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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내전의 조짐 (106/120)

106. 내전의 조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황자님께서 황제가 되시길 원합니다.”

만찬이 차려진 식당으로 우릴 안내한 루는 제레미를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황태자가 황제에 오를 경우 북부와 제국의 사이는 더 벌어지고 말겠죠. 그래서 저는 북부의 미래를 황자님께 맡기려 합니다. 군사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부디 훗날 저의 공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루는 훗날을 위해 미리 제레미에게 줄을 댄 거라 부연을 붙였다.

제레미를 돕는 이유 어디에도 내 이름이 없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묘약의 부작용으로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거라면 마음이 몹시 무거웠을 테니까.

‘그렇담…… 루는 내가 준 약을 먹었을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냉철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걸 보면 묘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잘된 일이라 생각하며 루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런데 그 순간 제레미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깊어진 눈동자에서 묘한 이채가 감돌았다.

“원 계획대로라면 에반스 영지에 머물 생각이었는데.”

“내전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접전지는 수도와 가까이 있는 에반스가 될 것입니다. 군사를 채 정비하기도 전에 미리 접전지로 가 있는 건 위험하다고 사료되니, 불편하시지 않으시다면 황자님의 원 계획을 수정하는 쪽이 어떠신지요.”

“저도 루 대공의 영지에 머무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원조를 약속한 샤를 후작, 제라드 백작 영지와도 가까우니까요.”

식사하는 내내 제레미, 루, 레틴 세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예전과 같은 앙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저 틈에 끼어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럴 때 황자님의 도움이 되어 드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시골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리야 남작가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힐레인 병사 한 명을 추가하는 정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단 생각에 잠자코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사이 대강의 윤곽이 나오고, 제레미는 대공저에 머무르며 군사를 정비하는 것으로 루와 협의가 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세부적인 논의가 오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제레미와 루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와 닿았다.

방해될까 봐 숨도 아껴서 쉬고 있었는데. 민망한 기분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제레미도 덩달아 미소를 보였다.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는 게 어떤가 싶군.”

“예, 알겠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 때문에 급히 마무리되는 분위기라 손사래를 치며 두 사람을 말렸다. 도움이 되지 못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방해가 되다니.

“할 이야기가 산더미인데 두 분 다 무슨 소리십니까? 황자비님께서는 이만 가보셔도 되지만 황자님과 대공께서는 아직 안 됩니다.”

다행히도 레틴의 개입에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대공저 하녀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걷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비님!”

“루 대공?”

“저기…… 할 말이 있어서요.”

“뭔데?”

“……북부는 여름에도 날이 추워요. 제국의 늦가을 정도의 날씨랍니다.”

“응?”

갑작스러운 루의 날씨 예보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조금 쑥스러운 듯이 이마를 만지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음식은 입에 잘 맞으셨나요? 제국의 향신료를 사용해달라고 부탁했는데…… 투박한 북부의 음식이 황자비님 입에 맞으셨을지 모르겠네요.”

“응, 되게 맛있었어.”

솔직한 감상에 루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붙이는 게 목적이었던 듯 두서없는 물음, 수줍게 보이는 미소.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저기……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내가 준 약은…….”

“아, 마셨어요. 묘약 부작용도 말끔히 나았고요.”

“……그래? 약을 먹고…… 그러니까, 나를 원망한다거나 음…… 싫은 마음은 들지 않고?”

“물론이죠, 묘약에 의한 사랑은 사라졌지만 전 여전히 힐레인이 좋아요. ……물론 친구로서요.”

루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묘약 부작용이 풀린 것도 그렇지만, 그가 여전히 나를 친구로 생각해준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다행이다, 나도 루 대공이 너무 좋거든. 나랑 계속 친구 해줘서 정말 고마워.”

“뭘요, 제가 감사하죠.”

악수를 청하자 루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손을 맞잡았다. 북부의 차가운 공기 탓인지 맞닿은 그의 손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배정받은 방 앞에 도착했다. 인제 그만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저…… 황자님과 방을 따로 써도 괜찮겠죠?”

“응?”

“대공저엔 방이 너무 많거든요.”

“응, 괜찮아.”

덧붙인 이유가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제야 루는 조마조마한 표정을 내려놓았다. 환한 미소를 지은 그는 문이 닫힐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잠시 후 텅 빈 복도에 덩그러니 남은 루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은 안 먹었어요……. 난 지금 이대로가 좋거든.”

루가 제멋대로 날뛰는 자신의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그는 지금의 상태가 좋았다.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가벼운 사랑만 하던 그 때보다는, 묵직한 마음을 간직한 지금이.

* * *

하루아침에 귀족들이 두 쪽으로 나뉘었다. 황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날 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폐하의 승인도 없이 황자궁을 습격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장 황자님을 궁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자님은 그동안 모두를 속이고 백치 연기를 해왔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를 속였으니 이는 반역죄에 해당, 황태자님의 결정이 옳았다 사료됩니다만.”

“백치 연기라니요! 어릴 적 먹었던 독에 의해 그리되셨고 최근 상태 호전을 보인 겁니다. 이참에 당시 독을 먹인 자가 누구인지 철저히 밝혀내야 합니다.”

결코 적지 않은 수가 황자에게 돌아선 건 제레미가 아인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속기 마법사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지만, 사실 황태자의 독재에 넌더리가 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언제 팽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실수 앞에서 가차 없는 무정함. 귀족들이 아인에게서 돌아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귀족들을 말 잘 듣는 개로 조련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들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귀족들은 아등바등해 아인의 눈에 들었다가도 돌아서면 체스 위의 말이 되었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인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해진 자신을 발견할 때는 고고한 귀족의 자존심에 흠집이 나기도 했다.

황태자에게 무참히 버려지느니, 인간적인 모습의 새 주군을 모신다. 귀족들이 열과 성을 다해 제레미 변호에 나선 가장 큰 이유였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군.’

황제는 분란의 씨앗이 된 제레미를 제거하고 싶었지만 그 아이가 쌓아놓고 간 방어벽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황후의 가문마저 은근히 제레미의 편을 들 줄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 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작정 강경하게 나가는 것도 옳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린 황제가 귀족들의 웅성거림을 잠재웠다.

“그대들의 의견에 따라 당장 황자를 반역죄로 처벌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백치 연기에 관해서는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오. 고로 이 안건은 황자가 환궁을 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는 것으로 하겠소.”

황자가 환궁한다면 나머지는 아인이 알아서 하겠지. 아마도 불씨를 꺼트리는 쪽으로 결론을 짓겠지만, 제레미는 버리는 패니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폐하! 어떠한 해결점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황자님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건 위험합니다.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예전처럼 독살 시도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샤를 후작? 황태자님이 황자님께 독을 먹일 거라 이 말씀이십니까?”

서로 주장을 펼치고 반박하는 긴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황제조차 어쩌지 못한 귀족들의 소란을 불식시킨 건 아인이었다.

“감히…….”

차가운 음성이 뜨거워진 장내를 덮었다.

“폐하의 명에 반기를 드는 자, 누구인가.”

선득한 금안이 사람들의 시선 위를 군림했다. 광기마저 스민 싸늘한 눈동자는 그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선득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아인이 주는 공포에 길들여졌던 귀족들은 그 순간만큼 어떠한 반기도 들 수 없었다. 익숙한 공포가 몸을 옥죄여온 탓이었다.

귀족들의 목줄을 틀어쥔 아인이 유유히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폐하의 명에 따라 황자 제레미를 조속히 환궁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그런 아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했다.

제레미는 버리는 패가 될 것이라고.

* * *

그 시각, 제레미는 뜻하지 않게 대공저의 창문을 넘었다. 각방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일이었다. 힐레인도 분명 기가 막혀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친 몸을 움직여 방 안으로 입성했을 때쯤, 제레미는 멍한 기분을 느꼈다. 침대 위, 작게 솟아오른 귀여운 모양새.

설마 자고 있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지난 반 년간 자신은 힐레인이 옆에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는데. 세상 모르고 잠이 든 힐레인을 보면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쿨.”

제레미는 기대를 저버린 힐레인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각방이란 말에 분노하고 담을 넘는 행각을 벌일 때, 자신의 귀여운 신부는 꿈나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새근새근 곤한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내 입꼬리에 미소가 스몄다. 서운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잘 자, 힐레인.”

힐레인의 곁에 다가간 그가 조심스레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더는 욕심 부리지 않고 인제 그만 떠나려고 했는데. 그 순간 힐레인이 눈을 반짝 떴다.

“우음…… 황자님.”

잠투정이 어린 목소리에 제레미의 몸이 굳었다.

여기서 더 반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제레미는 멍하니 힐레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눈곱이 달린 풍성한 속눈썹, 부스스하게 흩어진 머리카락.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귀엽고 어여뻤다.

제레미는 시선을 피한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자꾸만 달아오르는 뺨 때문에 손안이 더웠다.

그런데 그때 힐레인이 제레미의 손목을 잡아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힐레인의 옆자리에 눕게 된 제레미는 아주 가까이에서 힐레인을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매일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째서 이토록 심장이 뛰는지 모르겠다. 모든 게 당혹스럽기만 한데 힐레인은 야속하게도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헤……. 이렇게 있으니 좋네요. 잠깐만 이렇게 있다가 돌아가도록 하세요.”

“……가라고?”

목소리에 서운한 감정이 진득하게 뱄다.

난생처음 벽을 타고, 창문으로 숨어드는 짓까지 벌인 자신이었다. 그런 제게 잠깐만 있다가 가라니…….

“여기 있는 동안엔 각방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자식 때문에?”

“아뇨. 아참, 루 대공은 이제 제게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대요. 묘약의 부작용을 풀었거든요.”

제레미는 힐레인을 볼 때마다 그윽해지던 루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게 친구를 보는 눈인가? 힐레인에게 뭐라고 둘러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듯 각 방을 주고 문 앞에 융통성 없는 기사들을 배치한 것만으로도 무슨 마음인지 쉽사리 예상됐다.

“황자님……?”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을 힐레인이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미소 짓자 그녀는 금세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 그리고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응, 얼마든지.”

“제 몸에 있던 보석…… 황자님이 없애주신 거죠?”

힐레인이 명치 부근에 손을 올렸다. 딱딱한 보석의 감촉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명치를 만지자 홀가분하면서도 조금은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네가…… 황태자에게서 자유로워지길 바랐으니까.”

황태자란 말에 힐레인은 조금 먹먹한 얼굴이 되었다. 혼란이 깃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제레미는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붙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힐레인. 보석이 없어진 자리…… 내가 확인해봐도 될까?”

“……?”

예상대로 힐레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아인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감정은 금세 흐려져 있었다.

“그, 그건…….”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을 빨갛게 물들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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