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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편지 (111/120)

111. 편지

힐레인의 상태를 살피던 테이는 벽난로로 가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자 테이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며칠째 퍼붓는 눈보라에 여름의 울창했던 나무는 다시는 생을 틔우지 않을 것처럼 여위었다. 마른 가지 위로 짐 덩이처럼 내려앉은 눈송이를 보며 테이는 무심결에 눈을 찌푸렸다.

‘봄이 올 때까지 견뎌줄지 의문이군.’

심심한 감상에 젖어 있던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가 건넨 세 장의 편지. 각각 황자와 루 대공이 보내온 편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버려도 괜찮은 편지였다.

사제님께 마음을 담아 - 레틴 에반스.

테이는 잔뜩 멋 부린 글씨체를 찡그린 얼굴로보다 벽난로 위에 내려놓았다. 안으로 던져넣으려는 것을 수양하는 마음으로 참아낸 결과였다.

나머지 두 장의 편지를 손에 든 테이는 편지의 주인인 힐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레미와 루, 두 사람의 편지를 읽어주는 건 테이에게 익숙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보내오는 편지가 귀찮을 때도 있지만, 테이는 단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 없는 성실한 낭독가였다. 듣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타이밍 좋게 힐레인이 미소를 지어 보일 땐 나름의 보람도 있었다.

무엇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던 테이는 갑작스레 몸을 트는 힐레인을 보며 어깨를 움찔했다.

“……!”

편지를 보는 그 잠깐 사이 힐레인의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이마 위로 맺힌 땀방울,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찌푸려진 미간에 테이가 힐레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손안에 닿은 열기가 몹시도 뜨거웠다. 곧장 신성력을 부어주었으나 힐레인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힘들면 꿈에서 깨도록 해요.”

허공에 힘없이 뻗어진 손을 테이가 붙들었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지 마세요. 정신이 붕괴되기 전에 돌아와야 합니다.”

간곡한 부탁이 담긴 목소리가 끊임없이 힐레인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그사이 헐떡이던 숨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어졌고 안색은 파리해져만 갔다.

이를 지켜보는 테이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누나는 아무리 괴로워도 답을 얻을 때까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 생각할 테니.

스스로 돌아오게 할 수도, 강제로 데려오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꿈속에서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해야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테이는 다급히 제레미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를 쥔 손에 땀이 차고, 문장을 읽어내려가는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

나의 아내 힐레인에게.

애정 가득한 첫마디로 시작된 편지는 혹독한 겨울이 지난 그 이후, 다가올 봄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힐레인이 봤다면 분명 힘을 얻었을 따뜻한 말들. 부디 그녀에게 닿기를 바라는 테이의 표정이 간절해졌다.

* * *

잔뜩 웅크린 몸이 저릿해져 올 무렵, 나를 괴롭히던 과거의 장면들이 사라졌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둠, 완벽한 고요. 무덤에 들어간 것만 같은 그 적막감이 정신이 피폐해져 버린 지금은 오히려 달갑게 느껴졌다.

차라리 구슬을 깨고 나가면 괜찮을까. 하지만 그 역시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호기롭게 과거를 엿보았던 나는 완벽한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가만히 몸을 웅크리는 것밖엔 할 수 없는.

혹여나 성물의 힘이 발동될까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지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채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나의 아내, 힐레인에게.]

아내, 너무도 포근히 들려오는 단어에 어깨를 움찔했다.

목소리는 달라도, 문장의 주인이 제레미라는 걸 곧 깨달았다. 나를 아내라 불러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제레미밖엔 없으니까.

아직 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여파인지 피에 물든 제레미가 다시금 눈앞에 어른거렸다. 바짝 긴장한 채 몸을 웅크렸지만, 귓전을 두드린 제레미의 편지가 떨리는 몸을 다독였다.

[……어젯밤은 꿈을 꿨어, 힐레인.]

목소리를 버팀목 삼아 기댈 수밖에 없도록, 다정하게.

[너와, 우리를 빼닮은 귀여운 아이가 내 품에 안겨 오는 그런 행복한 꿈을.]

너, 우리, 아이. 그리고 행복.

한 단어, 한 단어가 지친 마음을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마치 제레미와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포근한 침대 위에 다시 몸을 누인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미소 짓는 그가 있고, 손을 뻗으면 가만히 품을 내어주는 그가 있다.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넘기며 잔잔히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땐 가끔은 그의 품에서 녹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그런 기분이 몸을 휘감았다. 버팀목처럼 다가온 목소리에 응석을 부리듯 지친 정신을 기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앞이 밝아졌다.

평화로운 저녁의 풍경 사이로 제레미와 나, 그리고 제레미를 닮은 아이가 있었다. 제레미의 품으로 달려간 아이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낭랑한 목소리가 석양빛 하늘로 번져 들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한, 바라고 또 바랐던 미래.

[나는 네게 그런 미래를 주고 싶어.]

잠시 후, 잔잔히 들려오던 목소리가 끊어지고. 나는 제레미가 주겠다는 낙원을 가슴에 품은 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빛을 내는 구슬을 멍하니 손에 쥐었다. 무슨 과거를 보게 될지 여전히 무섭긴 해도. 그래도 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바라는 미래로. 제레미가 기다리는 미래로.

* * *

뽀얀 눈을 머리 위에 얹은 이시스가 대공저로 들어섰다. 눈을 털어내지도 않은 채 들뜬 걸음을 옮긴 곳은 리야가의 두 남매가 있는 방이었다.

아마도 오늘이었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가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고리를 돌렸다.

난롯불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공간으로 들어서자 동화책을 읽어주듯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따라 들어선 침실은 온통 하얀 종이로 가득했다.

침대 위로 흩어진 종이를 무심결에 든 이시스가 유려한 문장의 끄트머리로 시선을 옮겼다. 닳고 닳은 편지의 발신인은 제레미, 루, 치료사 판, 센, 황후 등 다양했으나 대부분은 제레미와 루가 보내온 것이었다.

소임을 다 한 편지들이 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인지. 의문 가득한 이시스의 시선이 편지에 둘러싸인 힐레인을, 그리고 테이를 향했다.

테이는 조급한 얼굴이었으나 빠르지 않은 어조로 편지를 읽고 있었다. 고왔던 목소리가 얼마쯤은 쉬어 있는 걸 보니, 쉼 없이 편지를 읽어내려갔단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첫 만남에서 보았던 나비, 기억나요? 당신은 나비가 황궁에서 자라는 게 안전할 거라 했지만 난 아니에요. 여전히 나는 훨훨 날아갈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게 나비에게 행복하다고 보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술에 취해 휘갈겨 쓴 듯한 동생의 낯뜨거운 편지가 테이의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성이 마비된 건 아니었는지 편지의 끝에는 힐레인에게 읽어준 뒤 태워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그 편지가 수없이 반복해서 읽히게 될 거라는 걸, 끝내 친형에게까지 내용을 들키게 될 거라는 걸. 가여운 동생은 알고 있었을까?

피식 미소 짓던 이시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테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깨를 가벼이 두드리는 감촉에 테이가 이시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이시스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것인지 피곤함에 절은 눈꺼풀이 살짝 들려 올라갔다.

“이시스 님?”

“이게 다 뭡니까……?”

“…….”

편지를 손에서 놓은 테이가 붉게 충혈된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듯 눈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내려와 있었다.

“편지를 읽어주는 게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안정이라면…… 황자비께서 발작을 일으켰던 겁니까?”

“예……, 얼마 전에 한 번. 언제 또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드리고 있었습니다.”

테이의 말에 이시스가 힐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얼마간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던 그가 스르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처방이었네요. 많이 약해진 상태지만 또다시 정신이 붕괴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안도의 숨을 내쉰 테이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힘없이 내린 손에서 손때 묻은 편지가 팔락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시스가 가늘게 눈을 휘었다.

“그 편지는 제가 가져도 될까요?”

“왜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눈웃음에 테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의 미소. 사제들은 종종 이시스의 미소를 그렇게 불렀다.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때마다 그는 습관적으로 눈을 접어 웃곤 했다.

“동생의 흑역사를 수집하고 있거든요. 제겐 큰 기쁨이랍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테이가 흔쾌히 편지를 내밀었다. 사악하기로는 이시스 못지않은 테이였다.

“그나저나…… 눈을 좀 붙이시는 게 어떤가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지금부터는 제가 황자비님을 간호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두 시간 뒤에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꼭 깨워드릴 테니, 지금은 좀 주무십시오.”

이시스의 말에 설득된 테이는 무거운 걸음을 뗐다. 작은 움직임에도 어지럼증이 찾아드는 걸 보니 몸이 많이 약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이시스가 와준 김에 잠깐 눈을 붙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럼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장 깨워드리지요.”

근처의 소파에 기대어 앉는 테이를 보며 이시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보였던 그 악마의 미소와 똑 닮은 미소가 얼마간 입가에 걸렸다.

잠시 후 이시스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흰빛이 테이의 주변에 내려앉았다. 수면을 돕는 신성력이었다. 몇 시간 정도는 옆에서 무슨 짓을 해도 잠을 깨지 않으리라.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한 이시스가 이번엔 힐레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슬슬 깨어날 때가 되었는데.

톡톡톡, 손끝으로 가구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질 무렵. 힐레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 *

성물은 내게 두 번째 죽음을 보여주었다.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제레미의 편지 덕에 처음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

제레미가 내게 행복한 미래를 주고 싶다 말한 것처럼 나도 무언가를 제레미에게 해주고 싶었다. 제레미가 그린 낙원 속에, 미소 짓는 아인을 선사해줄 수 있다면. 이런 지옥쯤은 얼마든지 견뎌줄 수 있어.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쥔 채 두 번째 지옥을 눈에 담았다.

그림자 기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나, 그런 나를 끌어안은 채 아인에게 분노하는 제레미. 과거의 두 사람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닮아 있었다.

“너도 죽어, 아인.”

어느 한 사람이 먼저 쓰러질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었다. 거대한 마나 폭발이 일어날 때까지.

자욱한 먼지 사이로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제레미였다. 휘청휘청, 유령처럼 다가온 그가 벽에 기대어 앉은 아인에게 다가왔다. 떨리는 손길이 아인의 코끝에 닿았다.

“……윽.”

터져 나온 짧은 흐느낌과 함께 제레미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당신 말처럼, 내 존재 자체가 재앙이었는지도…….”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제레미가 나를, 그리고 아인을 한 차례씩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한없이 약하고 가냘프게 보였다.

긴 울음 끝에 제레미가 떨리는 손을 아인에게로 뻗었다. 망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힘없이 제레미에게로 전해졌다.

카야의 돌을 목숨처럼 움켜쥔 그가 몸을 일으켜 나를 안아 들었다. 복도를 벗어나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아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뒤로 가느다랗게 늘어진 그림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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