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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가벼이 여긴 대가 (102/120)

102. 가벼이 여긴 대가

제레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랑해요. 연기처럼 흩어진 목소리를 쫓던 그의 눈동자 위로 점차 동요가 찾아들었다.

다시.

차마 소리로 내지 못한 말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제레미, 당신을 사랑해.”

멈추어야 하는데, 의지를 배반한 고백이 자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런 자신을 막을 수 없어 제레미의 귀를 두 손으로 막는데, 그가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제레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앞에서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가여운 모습이었다.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 이제야 고백을 했을까 하는 후회감이 밀려드는 반면.

죄책감이 일었다.

내가 미쳤구나. 떠날 순간을 며칠 앞두고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제레미는 그런 내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죄책감이 깃든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던 그가 내 손을 걷어냈다.

“힐레인, 고백을 후회하지 마.”

잔잔한 목소리였다. 고백해놓고 곧바로 후회하는 내 모습에 원망할 법도 한데, 그는 어떠한 질책도 없었다.

그저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로 만족한 것인지,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그 무엇도 후회하지 말고 그냥…….”

그의 손가락이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고, 그 위로 낙인을 찍듯 붉은 입술이 내려앉았다.

“내 곁에만 있어 줘.”

제레미의 간절한 부탁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려고 했다.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 * *

일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빠져나온 레틴은 초록빛의 여름 정원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아인을 실추시키기 위한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지만 막상 밤낮을 일에만 매달리니 정신이 초췌해졌다.

심지어 며칠 전엔 결혼을 전제로 만났던 여자에게 퇴짜맞기에 이르렀다. 일에 치여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겨우 짬을 내 만난 연인을 ‘황자님’이라고 불러버린 탓이었다.

무슨 불만이 쌓여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그 한 마디에 폭발해버렸다.

황자님, 황자님, 황자님!!! 어떻게 입만 벌리면 황자님 이야기에, 이젠 저를 더러 황자님이라 부르기까지 하냐며 그녀는 엉엉 울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뺨을 내어준 상태였다. 그때 맞은 뺨이 아직도 아리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정말 모르겠어.’

레틴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할머니, 이모, 누나. 에반스 가문 여자들의 성화 때문에 레틴은 또 다른 짝을 찾아 나서야 하겠지만 역시나 자신은 없었다.

여자들의 마음은 고대어만큼이나 해석 불가였고, 이별마다 쏟아지는 뺨 세례는 이젠 적군의 검보다 무서웠다.

‘어디 우리 황자님 같은 성격을 가진 여자 없을까.’

레틴은 멍하니 제레미의 맑은 미소를 떠올렸다. 황자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오늘따라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날개가 있었다면 훨훨 날아갔을지도.

황자비는 참 복도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기구하게도 시야 사이로 잔디밭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힐레인이 들어왔다. 복이 많다고 칭찬했던 것이 무색해지게 그녀의 얼굴엔 시름이 가득했다.

괜히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아 레틴은 그대로 힐레인을 지나쳤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지 못한 채 스산한 목소리에 발이 붙들리고 말았다.

“레틴…… 겨어엉.”

질척한 늪 같은 부름에 뒤를 돌았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힐레인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시했다간 꿈자리가 뒤숭숭해질 것만 같은 얼굴로.

* * *

레틴은 힐레인과의 독대에 불편함을 느끼며 티룸에 들어왔다.

반면 힐레인은 자신이 불편해하면 할수록 더 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같은 편이 되어도 저 여자는 자신의 영원한 앙숙이라 생각하던 그때, 그녀가 웃으며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아기자기한 과자와 찻잔이 세팅된 테이블을 본 레틴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얼굴로 힐레인을 쳐다보았다.

“저와 티타임을요?”

“일단 앉으실래요?”

마지못해 자리에 앉은 레틴이 예의상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레틴 경도 어서 장가를 가야 할 텐데요.”

“풉!”

귀신같이 아픈 곳을 찔러오는 힐레인을 보며 레틴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안 맞아도 어쩜 이리도 안 맞을 수 있는지.

“갑자기 불러선 차를 마시라 하시질 않나…… 이젠 장가요? 대체 무슨 속셈입니까?”

“속셈은 없어요. 그냥 레틴 경도 언젠가는 결혼을 할 거잖아요? 좋은 부인을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서 우리 황자님의 아이와 친구가 되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아무리 황자님의 자식이라 해도 당신을 닮았다면 친구는 좀 고려해봐야겠습니다.”

레틴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대꾸했다. 저 여자를 빼닮은 아이라면 자신의 자식과는 앙숙이 될 게 뻔할 테니.

뭐라 반박할 줄 알았는데 힐레인은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다.

“삐졌습니까?”

힐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레틴은 오늘따라 황자비의 반응이 영 재미가 없다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그나저나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레틴 경에게 연애 상담을 부탁하고 싶어서요.”

또 한 번 차를 뿜을 뻔한 레틴은 이제 더는 차를 마시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황자비 때문에 이러다가는 온 옷을 다 버릴 것만 같았다.

“연애 상담이라니요? 두 분 금실이야 걱정할 것도 없잖습니까?”

“레틴이 봐도…… 황자님이 저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나요?”

“……자랑하십니까?”

레틴이 소매를 걷어 팔을 북북 긁었다. 질투가 난다거나 샘이 나는 건 절대 아닌데…… 그냥 갑자기 온몸이 가려웠다.

“황자님 곁을 오랫동안 보필해온 당신이라면 잘 알 것 같아서요. 그렇게 깊은 감정은 아니겠죠? 너무 사랑해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괴롭다든지.”

그녀의 본심을 알 리 없는 레틴은 힐레인이 솔로의 염장을 지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황자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서 묻는 거냐고 쏘아붙이려던 레틴은 마음을 바꿨다. 엉뚱한 데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미 마른 장작 같은 마음에 불이 지펴진 후였다.

“그 정도는 아닐걸요?”

“그럴……까요?”

“그럼요, 황자님을 바로 곁에서 보필해온 제가 제일 잘 알죠. 한때의 감정일 거예요. 매일 보고 매일 한 침대에서 잠들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길 텐데요, 뭘.”

너무 심했나 싶어 레틴이 뒤늦게 힐레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뜻밖에도 힐레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또는 고민을 해결한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 * *

그 후 약간의 죄책감을 덜어낸 나는, 일주일 동안 참 많은 일을 해두었다. 사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금세 우울한 생각이 찾아들어 일부러 더 일을 찾아다닌 탓도 있었다.

그래도 그 덕에 제법 영양가 있는 일주일을 보냈다.

베르킨에겐 황자님이 좋아하시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알려주었고 하루는 구석구석 방을 청소해 두기도 했다.

오늘은 막간을 이용해 제레미가 자주 읽는 책을 손에 닿기 쉬운 위치로 옮겨 놓았다. 제레미의 편의에 맞춰진 방 안을 둘러보자 괜스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제레미와 약속한 점심시간이 되었다. 정확한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보며 나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자비로서의 소임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었다.

* * *

식사를 마친 후 제레미는 힐레인과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그녀와 함께하는 티타임은 가장 완벽한 오후를 맞이할 신호탄과도 같았다.

일종의 충전이기도 했다. 전장과도 같은 계획에 동력이 되어 줄.

제레미는 힐레인의 얼굴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수줍게 피어오른 미소. 오늘 오후도 무리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도를 좀 더 낸다면 코어 파괴도 초읽기가 되겠지. 다만 속도를 내려면 조금 더 큰 동력이 필요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제레미가 힐레인의 턱을 조심스레 그러쥐었다. 탐스러운 입술을 머금으려는 그때, 불현듯 힐레인의 입가가 떨렸다.

그것은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힐레인의 모든 순간을 눈에 담은 제레미에게는 대번에 알 수 있는 변화였다.

“힐레인……?”

제레미가 고개를 들어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평상시와 같은 미소를 보였지만, 채 지워내지 못한 불안의 흔적이 얼굴 위에 남아 있었다.

“눈가가 붉은데.”

제레미가 힐레인의 눈가를 쓸었다. 피부에 닿은 손끝이 뜨거웠다. 열이 있는 건가 싶어 이마를 짚어 보았지만 열감이 있는 부분은 오직 눈가뿐이었다.

“울었어?”

“아뇨, 하품을 참으니까 눈물이…….”

두 손으로 눈 주변을 꾹꾹 누른 그녀가 다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피곤해 보였다. 어깨는 힘없이 처져 있고 피부는 까칠했다.

“황자궁 일을 돌보느라 힘들지. 무리하지 마, 힐레인.”

힐레인이 요즘 들어 부쩍 황자궁 관리에 몰두하고 있다 들었다. 궁인 배치와 관리, 청소나 그 외 자잘한 일들까지, 분주하게 관리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는 틈이 별로 없다지.

“별로 해놓은 것도 없는 걸요. 피곤하다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예요.”

“부끄럽다니. 내 궁 안에 힐레인의 손길이 곳곳에 닿았다 생각하면 너무도 기쁜걸.”

제레미의 말에 힐레인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계속해서 다정한 제레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는 결심이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마 위로 간지러운 감각이 닿았다 떨어졌다.

“쉬면서 해. 네가 황자궁 관리로 무리하면, 나는 가여운 시종장을 미워해야 할 테니.”

“…….”

다정한 키스, 미소를 짓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가벼운 농담.

힐레인은 두고 가야 할 것들을 눈앞에 두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눌렀다. 미련을 끊어내려 애썼다.

* * *

제레미는 석연찮은 기분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향기로운 차, 달콤한 다과, 웃음 섞인 대화.

평화로웠던 티타임 그 어디에도 불안의 요소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얼마간 앞을 향해 나아가던 제레미의 걸음이 더디어졌다. 이윽고 걸음을 멈춰선 그가 뒤를 돌아 힐레인과 함께 있었던 티룸을 바라보았다.

티룸에 고정된 시야 사이로, 애써 피곤함을 감추던 힐레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힐레인은 황자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했지만, 제레미는 그녀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황자비라 해도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황자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옆에만 있어 주어도 좋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녀는 황자비 소임에 유독 신경을 기울였다. 궁인 관리부터 그 외 크고 작은 황자궁의 일들까지. 왜 갑자기 그렇게나 열심인 걸까.

꼭 떠나기 전 일을 끝내두려는 사람 같이.

무심결에 흘러나온 생각에 제레미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다급히 내디딘 발걸음 소리가 적막한 복도 안을 세차게 흔들었다.

* * *

제레미가 떠난 직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열었다. 약초를 삼키라는 시간까지는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지만 마음을 먹은 김에 실행키로 했다.

약초를 한 움큼 손에 쥐고 입에 머금었다. 텁텁한 잎사귀의 감촉이 느껴지고, 입안 가득 약초 향이 스몄다.

이제 약초를 씹어 삼키기만 하면 끝이었다. 제레미는 안전해질 것이고, 나는 더 이상 회귀를 거듭하는 일 없이 본래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평화의 시작.

아무도 없는 방 안을 찬찬히 훑으며 작별을 고했다.

‘안녕,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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