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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가시밭길 (110/120)

110. 가시밭길

잠시 후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선 트릭샤는 모든 궁인을 물렸다.

“폐하.”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이냐.”

황제는 무심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는 트릭샤의 말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에 조금 의아해졌다.

분명 황제는 트릭샤를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들었는데……. 평생의 짝이라 말해왔던 유디트를 내칠 정도로 그 사랑이 컸다고. 하지만 황제는 무척이나 건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찬바람 같은 무심함에 트릭샤는 붉은 입술을 짓씹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시선을 내린 그녀가 우아한 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요즘 들어 왜 제게 와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만개한 꽃을 닮은 유혹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감히 황제의 턱선을 훑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농밀했다. 하지만 내 눈엔 그 행동이 무척이나 기계적으로 보였다.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목적에만 충실한 유혹.

황제도 그렇게 느낀 것이었을까. 잠시간 트릭샤를 향했던 못마땅한 시선이 다시금 서류에 내려앉았다.

“정무가 바빠 어쩔 수가 없었다.”

“거짓말…….”

황제를 향해 내리깐 트릭샤의 시선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서류에 시선을 두느라 황제는 트릭샤의 변화를 미처 살피지 못한 상태였다.

느릿느릿 책상 위에 놓인 물잔으로 손을 옮긴 트릭샤가 무언가를 물에 탔다. 그제야 트릭샤를 향해 시선을 옮긴 황제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안심하십시오, 독은 아니니.”

피식 웃어 보인 그녀가 단숨에 물을 머금었다. 황제의 의문이 깊어질 무렵, 컵에서 입을 뗀 그녀가 천천히 황제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기습적으로 내려앉은 입술에, 잠시 후 황제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녀가 황제의 얼굴을 감쌌다.

“절 계속 사랑하셨어야죠, 그토록 사랑하셔 놓고 왜 이제 와 후회하십니까.”

“무슨…….”

“이건 당신께 내리는 달콤한 복수입니다. 저를 사랑하고, 제 앞에 복종하세요.”

트릭샤의 기대 어린 시선 아래서 황제의 표정에 선명한 변화가 일어났다.

“트릭샤…….”

황제의 시선이 타오를 정도로 뜨거워졌다. 방금 전 무미건조한 말을 내놓던 때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절절 녹을 듯이 트릭샤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묘약이라도 삼킨 것처럼.

트릭샤는 뿌듯한 얼굴로 황제를 끌어당겼다. 농밀한 키스가 이어지고 입술을 뗀 그녀가 황제에게 명령했다.

“나를 황후로 만들어.”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듯 황금빛의 눈동자엔 오직 트릭샤만이 담겨 있었다.

모든 비극의 시작, 트릭샤가 황제에게 절대복종의 묘약을 준 순간이었다.

* * *

트릭샤가 황제에게 절대복종의 묘약을 주었다.

빠르게 바뀌는 장면 속에서,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졌다. 황제는 트릭샤의 명에 따라 착실히 유디트를 끌어내렸고 그 후는 내가 알고 있는 과거가 펼쳐졌다. 유디트의 몰락, 아인의 변화, 제레미의 백치 연기까지…….

‘묘약을 먹어서 그런 거였어.’

충격적인 사실에 몸을 떨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절대복종의 묘약이었다니.

하지만 이제 와 새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도 모습을 보이는 것도 불가능한 몸이니.

멍하니 반투명한 손을 바라보았다. 내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인데, 성물은 왜 내게 이런 장면을 보여준 걸까. 답을 얻지 못한 채 고민하는 사이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어딘가로 휩쓸리듯 밀려간 그곳은 황궁 안이었다. 벌써 몇 번째 이런 일을 겪었던 나는, 내가 떨어진 시간대가 언제인지부터 가늠하려 애썼다.

보통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등의 수고가 필요했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저건…… 나잖아.’

내 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에 와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 축 처진 팔다리와 그 옆에 여러 파편으로 흩어져 있는 맹세의 보석까지.

첫 번째 죽음을 맞았을 때였다.

혼탁해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파고들었다. 그 당시 나는 제레미를 죽이라는 세뇌를 거부하다 끝내 보석을 깨뜨렸었다. 그로 인해 끔찍한 고통과 함께 숨을 거두었었고.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 끊어진 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알고 싶다는 바람을 품은 적도 없었고.

그런데 지금, 전혀 뜻하지 않았던 마지막 순간이 눈앞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외면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홀로 죽어 있는 나, 피처럼 흩어진 붉은 보석의 파편들.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단 마음에 발걸음을 돌리는데, 문고리가 흔들렸다. 처참한 광경을 제일 먼저 본 것은 아인이었다.

“힐…….”

휘청이는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끊어진 숨과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잠시 후 그의 눈 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눈을 떠.”

겨우 토해낸 말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그 틈으로 도무지 아인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숨죽인 흐느낌이 스며들었다.

강하고 단단해 가끔은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던 아인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부하를 끌어안은 채.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주춤 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인이…… 슬퍼하고 있어?

맹세의 보석을 몸에 박은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도구였다. 도구가 망가지고, 다신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우는 주인은 없다.

그러니 아인은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첫 번째 죽음에서부터 떠나왔다. 죽음으로 아인을 배신했지만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날 떠나지 말거라.”

하지만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인의 등이 떨리는 걸 보며 깨달았다. 내가 꽤 잔인한 짓을 벌이고 떠났다는 걸.

“내 손을 먼저 잡아 온 건 너였잖아.”

유디트의 장례식을 찾았던 날, 나는 아인을 만났다. 나보다 세 살이 더 많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는 세 살 어린 테이보다도 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어도 속은 곪아 문드러지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리면 상처가 아물 수 있을 텐데.

그날 나는 고집스레 버티고 있는 남자의 손을 잡고 대신 울어주었다. 뿌리치지 않는 당신을 보며 누군가 손을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당신의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황태자를 섬기라는 아버지의 뜻도 있었지만 사실은 내가 그리하고 싶었다. 우는 것도 잊어버린 가여운 황태자에게 손 내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을 놓고 싶어졌다.

나는 그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었다. 다른 이의 생을 무참히 꺾고 돌아올 때면 아인은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다음 임무를 기다리라 말했다. 쓰임을 마친 도구를 장 안에 걸어두듯 태연하게.

그럴 때마다 옷자락 안으로 말라붙은 상처가 너무도 아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뭘까.

그 고통이 당연해질 무렵, 나를 사람이라 깨닫게 해준 건 제레미였다.

첫 번째 생에서 야간 임무로 지독한 감기를 옮아왔을 때, 제레미는 잠이 든 척 누운 내게 치료마법을 걸어주었다. 열에 들뜬 이마를 어루만지고 포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첩자로 온 신부에게 보일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자칫 마법사임을 들킬 뻔한 위험천만한 짓이었고 실제로 나는 그 일로 인해 그의 정체를 깨닫지 않았나.

그날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후 나는 제레미의 다정함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감시의 시선이 아닌 순수하게 제레미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그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수록 흐릿하기만 했던 나날들이 선명해져 갔다. 따뜻한 나날 속에서 나는, 나를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대해주는 제레미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제레미의 약점을 들추는 게 아닌 약점을 보호하게 되었다. 나는 어중간하게 아인의 손을 놓지 못하는 동시에 제레미의 손을 잡아버린 거였다.

아인에게 상처가 될 거란 걸 알지만 제레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내가 그의 손을 놓는 순간 영영 이별이라는 걸 예감했기에, 한 시도 제레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등을 돌렸던 사이 아인이 무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맞닿은 손에서 종종 낯선 따뜻함을 느꼈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던 것 같아.”

사랑이었는 줄은 몰랐다.

“감정 따위 죽이고 살았다. 눈앞의 것들을 베고 쓰러뜨리는데 그런 연약한 것들은 필요치 않았으니까. 단단하게,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굳건히, 그렇게 살려고 했다. 그런 나를 흔든 건 항상 너였어.”

아인의 고백은 잔잔하고 고요했다. 망자를 감싼 적막한 공기처럼.

“그게 싫어서, 너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사지로 내몰고, 위험한 일을 도맡게 했지. 끝내 내 곁으로 돌아오는 널 보고 안도했다.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네가…… 좋았다.”

아인이 천천히 자신의 목 부근에 손을 올렸다. 셔츠 깃 사이로 내가 목에 걸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새의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야의 돌이었다.

“네 숨을 다시 이어붙이면…… 이 끊어질 것 같은 마음도 좀 진정이 될까…….”

그런데 그때 아인의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힐레인이 죽었어?”

제레미의 시선이 아인의 품에 안긴 내 얼굴 위를 배회했다. 길 잃은 아이처럼 떨리던 눈동자가 아인을 향했다.

나를 품에 안은 채 일어선 아인이 제레미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메마른 자리 위로 싸늘한 분노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인이 한 팔로 나를 고쳐 안고서 다른 팔을 제레미에게로 뻗었다.

“……!”

불시에 목이 졸린 제레미가 괴로운 표정으로 아인을 노려봤다.

“제레미. 인제 그만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내자.”

채 말릴 새도 없이 폭발음이 귓전을 때렸다. 자욱한 먼지 위로 수십 개의 마법의 돌이 원을 그리며 떠올랐다. 힘을 개방한 아인이 제레미와 벌어진 거리를 좁혀왔다.

아인을 스친 제레미의 시선이 그 품에 안긴 나를 향했다. 힘없이 늘어진 팔과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는 제레미의 눈동자에서 푸른색 불꽃이 일었다.

푸른색의 마나는 예리한 칼날이 되어 곧장 아인에게 내리꽂혔다. 마법의 돌 몇 개가 무참히 부서짐과 동시에 상반된 힘이 허공에 부딪혔다.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가 죽을 것처럼 싸우는 그들을 보며 굳어 있는 다리를 움직였다.

“그만둬요!”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지만 내 존재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투명한 몸 위로 두 사람의 마나가 한 차례씩 스쳐 지나갔다. 허공을 스칠 때와 같이.

이시스가 말한 가시밭길이 그제야 뭔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고, 상처 입는 장면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나를 찔러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손이 떨렸다.

“제발…… 그만…….”

치열한 싸움 끝에 제레미가 아인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내 제레미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동요하는 시선의 끝에는 아인의 품에 안겨 있는 내가 있었다.

결국 예리한 칼날 같은 마나는 아인에게 닿지 못한 채 깨어졌다. 깨진 파편은 아인의 마나에 의해 되살아나 곧장 제레미를 찔렀다.

“제레미……!”

눈앞에 산란하는 붉은 피를 보며 나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미 일어난 과거다.

눈앞의 장면은 성물에 의해 단순히 재현된 것일 뿐이다. 알면서도 제레미의 부상에 가슴이 얼어붙었다. 영혼이 산 채로 찢겨나가는 게 이보다 덜 아플 것 같았다.

“싫어…… 싫어.”

두 귀를 막고 무릎을 끌어당겼다. 억지로 쥐어짠 혼자만의 세계에서 나는 이시스의 경고를 떠올렸다.

[가시밭길이라 말씀드렸듯, 보고 싶지 않은 괴로운 과거도 있을 겁니다. 못 견디겠다 싶을 땐 구슬을 깨뜨려서라도 돌아오셔야 해요. 정신이 붕괴되면 현실로 다신 돌아오지 못할 테니.]

손안에 쥔 구슬을 세게 그러쥐었다. 이대로 구슬이 깨지면 다시는 과거를 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괴로운 과거의 장면을 눈에 담는 일 또한 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원하던 미래와도 영영 이별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흐려진 의식 속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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