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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벗어나다 (105/120)

105. 벗어나다

제레미의 품에 안긴 채 돌아온 곳은 다시 황자궁. 오는 길에 시녀들과 기사들을 마주치긴 했으나 그 누구도 감히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 앞까지 찾아와 걱정 어린 안부를 묻던 센마저도 제레미의 모습에 어깨를 떨었다.

백치라 불리던 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탈출한 새를 쥔 그에게선 오직 짙은 소유욕만이 감돌았다.

“어떻게 나간 거야.”

그가 나를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몸을 바로 하자 제레미는 그 작은 동작에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붙들린 손목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그가 곧장 손에 힘을 풀었다. 빨개진 손목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죄책감이 들어찼다.

요 며칠 내내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나를 가두고, 비뚤어진 집착을 보이던 그는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후회 끝엔 늘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살폈다. 내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집착 어린 모습에 실망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런 그가 가여웠다. 제국의 황자이자 속기마법사이기까지 한 사람이, 왜 나 하나에 절절매는 것인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제레미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온기를 처음 느껴본 사람처럼,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신을 지키기 위한 제 행동이 자꾸만 상처를 드리게 돼서 죄송해요.”

“…….”

“황자님을 두고 먼저 죽지 않을 거예요.”

“……거짓말.”

“믿어주세요, 오래오래 당신 곁에 남을 테니.”

제레미의 품에서 얼굴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제레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너무 사랑해서 이젠 저도 못 떠나요.”

배시시 웃어 보이자 제레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늘게 찌푸려진 눈매를 타고 맑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우리 그만 싸우고 서로 사랑하면서 지내요. 사랑만 해도 아까운 시간인걸.”

그의 목덜미를 감아 내게로 끌어왔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사랑해?”

대답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곧장 그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달콤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그리 긴 냉전도 아니었는데, 아주 오랜만의 키스처럼 허기가 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제레미는 전혀 움직여주지 않고 있었다. 약간의 불만을 품은 채 입술을 떼자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말해줘. 나를…… 사랑해?”

목소리의 끝이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대답을 듣기 무서운 듯 시선을 피한 채였다.

“응.”

제레미의 시선을 다시 끌어온 나는 말간 눈물 위로 고개를 숙였다. 지난날 그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파르르, 눈가의 떨림이 입술을 간질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내가 어떻게 떠나.”

겨우 맞닿은 고백이 그와 나 사이에 그어져 있던 선을 흐리게 했다.

마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항상 마음을 짓누르던 황태자의 임무도, 가짜 연기도, 속임수도 없는.

온전히 그와 나 둘만이 있는 세계.

“사랑…….”

다시금 터져 나온 고백을 제레미가 머금었다.

이내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입술에 닿은 감촉이 거칠었다. 허기가 졌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덧 목덜미로 내려온 입술이 쇄골을 훑었다. 발끝까지 오그라드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달뜬 숨을 뱉었다.

미지의 감각에 허덕이는 나를 제레미는 열감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잔뜩 흐트러진 얼굴을, 힘이 들어간 어깨를, 마지막으로 시트를 꽉 쥔 내 손을 훑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불거진 손을 그가 부드럽게 겹쳐 잡았다. 그러곤 자신의 셔츠 깃을 쥐게 했다.

첫 단추가 힘없이 풀어지고 대리석처럼 하얀 목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제 그만 나를 가져, 힐레인.”

눈빛이 거칠어져 있었으나 허락을 구하는 그 순간만큼은 정중했다.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뭔가에 홀린 듯 결정을 내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작은 소란이 벌어진 거라 생각했던 소음은 점점 더 커져 어느덧 황자궁의 창문을 넘었다.

“물러서십시오!”

레틴의 강경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간을 울렸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황자님.”

불안한 눈으로 제레미를 바라보자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미 모든 걸 예상한 듯 그는 동요가 없었다.

“괜찮아, 예상했던 일이야. 생각보다 시기가 빠르긴 하지만.”

제레미가 몸을 일으켰다. 방에 있어 달라는 그의 부탁을 한사코 거절하고 그를 따라 복도를 나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소란의 근원지인 정원은 기사들로 가득했다. 반으로 나뉜 기사들 사이로 레틴, 그리고 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은 기사들을 동원한 채 황자궁의 기사들과 대치 중에 있었다. 일렁이는 횃불이 딱딱해진 그의 얼굴 위로 위태로운 빛을 그려냈다. 그 모습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오늘 밤, 당신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질 겁니다.]

불현듯 크레셰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그 일이 이거였나.

기척을 느낀 아인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진득한 살기가 밴 시선이 제레미를, 그리고 그 뒤에 선 나를 향했다.

“이리 나와 모두를 속인 벌을 달게 받으렴.”

말을 끝맺을 때까지 그의 시선은 내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누구를 책망하고 싶은 걸까. 백치 연기를 한 제레미를? 아인을 배신한 나를?

미약하게 몸을 떨자 곁에 있던 제레미가 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아인의 분노를 온전히 홀로 감당하려는 것처럼.

“폐하의 인장도 없이…… 황자인 저를 체포하시려는 겁니까, 형님?”

“듣기 거북하구나. 그 형님이라는 호칭.”

아인의 눈동자에 미약한 광기가 스몄다. 횃불에 반사된 붉은빛이 더해지자 잔혹한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반역죄는 폐하의 인장이 없어도 즉결처분할 수 있지.”

“반역죄라……. 그냥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10년 전 제게 독초를 보내온 이후부터 내내…… 죽일 기회만 노렸다고.”

제레미가 잔잔히 눈을 내리깔았다. 서늘한 그의 시선에서 채 숨기지 못한 원망의 감정이 스며나왔다.

“트릭샤처럼 쉽게 죽어드리진 않을 겁니다.”

“너는 네 죽음을 논할 수 없어. 트릭샤가 그랬듯 너 또한 불시에, 원치 않는 죽음을 맞게 될 거야.”

아인은 비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제레미의 원망을 부숴버렸다.

“네 목숨을 쥐고 있는 건 나거든.”

아인의 시선이 제레미를 비켜 내게로 와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명치에 아플 정도의 고통이 스몄다.

[제레미를 내게 넘겨.]

손으로 명치 부근을 감싼 채 고개를 저었다. 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묘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넘기기 싫다면 그냥 죽여버려도 좋고.]

명치에서부터 퍼진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찔렀지만 깨물었다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의 감각이 스미기엔 머릿속에 들어찬 세뇌가 너무도 컸다.

살의에 반응한 맹세의 보석이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안…… 돼…….”

입 밖으로 나온 말과는 달리 손은 곁에 있던 기사의 검을 뽑고 있었다. 서늘한 손잡이의 감촉에 몸서리가 쳐졌지만 검을 잡은 두 손엔 되레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기울어진 검날이 제레미를 향했다.

“도망……쳐.”

겨우겨우 꺼낸 목소리가 뚝뚝 끊어져서 입 밖으로 나왔다. 반면 제레미는 차분한 얼굴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치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그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왔다. 잔뜩 힘이 들어간 검이 하늘을 향해 들려 올라가고, 금방이라도 제레미를 가를 듯이 내리쳐졌다.

“……!”

다행히도 검은 제레미에게 닿기 전 허공에서 우뚝 멈춰주었다. 너무 놀라 바들바들 떨고만 있던 그때 제레미가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명치를 짓누르던 감촉이 사라졌다. 힘을 잃은 보석이 툭- 하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멍하니 빛바랜 보석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강한 힘으로 나를 옭아매던 족쇄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보석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후 맹세의 보석이 탈락된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인의 곁에 서 있던 기사들의 대열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아인, 이제 더는 힐레인을 멋대로 휘두르지 못할 거야.”

“…….”

아인은 말없이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어떤 동요도 없이 차분해 보였던 눈빛에 일순간 선득한 분노가 차올랐다.

“은혜는 아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

“역시 트릭샤의 자식이구나. 한때나마 너를 놓아주려 했던 나를 저주하고 싶을 정도야.”

아인이 마법의 돌을 손에 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제레미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려는 나를 끌어당겨 보호막을 둘렀다. 하지만 주변을 초토화시킬 정도의 거대한 힘에, 보호막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캉!

뭔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이 빠르게, 아인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의 주변으로 힘을 잃은 보석들이 흩어지고, 거대한 마법구가 형성되었다.

코앞까지 닿은 마법구에 제레미는 새 보호막을 펼치며 반격을 시도했다. 강력한 두 힘이 허공에 부딪히고, 천둥소리와 같은 불길한 울음을 토해냈다.

마법에 의한 두 사람의 대치는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거대했다. 부지불식간에 단단했던 성벽이 부서지고 자욱 연기가 두 사람을 덮쳤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아인이었다. 지옥을 연상시키는 검은 연기가 그의 뒤로 펼쳐졌지만, 그는 뺨에 미약한 생채기가 났다는 것 빼고는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제레미 또한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였지만 많이 지쳐 보였다. 아인과 달리 나를 포함해 황자궁의 사람들까지 보호하고 있었으니 확실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런 제레미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내 앞을 막아선 사람은 크레셰였다. 검은 후드가 바람에 팔락이고,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여러 가닥으로 흩어지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와 동시에 폭발적으로 몸집을 부풀린 흰 빛이 그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눈앞을 덮은 하얀 빛이 몸을 감싸고 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종이처럼 둘둘 말리고 구겨지던 장면은 어느 순간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요한 정원이었다.

황궁은 아닌 듯 보였다. 웅장한 저택은 황궁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분명 다른 공간이었다.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둘러보는데 제레미에게로 다가가는 크레셰가 보였다.

“속기 마법사가 싸움이라뇨, 제정신입니까?”

“순간 이동을 한 게 당신이야?”

“그대로 두었으면 수도가 통째로 날아갔겠죠. 감사한 줄 아십시오. 지난 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또……!”

지난 생을 이야기하는 크레셰에, 제레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 누구야?”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 크레셰를 향해 날을 세웠다. 묵직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제레미의 기사들도 덩달아 자세를 낮췄다.

“그분은 크레셰님입니다. 신분은 제가 보증하죠.”

긴장을 잠재운 건 저택 방향에서 들려온 차분한 미성이었다. 밤이 찾아든 어둠 속에서도 환한 달처럼 빛을 내는 백금발, 순해 보이나 뒤로는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눈웃음. 이시스 대사제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일단은 대공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루의 시선이 제레미를, 레틴을, 그리고 그의 뒤에 선 기사들에게로 닿았다. 천천히 옮겨온 시선이 이윽고 나를 향했을 땐 그 특유의 명랑한 눈웃음을 보였다.

“어서 와요. 대공 친구를 둔 덕택을 단단히 누리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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