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꼭 일 년째가 되는 날 (112/120)

112. 꼭 일 년째가 되는 날

잠시 후 제레미가 나를 내려놓은 곳은 황자궁, 둘만의 추억이 가득한 침대 위였다. 하얀 시트가 금세 붉은 피로 물들었지만, 눈을 감은 내 모습은 마치 잠에 빠져든 사람처럼 평온했다.

제레미에게도 그렇게 보였던 걸까. 살아 있을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제레미는 내 볼을 손끝으로 쓸었다. 얼마간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다신 떠지지 않을 두 눈에 닿았다.

“사랑해. 이 쉬운 말을 지금까지 왜 말하지 못했을까.”

아래로 끝없이 침전하던 제레미가 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잠시 후 영롱한 빛을 머금은 붉은 반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제레미는 그것을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다.

“반지를 주며 이 마음을 고백하려 했어.”

반지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번엔 굳게 감긴 내 눈 위를 배회했다.

“내 고백에 너는 미소를 보여주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미소는 또 얼마나 예뻤을까. 아마도 네 눈동자처럼 반짝였겠지.”

아무리 눈을 마주쳐도 죽음이 내려앉은 두 눈은 떠지는 일이 없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붉은 빛에, 제레미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후회해, 진작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던 걸.”

끝내 닿지 못한 고백을 지켜보며 나는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

그와 나 사이엔 수많은 층계가 있었다. 하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득히 먼 거리도, 쉼 없이 달려갈 때만큼은 지척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늘, 막바지에서 딛고 있던 바닥이 무너졌다. 이제 겨우 한 걸음, 한 걸음이 남았는데.

비극을 누구의 탓으로도 돌릴 수 없다는 것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제레미, 아인, 그리고 나. 적어도 우리 중엔 악역이 없었으므로.

비명이 나올 정도로 가슴 아픈 벌을 받고 있었으나, 우리 중 누구도 이런 벌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과거를 모두 보고 온 내가, 그것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너무 가혹한 거잖아. 무심히 우릴 지켜보고 있는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잔인한 운명에 나를 가두고, 그러면서도 회귀라는 특혜를 내리고.

잘못 꼬아버린 운명을 풀 기회를 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에 들어찬 울분도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찌 됐든 해결의 실마리는 손에 들어온 것 같으니.

“다시 만나, 신부야.”

카야의 돌을 쥔 제레미가 물기 어린 말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만나, 제레미.”

작별을 고하는 것과 동시에 손에 쥔 구슬을 깨뜨렸다. 그 순간 제레미와 시선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눈앞의 장면이 흐려지는 바람에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 잠깐의 마주침이 아쉬워 눈물이 흘렀다. 어서 빨리, 제레미를 만나고 싶었다.

* * *

잘 떠지지 않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시린 겨울 햇살에 물든 널찍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계절이 달라졌다는 것만 빼고는,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방의 모습 그대로였다.

현실로 돌아온 건가.

흐릿한 눈으로 방 안의 풍경을 곱씹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의 깜빡임 끝에 선명해진 시야로 입술을 말아 올린 이시스가 보였다.

“……무사히 돌아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시스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돌아오긴 돌아온 모양인데.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협탁 위의 물잔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여러 장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나는 의아한 얼굴로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발작했던 때, 테이 사제가 읽어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때 편지를 읽어준 게 테이였구나.

가장 약해져 있던 순간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목소리. 익숙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테이였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늘 작기만 했던 꼬마가 언제 이렇게 자라 누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내려갔을 테이를 떠올리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흐릿해진 눈으로 벽난로 옆 곤히 잠든 테이를 바라보았다. 세상 모르고 잠이 든 모습이 어쩐지 지쳐 보였다.

“깨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예, 저도 몇 시간 푹 재우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나저나…….”

말끝을 흐리며 턱을 쓸던 이시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과거 여행은 어떠셨나요? 답을 찾았나요?”

정곡을 파고드는 물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답이라면 찾았다. 하지만 이게 정답일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에 체념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아마도…….”

“제가 도와드릴 일은 더 없습니까?”

이시스는 찾아낸 정답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넌지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설마 정답이 뭔지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의아해졌지만 맹한 웃음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저를 황자님께 데려다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입니다.”

눈을 접어 웃던 이시스가 손을 내밀었다. 미심쩍음을 감추지 못한 채 손을 맞잡자 하얀빛이 터져 나오며 공간이 바뀌었다.

여긴 어디지?

구겨지고 말리던 풍경이 어느덧 제자리를 찾았을 무렵, 나는 순간 이동한 곳이 텅 빈 막사 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를 왜 여기로……?”

“가까운 접전지의 막사로 모셨습니다. 황자님께서는 현재 전쟁터로 향하신 것 같군요.”

전쟁이라는 말에 퍼뜩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쟁 중이란 걸 알려주듯 가지런히 놓인 몇 자루의 검과 방패들 그리고 빼곡히 놓인 지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전이 일어난 건가요?”

“황자님께서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에 모르실 만했습니다.”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 든 사이 결국 내전이 일어나고 말았구나.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빠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멍하니 여러 장의 지도가 펼쳐져 있는 테이블 앞에 섰다. 그 위로 빼곡히 자리한 낙서들을 보자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인지, 누구에게 유리한지 대강의 감이 왔다. 오늘의 접전지 역시.

“제라드 계곡으로 향한 것 같군요.”

제라드 계곡이라. 뜻하지 않은 장소를 입안에 굴리며 생각에 골똘했다. 곧장 제레미에게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곳으로 향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고민이 되었다.

험준한 산세, 치열한 접전.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종횡무진 전투지를 누볐던 예전만큼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곁을 떠나겠다는 것만 빼고. 죽는 것도 안 돼.]

[안 죽어요. 약속해요.]

제레미의 앞에서 죽지 않겠다 다짐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두 번이나 내 죽음을 보았던 그에게 또다시 그런 슬픔을 안겨줄 수는 없으니까.

제레미를 믿고, 막사에서 기다리는 쪽이 낫겠다 생각하던 그때였다.

이만 테이블 위에서 시선을 떼려다 문득 지도의 가장 아래 적혀 있는 날짜에 시선이 갔다. 멍하니 날짜를 곱씹다 퍼뜩 이시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오늘 날짜인가요?”

“예.”

잔잔히 고개를 끄덕인 이시스는 내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듯 차분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이시스가 마련해준 적막감 속에서 멍하니 펄럭이는 막사의 문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이미 하늘의 정점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이 없었다.

“제라드 계곡으로 저를 순간 이동시켜주실 수 있나요?”

“그것이 당신의 선택인가요?”

“네.”

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듯 이시스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 내게 여러 갈래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던 그답지 않게 유독 조용한 태도였다.

그 고요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생각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제레미를 만나는 것만 생각할 거야.

일부러 발을 가볍게 굴리며 무기가 놓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손에 맞는 검을 찾은 후 실내용 원피스 위로 전투용 외투를 걸쳤다.

투박한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옷자락을 보고 있으니 꼭, 일 년 전의 그 날이 떠올랐다. 드레스를 입은 채 황태자궁으로 보고를 갔던 그 날이.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끝내 무사히 하루를 마쳤었지.

오늘도 꼭 그날과 같은 행운이 따라주기를.

간절한 바람에 답이라도 하듯 툭,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외투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그것은 조그만 상자였다. 꽤나 앙증맞은 물건을 품고 있을듯한.

홀린 듯 상자를 연 나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이 반지는…….

섬세한 장미 넝쿨의 세공, 그 가운데 영롱한 빛의 붉은 보석이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두 번째 죽음 후 제레미가 내게 보여주었던 반지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반지를 가만히 쥐었다가, 손안에 굴려보았다. 낄까, 말까. 결국 충동을 참지 못한 나는 다급히 반지를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지른 일이었다.

뒤늦게 그러지 말 걸, 하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마지막은 무슨. 반드시 살아남을 건데.

반지는 제레미에게서 직접 받는 게 좋겠다 생각하며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반지가 마음에 걸렸으나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 * *

아닐 거야.

적의 군대와 대치한 와중에도 제레미는 집중하지 못한 채 자꾸만 계곡 뒤편을 돌아보았다.

황량한 겨울나무와 하얀 눈밭. 별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었지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유 없이 그 속에서 힐레인이 나타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찾아들었다.

아마도 불안이 찾아드는 이유는, 오늘이 힐레인이 죽었던 날이기 때문이겠지.

힐레인은 같은 날, 두 번의 죽음을 맞았다. 오늘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운명인 것처럼.

‘그럴 리 없어. 힐레인은 대공저에서 안전하게 잠들어 있으니까.’

제레미는 같은 말을 반복해 마음에 되새겼다. 조금은 불안감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자, 제레미는 아인의 군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인의 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사가 단단한 갑옷을 입은 채 검을 치켜들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검 자루를 보는 것 같았다. 반사된 금속의 빛에 눈이 시렸다.

군사들의 가장 앞에 선 아인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작은 동작에 모두의 움직임이 멎고, 아인의 목소리가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을 갈랐다.

“반역자 제레미를 처단하라.”

일제히 터져 오른 함성과 함께 군사들이 계곡으로 쏟아져 내렸다.

얼마간 계곡의 지형과 군사들의 움직임을 눈에 담던 제레미가 앞을 향해 나아갔다. 힘차게 도약하는 제레미의 뒤로 아군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기사들의 날카로운 금속의 부딪침에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리고, 하얗게 새어버린 숲에서 놀란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그 속에서 베고, 태우고, 말살하고. 오직 죽음을 내리는 것에만 집중하던 제레미는 기습적으로 적군 사이를 파고들었다.

눈이 벌게진 군사들이 제레미에게 따라붙었지만 눈이 덮인 가파른 계곡은 마법사가 아닌 군사들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지형이었다. 접전지를 굳이 험준한 제라드 계곡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단숨에 아인과의 거리를 좁혀가던 그때, 제레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인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상태였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시야 사이로 들어온 한 여인 때문에.

매서운 눈보라에 사정없이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보석처럼 선명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 멀리서도 단번에 힐레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제레미는 아인에게 가려던 것을 멈추고 곧장 힐레인에게 향했다.

그녀가 강한 걸 안다. 지금껏 그녀처럼 검을 휘두르는 자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녀는 눈앞의 적을 깔끔히 기절시키며 차근차근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실력이었지만 제레미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적의 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은커녕 차가운 눈보라가 내려앉는 것마저도 안타까웠다.

그때 문득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힐레인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아인.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허공 위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법 공격이 이어지고, 천둥이 울리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폭풍이 일었다.

“안 돼!”

비명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온 곳은 힐레인 쪽이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가파른 계곡을 내달리고 있었다. 가시처럼 뾰족한 나뭇가지가 몸을 스치는 줄도 모르고.

매섭게 날아든 화살이 몸을 관통하는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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