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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두 명의 크레셰 (107/120)

107. 두 명의 크레셰

짧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웃음을 누른 제레미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아……!”

그런데 그때 힐레인이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힌 채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모르는 탄성이 평화로운 대화가 오가던 공간에 뜨거운 불을 놓았다.

힐레인의 심상찮은 반응에 제레미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불 안에서 보드랍고 말캉한 무언가를 만졌던 것 같은데. 설마…….

당황한 제레미가 퍼뜩 손을 뗐다. 서늘한 밤공기가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감쌌지만, 보드랍고 따뜻했던 감촉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미…….”

뭔가 사과의 말을 꺼내려 하던 그때 힐레인이 온 힘을 다해 제레미의 팔을 때렸다.

“황자님! 거긴, 배잖아요!”

화들짝 놀란 제레미가 멍하니 자신의 팔을 붙들었다. 한 번만 더 맞으면 팔이 부러지지 않을까.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아이참, 하필 저녁도 많이 먹은 상태인데…….”

힐레인이 울상을 지으며 제레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천천히 당긴 손이 포근한 이불 아래로 향하고 잠시 후 보드라운 잠옷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말끔히 사라졌죠?”

“……응.”

제레미의 손가락이 힐레인의 명치 위를 배회했다. 아인의 흔적이 사라진 그곳은 평편하고 따뜻했다. 옷감 위로 미약하게 맥박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제레미는 보석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늘 이 순간을 갈망해왔었다.

아인의 명령을 받지 않는 힐레인. 도구가 아닌 힐레인. 자유를 얻은 그녀는 얼마나 반짝거릴까.

제레미는 그녀가 자유를 누리길 바랐다. 오직 그 소망 하나로, 태풍과도 같은 지금을 견디고 있는 거니까.

“힐레인, 앞으론 네 뜻대로 자유롭게 살아.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말고 온전히 네 의지로.”

진심을 담은 말에 힐레인은 얼마간 먹먹한 표정이 되었다.

‘내 의지로…….’

어느 순간부터 오직 명령에만 기대어 왔던 삶이었다.

오늘은 뭘 할지, 내일은 또 뭘 하고 지낼지. 일상과도 같은 사소한 고민은 힐레인에게 사치였다. 주어진 임무만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이, 그렇게 하루가, 일 년이, 생의 반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젠 내 뜻대로 살라고……. 자유롭게?’

빠르게 약동하는 심장이 문득 간지러워졌다. 어째서 이 남자는 가장 듣고 싶었던 말만 해주는 걸까. 어떨 땐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 했던 소망까지 읽어내는 이 남자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뻣뻣하게 굳어 있던 힐레인의 입술 사이로 말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행복해서,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그러다 제가 황자님 말도 안 들으면 어쩌려고요?”

힐레인이 쿡쿡 웃으며 눈을 올려 떴다. 악동처럼 앳되어 보이는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럼.”

얼어붙었던 아내의 사르르 녹는 미소에, 이를 지켜보던 제레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가 네 말을 듣지, 뭐.”

“허무맹랑한 말도요?”

잠시 흠칫한 제레미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 곁을 떠나겠다는 것만 빼고. 죽는 것도 안 돼.”

“안 죽어요. 약속해요.”

비장한 표정을 짓는 힐레인의 얼굴엔 어떠한 거짓도 묻어나지 않았다.

제레미는 그 모습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지난날 죽음으로 자신을 구했던, 그런 잔인한 미래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확신에.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땐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쉬운 얼굴로 방을 나섰을 제레미를 생각하자 미소가 새어 나왔다. 각방을 쓰자는 말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운해했으면서. 그래도 끝내 내 뜻을 존중해줬다는 점이 기쁘게 다가왔다.

제레미가 누웠던 자리를 손으로 쓸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운에 매달려 있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잠시 후, 최소한의 준비가 끝나자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방문을 두드렸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린 이는 뜻밖에도 이시스였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백금발,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하얀 사제복. 대강 잠옷만 갈아입은 나와 달리 그는 몹시 말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유의 맹한 미소도 장착을 완료한 상태였다.

“잠자리는 불편하시지 않으셨나요?”

나긋한 물음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정이 가지 않았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만 같고, 뭘 말해도 진심 같지도 않고…….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답니다.”

그런 내 의심을 걷어내려는 듯 이시스는 더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계속 서 있게 두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창가의 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넉살 좋게 차를 한 모금 삼킨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레셰 몰래 당신께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도움을요? 만약 저번처럼 한쪽을 고르라고 말 하실 거면…….”

“아닙니다. 저는 두 사람 다 구하겠다는 당신의 뜻을 존중해요. 그 바람을 이뤄드리고자 이곳에 온 거고요.”

“하지만 크레셰님은 그런 미래는 없다고…….”

크레셰는 분명 두 사람 다 사는 길은 없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시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 게…….

“혹시 크레셰님이 제게 거짓말을 했던 건가요?”

“선의의 거짓말이라 해두죠.”

“그럼…….”

“여러 갈래의 미래 중에는 분명 두 사람 다 사는 미래도 있었습니다.”

이시스의 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찻잔의 손잡이를 그러쥔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게 사실이라면 크레셰님은 제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죠……?”

여유롭게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색이 연한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스몄다.

“크레셰는 당신이 살기를 바라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이시스가 싱긋 웃으며 독설을 쏟아냈다. 웃으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신기해 약간의 소름마저 돋았다.

“이런,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 말은 황자비님께서 죽든 살든 별로 상관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제게 조언을요?”

대체 저 남자는 아군일까, 적일까.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노려보자 그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예, 크레셰는 당신이 사는 게 제일 중요하지만 저는 그런 것보단…… 제 만족감이 더 중요하거든요.”

내가 살길 바란다는 크레셰도 의외긴 했지만 이시스의 말도 의외이긴 마찬가지였다.

“제가 당신에게 무슨 만족을 드릴 수 있는데요?”

“사람은 시련을 겪을 때 가장 아름답죠.”

이시스가 뜬구름 잡는 말을 꺼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황당한 시선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그는 내내 진지한 모습이었다.

“저는 그런 순간을 보고 싶어요. 고난을 뛰어넘는 인간들을 볼 때, 저는 상당한 충족감을 느끼거든요. 당신이 가시밭길을 걸어주길 기대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저더러 당신의 만족을 충족시키라는 그 말씀이신가요?”

“당신에게 돌아갈 이득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시스가 잔잔히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이미 내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내가 수락할 거란 걸 확신하는 건가.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했다. 이시스의 동기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가시밭길을 걷는 인간을 보며 만족감을 느낀다라…….

어쩐지 루가 했던 푸념이 떠올랐다.

이시스가 어린 루에게 악마의 유물을 가져다준 적이 있다고 했었나.

아무것도 몰랐던 루는 기쁘게 선물을 받아들였고, 이후 악마가 환생하는 바람에 내재해 있던 속기 마검사의 힘이 개방되고 말았다고. 루가 최연소 속기 마검사가 된 탄생 비화였다.

어쩌면 형이 그 점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는 설명을 붙이긴 했으나, 형에 대해 설명하는 루의 표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나쁜놈은 아니라고 포장하던 루는 말의 끝머리에서 이시스를 이렇게 정의했었다.

“……남의 괴로움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

“동생이 저를 종종 그렇게 부르곤 하죠, 호호.”

이시스는 더 없는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기쁘게 웃어 보였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군요. 어찌 됐든 저는 당신이 크레셰가 말한 편한 길보다는, 황자와 황태자 둘 다 살릴 수 있는 어려운 길을 걷길 원해요. 그에 대한 방법도 알려드릴 수 있고요.”

“……당신이 어떻게요? 당신은 크레셰가 아니잖아요.”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었군요. 저도 크레셰랍니다. 극비지만 특별히 황자비님께만 알려드리죠.”

덧붙인 말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자 이시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확인 사살을 했다.

“잠시 후 창문으로 벌이 날아들 겁니다.”

이시스의 손끝을 따라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10초 후, 정확히 창문 안으로 들어온 벌을 보고 나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며칠 전 꿈에서 봤거든요.”

“제가 어떻게 해야 원하는 미래를 볼 수 있죠?”

의자를 바짝 당겨 이시스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얼마간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시장 골목의 점성술사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며.

“이 성물을 받으십시오. 성물을 사용하면 잠에 빠져들고, 회귀 전 과거의 시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회귀 전의 과거요……?”

“예, 그 속에서 힌트를 찾으십시오. 모두가 사는 길은 과거에 있습니다.”

“그냥 이시스님이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저도 정확한 방법은 모릅니다. 신께서 보여주는 미래는 몹시도 불친절하거든요. 꿈결에서 몇 가지 단편적인 순간을 보여주실 뿐이죠. 제가 본 미래에서 당신은 과거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저는 모르지만, 당신이 과거에서 무언가 힌트를 얻어야 두 사람이 살아 있는 미래가 열릴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과거로 가기만 한다면 반드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건가요?”

“아뇨. 솔직히 말하자면 힌트를 찾지 못해 평생을 헤맸던 미래도 있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시간을 보고 정신이 성물과 함께 붕괴된 적도 있었죠. 처음에 말했듯 이 길은 가시밭길이 될 겁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제 동생에게 악마의 유물을 던져주었던 이시스다. 지금 그가 내게 건네는 이 길도 분명 악마를 퇴치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의 어려운 일이 되겠지.

그래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 길은 없다고 단호히 말하던 크레셰보다는 이시스가 제안하는 길이 훨씬 더 나았다.

게다가 이시스는 루의 말대로 나쁜 놈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루에게 한 짓도, 루가 속기 마검사의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였겠지.

“할래요. 가시든 뭐든 제가 다 뭉개버릴 거니까.”

비장한 표정으로 이시스가 건네는 구슬을 받아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쾌한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 * *

이시스가 준비한 성물을 사용하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사용 기회는 단 한 번. 일단 사용하게 되면 힌트를 찾을 때까지는 계속 과거에 머물러야 한단 뜻이었다.

게다가 과거에 머무른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갈 거라고.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걸 대비해 영양공급을 해줄 사람이 필수적이었다. 예를 들어 신성력을 부어줄 사제 같은.

이시스는 그 자리를 단박에 거절했다. 대사제 일이 바빠 나를 굶겨 죽일 것 같다고. 살벌한 말을 남긴 이시스는 맹한 미소로 크레셰에게 부탁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크레셰라. 그다지 친절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애초에 그런 길은 없다고 말했던 그가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까.

결국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머리에 이고 크레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요란한 노크 소리에 직접 문을 열고 나온 그는 여전히 후드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에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안으로 들인 그는 차를 내오는 형식상의 예도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에 마주 앉자마자 폭풍 같은 잔소리를 쏟아냈을 뿐.

“아직도 결정을 바꾸지 않았나요? 두 사람 다 살리겠다는 그 허무맹랑한 결정을요.”

비아냥 가득한 말이 후드 안에서 흘러나왔다.

“이시스님의 말로는 두 사람이 함께할 미래가 있다던데요.”

내 말에 크레셰가 침묵을 지켰다. 이시스가 뒤통수를 친 줄은 몰랐던지 내쉰 숨에서 미약한 화가 스며 있었다.

“그런 미래는 없습니다. 이시스 그자는 단순히 사람의 고통을 즐길 뿐이에요. 성패는 안중에도 없죠.”

“저는 이시스님을 믿어요. 내가 원하는 미래를 들려준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자가 뭐라고 말했는지나 들어봅시다. 무슨 방법을 일러주던가요?”

“과거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성물을 주고 가셨어요. 과거에서 힌트를 얻으라고.”

“그래서 그 성물을 사용하려고요?”

“네, 그래서 부탁을 하려고 왔어요. 제가 성물을 사용하는 동안 신성력으로…….”

“거절합니다. 그 성물은 위험합니다. 그 속에 영영 갇힐 수도, 혹은 함께 파괴될 수도 있어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말입니다.”

“아닐 수도 있죠.”

“하……. 황태자를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뭐죠? 그냥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평생 살아요. 그게 당신 소원이었잖아.”

“……?”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살기를 원하나? 무엇 때문에?

대체 누구기에?

그 순간 크레셰의 후드를 벗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느린 움직임, 검이라고는 안 들어봤을 것 같은 호리호리한 몸매.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자 충동은 한층 더 거세졌다.

결심을 굳히자마자 기습적으로 크레셰에게 손을 뻗었다. 몹시 무례한 행동이란 걸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퉁명스러운 말투, 그 속에 짙게 밴 나를 향한 걱정. 눈 앞의 남자가 내가 아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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