옷을 확인하러 갈 시간이었다.
‘야한 거. 무조건 야한 거로!’
결혼도, 이혼도, 재혼도 다 해본 센은 무엇이 진리인지 아주 잘 아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