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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되돌아가야 할 때 (115/120)

115. 되돌아가야 할 때

“그 낙원에 굳이 내가 없어도 괜찮아.”

정말로 그거면 된다는 듯, 희미한 미소마저 지어 보이는 제레미를 보며 아인은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

“…….”

웃어야 하는데. 어디 하나가 고장 난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아인이 굳어 있는 눈가를 한 손으로 감싼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 아래로 드러난 붉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막사 밖으로 나온 후였다.

아인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깨끗한 눈으로 덮인 세상을 걸을수록 스스로는 그 세상의 까만 오점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흰 눈 위 내려앉은 까만 발자국처럼.

탁 트인 호수 앞까지 다다라서야 아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푸른 호수 위로, 초연했던 제레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가질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내게 미래를 맡길 수 있지? 자신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단 건가.

욕심내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던 제레미를 생각하자 조금 전, 눈밭 위를 걸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더럽고 추했다. 제레미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오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참을 수 없이 추악하다 느껴진 건 자신이었다.

아인은 먹먹한 심정을 느끼며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호수의 티 없이 맑은 빛에 눈이 시렸다.

“여기서 뵙는군요, 황태자님.”

그런데 그때 뒤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엔 이제 막 녹음 밖으로 나온 이시스가 있었다.

“제라드 산맥의 호수는 장관 중에서도 장관이죠. ”

친근하게 말을 붙여온 이시스가 호수에 시선을 두었다.

“막사 안에 틀어박혀 꼼짝 않는 루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 호수가 보고 싶어지더군요. 황태자님도 동생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죠?”

“지금은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군.”

이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듯 아인이 이시스의 말을 끊었다.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이시스는 다시금 말간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참 거슬리는 미소에 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이시스는 입을 다물긴커녕 몇 마디를 더 보탰다.

“제게는 루 말고도 동생이 또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탓에 사람들은 다들 루를 유일한 동생이라 생각하지만요.”

호수의 표면 위를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검술대련으로 인한 사고였습니다. 루는 자신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 자책했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죠. 그 아이가 마음껏 자신을 자책하도록 내버려 두었고요.”

여동생을 앗아간 루가 미웠다. 강력한 수면제 없이는 잠도 못 자는 루를 보며 천벌을 받은 거라 여겼다. 이미 지옥에 있을 그 아이를 더욱더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사실은 이 망가진 마음을 그 작은 아이에게 화풀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깨닫기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요.”

자박, 눈 밟는 소리를 내며 이시스가 아인에게로 다가왔다. 거울을 보듯 마주 선 그가 아인의 눈을 응시했다.

“저와 당신은 어느 면에선 굉장히 많이 닮았어요.”

이시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뚤어진 아인의 마음이 예전의 자신과 닮아 있다고.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인까지도 구하겠다고 선언했던 힐레인을 지지해주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남의 고통을 즐긴다는 이유를 붙이긴 했지만 사실 아인의 구원을 바랐다. 자신이 구원받았던 것처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별 뜻은 없습니다. 그저…… 증오를 멈추는 게 본인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미움을 버리면 정말로 편해지거든요.”

이시스가 싱긋,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연녹빛 눈동자가 휘어지며 평온한 미소를 담아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

아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돌아서지 않고 이시스의 말을 듣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지만, 땅을 딛고 선 다리는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황자비님 말입니다.”

아인이 짧은 시간 숨을 멈추었다. 힐레인, 그녀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비수에 깊이 찔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찌르르 울렸다.

“제가 아는 크레셰 한 분이 황자비님의 미래를 보았었죠. 크레셰는 그분께 여러 갈래의 길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중엔 당신이 몰락하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있었죠. 크레셰는 그 길을 추천했습니다. 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요.”

“…….”

아인이 마른 침을 삼켰다. 힐레인이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도 제레미를 우선시하는 아이이니 망설임 없이 크레셰가 추천한 미래를 택했겠지.

아인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기분을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아인의 뒷모습을 보며 이시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황자비님께서는 크레셰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

“황태자님과 황자님, 두 분이 함께하는 미래가 아니면 싫다 하셨죠. 오늘과 같은 위험이 따를 걸 알면서도 그녀는 쉬운 미래가 아닌, 험난한 미래를 택하신 겁니다.”

아인이 걸음을 멈추고 이시스를 돌아보았다. 왜? 말문이 막힌 듯 보이는 그의 얼굴이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시스는 방황하는 아인에게 답을 들려주었다.

“황자님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그가 들려준 답에 아인은 무언가에 세차게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얼마간 아인의 동요를 응시하던 이시스가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리고, 가닥가닥 사이로 이시스 특유의 미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여기서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물러섰다.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얼마간 듣고 있던 아인은 지친 몸을 나무에 기댔다.

당신을 위해.

이시스의 마지막 말이 복잡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잠시 미뤄두고 싶었던 힐레인에 대한 생각이 함께 밀려들었다.

나를 위해서라고?

광기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켰고 끝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여정에 힐레인을 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배신자니까. 나를 저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목적지를 잃은 배 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까마득한 망망대해 속을 표류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텅 빈 금안이 발자국이 찍힌 눈밭 위를 배회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엔 지나간 길을 되돌아온 흔적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의 주인은 어디까지 걸어갔을까. 길의 끝에서 무엇을 보고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던 걸까.

이어진 발자국,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아인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억해냈다.

유디트.

죽은 이를 떠올리는 아인의 얼굴 위로 괴로움이 스몄다.

자신은 유디트로 인해 이 세상에 나왔다. 그녀를 보며 걸음마를 시작했고 말을 배웠다. 미소를 짓는 것까지 무엇 하나 그녀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빼고 혼자 잘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제레미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마다 광기에 젖은 그녀의 비명을 떠올렸다.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사랑에 꺾여 눈물짓던 유디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행복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유디트를 죽인 그 모든 것을 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 없는 그 아이, 제레미까지도. 그 당시엔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제레미를 받아들이면 혼자서 행복해질 것 같아서. 그 전에 잘라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노라 말하는 힐레인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너니까.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힐레인, 그림자 기사들 모두가 허술하다 말했던 그 아이는 사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예민하게 읽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 본능처럼 가지고 있었던 그녀만의 능력이었다.

가끔은 그런 그녀의 예리함이 거슬렸다. 당돌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유디트의 장례식장에서, 차라리 내게 울어버리라 말했었던 그때처럼.

그때 나는 널 한심하게 내려다보았지만…… 그래, 실은 그때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채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을 너로 인해 깨달아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울고 있는 네가 있더라. 나 대신 참 서글프게도 울어주었지.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어느 순간 내게서 탈락 되었던 감정이 실은 너에게 갔던 거라고.

네가 내 감정이라고.

유디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비록 나는 웃지 않았지만, 행복해지려 하지 않았지만. 말간 웃음을 짓는 너를 보며 그 순간만큼은 나도 웃고 있노라 그렇게 여겼다.

네가 내 감정이니까.

그렇다면. 네가 죽으면 내 감정도 죽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미소는 없지만 슬픔도 없는 세상. 꽤 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제 와 그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십여 년간 죽여왔던 감정이 폭풍이 되어 다가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왜인지.

여기서 멈추어야 하는 건가?

아인이 자신의 앞까지 이어진 발자국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길었던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순간이 왔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억눌렀던 감정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한겨울, 얼음처럼 단단했던 그의 금안에 물기가 스미고, 맑은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후회해. 두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것을. 기어코 절벽의 끝을 확인하고서야 돌아가야겠다 마음먹은 어리석은 나를.

끝없이 밀려드는 후회감 사이로 염치없는 감정이 스며들었다. 종종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곤 하던 그 감정이 이제는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이었던 것 같아…….”

사랑, 그래 사랑. 그래도 한번은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줘야 할 것 같았다. 항상 외면받아왔던 그 가여운 감정에.

사랑해, 힐레인 그리고 제레미.

생각의 끝자락에서 아인이 걸음을 뗐다. 호수까지 이어졌던 그의 발자국 옆으로, 되돌아가는 발자국이 선명히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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