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상처를 낫게 하는 방법
아인은 그런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감정이 사랑이라 느끼는 건 아니었다. 치료 마법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싶은 걸 보면.
모순적이게도 아인은 힐레인을 살리고도, 죽이고도 싶어졌다.
“네 멋대로 이 감정을 사랑이라 단정 짓지 마.”
제레미를 향해 한 말이 아니었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사랑이라고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죽어가는 힐레인의 앞에서 이 감정을 깨닫고 싶지 않았다.
짧게 제레미를 바라본 아인이 수십 개의 돌을 허공에 띄웠다. 샛노랗게 빛나는 돌들이 주변을 떠돌았다.
힐레인은 멍하니 제레미의 푸른 마나와 섞여드는 그 빛을 두 눈에 담았다. 녹음이 드리운 정원 속, 웃고 장난치던 제레미와 아인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 보였다.
비록 몸은 어둠 속으로 침전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포근한 햇살 아래 있는 것 같았다. 조화롭게 섞여드는 희망의 빛이, 두려움과 슬픔을 눌렀다.
* * *
두 사람의 필사적인 노력에 힐레인의 죽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이 힐레인이 살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죽음을 유예했을 뿐.
제레미는 차가운 눈밭에 몸을 누인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녀를 이곳에 계속 방치할 수는 없었다. 상태 악화가 멈춘 지금을 틈타 막사로 이동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 전쟁부터 멈춰야 했다.
제레미는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전쟁터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수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기사들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아인.”
“…….”
아인의 시선이 제레미를 향했다. 지친 듯 보이는 그의 얼굴 위로 구름이 드리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인제 그만 이 의미 없는 전투를 멈추자.”
이 말을 하기까지 너무 먼 거리를 돌아왔다. 너무 오랜 시간 길을 헤매고 말았다. 목적을 잃은 무의미한 방황에 희생된 건 결국 힐레인. 자신과 자신의 형이 사랑하는 여자였다.
싸움을 멈추면 되는 일이었는데.
“증오의 고리를 끊어내자. 제발.”
제레미의 부탁에 아인은 침묵을 지켰다.
증오를 끊어내자고? 전투를 멈추자고? 잘 모르겠다.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 모를 전투는, 무엇 때문에 멈춰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힐레인을 살리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해.”
제레미가 혼란스러워하는 아인을 붙들었다. 지쳐 있는 금안이 느리게 깜빡였다.
“아, 힐레인.”
피폐해진 아인의 시선이 죽은 듯 눈을 감은 힐레인의 얼굴에 닿았다.
회귀, 묘약, 트릭샤.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던 그녀가 파리한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자신은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도 가늠하기 어려운데, 제레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대체 너는, 무엇을 알고 있기에.”
“일단 막사로 가자.”
“네 무엇을 믿고?”
“군사들을 밖에 대기시켜도 돼. 일단은 내 얘기를 들어줘.”
제레미는 조금 전 먼저 마력을 내려놓았던 그때처럼 초연한 얼굴이었다.
“그 후에도 날 죽이고 싶다면 우리 그때 끝을 보자.”
“그러지…….”
아인이 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모르고 제레미는 알고 있는 것. 그걸 들은 후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눈밭 위에 버려진 듯 누운, 저 가여운 꼴을 보지 않아도 될 테니.
아인의 시선이 자신을 버린 여자의 얼굴 위에 닿았다.
* * *
도착한 막사엔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이시스, 가느다랗게 눈을 좁힌 남자의 미소는 늘 제레미에게 미약한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힐레인에게 미래를 운운하며 성물을 안겨주었던 것도 이 작자였다.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곁에서 잘 보필하겠다 말해놓고. 이게 그 결과인가?
혹여나 힐레인이 들을까 제레미는 이시스를 책망하고 싶은 기분을 삼켰다. 하지만 목소리가 딱딱하게 흘러나오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당신이 여길 왜 왔지?”
“황자비님을 이곳에 데려온 게 저였습니다.”
“죽이고 싶군.”
힐레인을 간이침대 위로 내려놓으며 제레미가 짧게 읊조렸다. 힘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그랬을 것이다. 이시스가 그녀를 전쟁터로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아쉽지만 아직은 죽어드릴 수 없군요. 저도 두 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나를 위해서 해줄 일이 있다면 그건 힐레인을 살리는 일이야.”
“무엇이 그녀를 되살릴 수 있는지는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죽음이 정해진 힐레인을 살리기 위해선 회귀밖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묘약의 해독제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제레미는 판에게 이곳으로 와달라는 기별을 보낸 상태였다. 지금은 힐레인이 버텨줄 때까지 판이 도착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의 죽음을 또다시 목격하는 것만큼은 하기 싫으니까.
“황자비는 죽어야 합니다.”
이시스의 말에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던 제레미의 이성이 끊어졌다. 그 순간 창의 형상을 한 푸른 마나가 당장에라도 앞을 향해 나아갈 듯 이시스의 주변을 떠돌았다.
“닥쳐.”
“회귀의 재료로 쓰이는 카야의 돌, 황자비께서 착용하고 계시죠.”
연녹색의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힐레인의 목걸이에 닿았다 떨어졌다.
“황자비께서는 마력이 없으시니 죽어야지만 카야의 돌이 자유를 찾을 것입니다. 그래야 회귀의 재료로 쓸 수 있고요.”
“…….”
지금으로서는 가장 뒤로 미뤄두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런 자신의 고뇌를 단번에 간파한 이시스는 거침없이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해도, 제삼자가 감정 없이 지껄이는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 말 할 거면 이 자리에서 당장 떠나. 내 마지막 자비가 사라지기 전에.”
푸른색 창이 금방이라도 이시스를 덮칠 듯 일렁였다.
“…….”
제레미의 분노에 꺾인 이시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시스는 체념한 게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침묵을 지켜주는 것일 뿐.
제레미의 눈동자에 깃든 절망만 봐도 알 것 같았다. 하기 싫은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오게 되리란 걸 그도 인지하고 있음을.
거슬리는 표정을 한 이시스에게서 시선을 뗀 제레미는 이제 막 막사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아인을 바라보았다.
맞은편 의자에 기대어 앉은 그가 까칠해진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지친 눈동자가 그림자처럼 서 있는 이시스를, 그리고 제레미를 향했다. 힐레인을 스쳐 지나갈 땐 금안이 잘게 흔들렸다.
뭔가를 삼키듯 목울대를 움직인 아인이 입을 뗐다.
“그래서, 내가 알아야 할 게 무엇이냐.”
제레미는 무엇부터 말할지 잠시간 고민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아마도 힐레인이 아인에게 전하고 싶어 했을 말부터 먼저 꺼냈다.
“힐레인이 말했듯 지금은 세 번째 삶이야.”
“세 번째 삶이라. 그럼 힐레인이 두 번 회귀하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래. 첫 번째는 당신이, 두 번째는 내가 힐레인을 회귀시켰지.”
“거짓말이군. 같은 사람이 회귀를 두 번 할 수 없다.”
“그래서 두 번째 회귀 때는 흑마법을 빌렸어.”
아인의 의심에 제레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소매를 걷고 일루젼 마법마저 걷어내자 하얗던 그의 손이 금세 까만 어둠으로 물들었다. 흑마법약을 오랫동안 복용한 부작용이었다.
죽은 불모지처럼 변해버린 제레미의 손에 아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명백한 흑마법의 흔적이었다.
흑마법에 손을 대면서까지, 힐레인을 회귀시키고 싶었던 건가?
힐레인을 향한 제레미의 사랑이 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눈앞의 낯선 남자는 힐레인에 의해 숨을 쉬고, 힐레인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저게 사랑이라면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얼마간 궤도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힐레인 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들려온 기침은 일상에서 흔히 지나칠 법한 가벼운 소리였으나 그 순간 아인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했다.
우스웠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사랑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그런 제 모습이 우스워 잇새로 낮은 웃음이 스며들었다. 힐레인의 상태를 확인하는 제레미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그냥 또 회귀해. 내게 이런 비참함을 견디게 하지 말고.”
“회귀하는 건 판의 해독약이 도착한 이후야.”
“아아, 트릭샤 그 계집이 황제에게 묘약을 먹였다 했던가.”
아인이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신선한 이야기이긴 했다. 지난날 트릭샤에게 식어가는 황제의 마음이 제 눈에도 보일 정도였었는데.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고 트릭샤의 말에 놀아났던 황제가 늘 궁금했었다.
왜 그런 걸까 했더니. 묘약. 그것도 절대복종의 묘약이라.
겨우 그거 하나에 유디트가 죽었던가? 이 지긋지긋한 비극이 시작되었던 건가?
“그리고 15년 전으로 회귀하는 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무리야. 아인,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그래서 내게 마력을 달라.”
아인이 느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채를 띤 금안이 힐레인과 제레미를 응시했다. 그 위로 서로를 애끓는 눈으로 바라보던 두 사람이 겹쳐 보였다. 그 모습이 짙어질수록 아인의 머릿속은 차가워졌다.
“대신 회귀는 내가 직접 한다. 힘은 네가 줘야겠어, 제레미.”
잔잔히 눈을 내리깔던 제레미는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줄 알았는데.
그러는 사이 제레미는 이미 자신의 마력을 한데 모은 상태였다. 검게 변한 손을 펴자 짙푸른 색을 띤 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가진 모든 마나를 압축한 마나석이었다.
제레미가 마나석을 아인에게 내밀었다. 아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신이 뭘 할 줄 알고. 겁도 없이.
피식 낮은 웃음을 흘린 아인이 제레미의 마나석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기운이 스민 마나석을 손안에 굴리던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제레미, 내가 15년 전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너와 네 어머니부터 죽일 거다.”
핏빛의 미소가 비뚜름한 곡선을 그렸다.
“해독약? 그것보다 더 빠른 길이 있거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두 연놈을 죽이면 그걸로 끝일 일을. 게다가 죽어 마땅한 여자이지 않은가. 감히 묘약으로 황제를 유혹하고 황후를 폐후시켰으니.
아인의 느른한 시선이 제레미를 향했다.
너는 이제 뭐라고 말할 테냐, 제레미. 증오를 끊어내자 말했던 그 가식적인 가면을 벗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 보렴.
제레미를 바라보던 아인의 얼굴에서 점차 미소가 가셨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 끝에는 민낯을 드러낸 제레미가 있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이 그거라면.”
제레미의 고요한 시선이 아인을 마주했다. 깨끗하고 청명한 눈동자가 올곧은 빛을 발했다.
“유디트 님이 있고, 당신이 있고, 그리고 힐레인만 살아 있다면 돼.”
“…….”
“그 낙원에 굳이 내가 없어도 괜찮아.”
정말로 그거면 된다는 듯, 희미한 미소마저 지어 보이는 제레미를 보며 아인은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