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너도 그녀를 사랑하잖아
아, 낮은 탄성이 잇새로 스며 나왔다.
날카로운 금속이 몸을 헤집는 순간, 화살이 박힌 부위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혈하는 게 좋겠지만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오는 상황.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화살대를 꺾어버리는 것뿐이었다.
화살대를 반으로 꺾자 옆구리 또한 반으로 꺾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비명을 잇새로 흘리며 곧장 검을 치켜들었다.
날아온 화살을 막고 내게 달려오는 병사에게 검을 휘둘렀다. 정신이 흐려질 정도의 아픔이 뒤따랐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긴장에 물든 검은 정확히 병사들에게 날아들어 목숨을 거두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쟁터를 누볐던 그 끔찍한 경험에 감사해야 할지도.
“힐레인!”
그런데 문득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레미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군사복 차림으로 군마를 달렸다. 하얀 뺨에 튄 핏자국 또한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픈 것도 잊고 제레미를 향해 내달렸다.
어느 한 곳에서 맞닿은 제레미를 힘껏 끌어안았다. 내 등을 감싸안은 그가 다급히 몸을 떼 내 몸 상태를 살폈다.
“화살은? 다친 곳은?”
“스쳐 지나갔어요. 조금 다쳤긴 한데 괜찮아요.”
걸치고 있던 제레미의 외투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다행히도 두꺼운 외투는 상처를 가려주기에 충분했다.
“치료해줄게.”
“아뇨, 지금 말고…….”
하지만 그 순간 제레미의 뒤로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인은 곧장 말머리를 틀어 제레미의 뒤를 노렸다. 그의 금안에 깃든 살기가 당장에라도 제레미를 찌를 것만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제레미를 보호하듯 막아섰다. 이윽고 마주하게 된 아인 앞에서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챙!
제레미에게 닿을 뻔했던 아인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아인의 눈동자에 깃든 분노만큼이나 선득한 쇳소리가 귀를 쨍하게 울렸다.
* * *
아인은 자신을 막아선 괘씸한 배신자를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힐레인이 자신의 검을 막아서게 될 날이 올 줄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다. 그것도 죽여 마땅한 제레미를 보호하기 위해서라.
자신이 알고 있던 힐레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대신해 울어주겠다 말했던 지난날의 당돌한 힐레인, 냉대에 주눅이 들었다가도 별것 아닌 몇 마디에 물 먹은 화초처럼 힘을 내던 힐레인, 반짝이는 눈으로 조잘거리던 힐레인.
자신이 알던 힐레인은 이곳에 없었다.
아인의 시선이 길잃은 아이처럼 흔들렸다. 무엇 때문에,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군사를 일으키고, 수많은 피의 강을 건너 도달한 고지는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차라리 텅 비어 있는 게 더 나을 듯했다.
곁으로 데려오고자 했던 여자는 너무도 낯선 얼굴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데려가 버릴까. 원래의 계획대로 제레미를 죽이고 너를 곁으로 데려오면 너는 다시 나의 힐레인으로 돌아와 있을까. 햇살처럼, 공기처럼. 편안한 일상을 선사하던 예전처럼.
아니, 그런 미래는 없을 것 같았다.
제레미에게는 등을 맡기고, 제게는 검을 들이대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자신이 알던 힐레인은 죽었다는 것을.
아인의 시선이 제레미를 향했다.
네가, 네가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구나.
그 순간 아인의 몸에서 나온 돌이 허공에 떠올랐다. 돌에서 나온 금빛 마나가 검을 휘감고, 힐레인과 맞닿은 검을 밀어냈다.
“힐레인!”
그와 동시에 제레미에게서도 폭발적인 마나가 흘러나왔다. 힐레인을 서로 차지하려는 듯 이질적인 두 마나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지난 생에서의 비극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그만해요!”
그 순간 힐레인이 들고 있던 검을 자신의 쪽으로 치켜세웠다. 과거를 보고 온 그녀는 이제 두 사람을 어떻게 멈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이 방법이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지라도.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을 듯 뾰족한 검날을 턱 밑으로 세웠다.
힐레인은 허공에 우뚝 멈춰선 두 마나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볼모로 잡힌 그들은 자신의 예상대로 싸움을 멈추었다.
“조금이라도 공격의 기미가 보인다면 찌르겠어요.”
“힐레인.”
제레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행동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지 안다. 죽지 않겠다 약속해놓고 스스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리석은 싸움을 반복하려는 두 사람에겐 어리석은 방법밖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제일 현명했다.
“지난 생에 때처럼 또 죽고 죽이려 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힐레인의 말에 제레미가 몸을 움찔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모든 걸 다 이해한 듯 보였다. 내가 과거로 가서 무엇을 보고 왔는지,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도.
반면 아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 보였다. 당연했다. 그는 이번 삶이 세 번째라는 걸 전혀 모르니까.
“황태자님, 지금이 우리의 세 번째 삶이라면 믿으시겠어요?”
“뭐……?”
흔들리는 아인의 시선이 내 목걸이 위에 닿았다. 카야의 돌이 가진 힘을 아는 그는 회귀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저는 두 번을 회귀했어요. 지금의 삶까지 합쳐 세 번 모두,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써왔었죠.”
“네가, 나를 지킨다?”
아인의 시선이 흔들렸다.
“네가 지키려 한 건 제레미였겠지. 나의 기사로 지내며 넌 제레미를 지켜왔던 거야.”
아인의 가라앉는 눈빛에 힐레인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님, 저는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에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당신을 막았을 뿐이에요. 인제 그만 멈춰주길 바랐으니까요.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줄 그 선택을 말이죠.”
“잘못된 선택? 네가 뭘 알아.”
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깊게 배인 흉터가 그의 흔들리는 시선 사이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 아이와 나 사이엔 네가 알지 못하는 증오가 있고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악연이 있다.”
“…….”
“나는 멈출 수 없으니 내 앞을 막아섰다가 쓰러지게 되는 건 너야. 내 경고를 무시하지 마. 너를 위해 베푸는 마지막 아량이니.”
그 순간 아인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어디 해보라는 듯 차가운 시선이 내가 쥔 검 끝에 닿았다.
주춤 뒤로 물러서며 검날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저 알아요. 사실 당신의 본마음은 동생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는 걸. 당신이 제레미를 죽이고 싶어 할수록 그 마음이 자꾸만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거 알아요?”
“뭐……?”
“이 모든 비극을 안겨다 준 트릭샤의 아들을 떨쳐낼 수 없어서. 그래서 당신은 일부러 더 제레미를 미워했던 거잖아요.”
힐레인은 성물을 통해서 봤던 과거를 떠올렸다. 10년 전, 제레미에게 주려 했던 독초를 다른 것으로 바꿔놓은 아인을. 미워하려 애썼지만 끝내 미워하지 못했던 아인의 마음을.
“제레미,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두 번째 생에서 죽은 아인을 보고 울었잖아.”
제레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괴로움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을 힐레인에게 고스란히 보이고 만 것도 그에겐 고통이었다. 이렇게 또, 그녀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남긴 것 같아서.
제레미의 곁에서 날카롭게 일렁이던 마나가 점차 잦아들었다. 싸움은 무의미했다. 힐레인을 위한 것도, 아인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인은 마나를 거두는 제레미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무방비한 제레미, 지금이라면 그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바보같이. 이러면 꼭 힐레인의 말처럼, 자신이 제레미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지 않은가.
“일부러 자신을 한겨울 속에 가두지 말아요.”
힐레인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잦아든 두 사람만큼이나 긴장감이 풀린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낙원이 어울려.”
목으로 겨누고 있던 검도 아래로 털썩 떨어뜨렸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기도 했지만 사실 무언가를 들고 있을 힘이 없었다.
힐레인은 때마침 자신에게로 다가온 제레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나른한 눈동자가 제레미를, 그리고 아인을 향했다.
“낙원으로 가요. 봄의 정원에서 서로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던, 장난을 걸고 미소 짓던 두 사람의 천국으로요.”
몽롱하게 중얼거리는 힐레인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레미는 힐레인의 몸을 감싼 커다란 코트 밖으로 무언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음을 발견했다.
“……!”
두꺼운 겨울용 외투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다. 그 아래, 치명상이 숨겨져 있는 줄은.
[스쳐 지나갔어요. 조금 다쳤긴 한데 괜찮아요.]
거짓말이었구나. 입술을 깨문 제레미가 다급히 힐레인의 상처 부위에 마법을 시전했다. 이런 상태로 지금까지 버텼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힐레인은 상처에 비수를 찌르려 작정한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과거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어요.”
어딘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창백한 얼굴로, 하늘을 향한 몽롱한 눈으로.
“힐레인.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게…….”
제레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힐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죽음을 향해가는 상처도, 죽음을 앞당기는 그녀의 읊조림도 막을 수 없었다.
“15년 전으로 회귀해야 해요……. 1년 전이 아니라.”
“…….”
“트릭샤 님이 폐하께 절대복종의 묘약을 주었던 그때로.”
유언이 될지 모르는 조곤조곤한 말이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유디트님이 폐후되신 건 폐하께서 묘약에 조종당하셨기 때문이에요. 묘약의 해독약은 판님이 알고 있으니…… 그걸 들고 회귀하면…….”
힐레인이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붉게 번지는 앞섶을 바라보던 제레미가 고개를 숙였다.
바르르 떨리는 제레미, 붉은 죽음이 드리운 힐레인.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인이 걸음을 움직였다.
자박, 눈을 밟는 고요한 소리에 제레미가 아인을 올려다보았다.
“도와줘, 아인.”
울음 섞인 제레미의 목소리가 아인을 향했다. 굳은 듯 서 있던 그가 몸을 움찔했다.
“너도 힐레인을 사랑하잖아.”
아인을 바라보는 제레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도 모르는 감정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그 시선이 아인은 못 견디게 힘들었다. 하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죽어가는 힐레인을 지켜보는 거였다.
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사로잡힌 채.
어쩐지 이 순간을 한 번 겪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어가는 힐레인, 그녀를 살리고자 필사적으로 애쓰는 제레미.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자신.
무엇하나 명확한 것이 없는 가운데 아인은 몸을 움직였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