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초라한 손실
“……예? 황자님께 대공 직을 하사한다니 그게 무슨…….”
성인이 된 황족은 황위 계승권자를 제외하고는 대공 직을 받아 출궁하는 것이 전례였다. 제레미의 경우 백치라는 특수한 경우에 놓여 있기도 하고, 아인이 감시하에 두고 싶어 했기에 차일피일 미뤄진 일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와 제레미를 출궁을 시키겠다고? 왜? 그것은 더 이상 제레미를 감시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황자님에 대한 의심이 풀린 것입니까?”
“그래……. 이제 더는 그 아이가 백치를 연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쉽게 흘러나온 대답에 힐레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어째서요……?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요.”
아인이 힐레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백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원인은 다름 아닌 그녀에게 있었다.
검은 머리칼, 작고 하얀 얼굴, 온실의 그 어느 꽃보다도 붉은 눈동자. 제레미가 사랑해 마지않는 모습을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제레미가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적막감이 내려앉은 공기 위로 쨍-하는 찻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없이 내려놓은 찻잔이 받침과 부딪히며 하얀 테이블보 위로 붉은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네?”
힐레인의 얼굴 위로 혼란이 번져 들었다. 아인과의 대화에서 그 무엇도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제레미에 대한 의심을 거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지?
“황자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씀이온지…….”
“몇 달 전 네가 레소드에 의해 조사를 받던 그때.”
“…….”
“제레미가 막무가내로 널 데리고 나갔다지. 창에 손이 베이는지도 모르고.”
아인의 금안이 동요하는 힐레인의 얼굴을 담았다. 힐레인의 감정을 엿보려는 듯 예리했다.
“그 외에도 그 아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다수의 정황이 있었다. 설마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힐?”
“…….”
힐레인은 그렇다고 답해야 할지 아니라고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사이 조금은 서늘한 듯 느껴지는 아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아이가 백치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널 사랑할 수 있을까.”
붉은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진득한 비웃음을 흘린 그가 고개를 기울여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낸 첩자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사랑이 가능하기나 하겠느냐?”
힐레인은 그제야 아인이 제레미를 백치라 생각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제레미가 제정신으로는 사랑할 리 없는 자신을 사랑해서. 그래서 아인은 의심의 끈을 놓은 거였다.
하지만 조금은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제레미를 의심해왔으면서, 이렇듯 쉽게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걸까……?
어쩐지 아인이 말한 이유 외에도 다른 게 섞여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게 다입니까?”
“……뭐가 더 있어야 하느냐?”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아서요. 황태자님은 뭐든 섣불리 판단하는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다른 이유라.”
찻잔을 한 모금 삼킨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정곡을 찔렸다는 듯, 자조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예리하구나. 시답잖은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지.”
“그게 뭔데요……?”
“너.”
아인의 기다란 손끝이 가리키는 게 자신이란 걸 본 힐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그래.”
아인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턱을 쓸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숙제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얼굴 위로 미약한 짜증이 떠올랐다.
“네가 그 아이 곁에 맴도는 게 싫구나.”
“……예?”
힐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들은 건가 의심 가득한 얼굴이 되더니, 끝내는 과부하에 걸린 기계처럼 바보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인은 힐레인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탓이었다.
더, 더 고민해, 힐레인. 나조차도 답을 모르겠으니.
힐레인은 결국 차가 다 식어갈 때까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길 잃은 표정이 된 그녀가 다른 화제를 꺼냈을 땐, 아인의 심중에 어느 정도 만족감이 차오른 이후였다.
“어쨌든…… 황자님을 더 이상 감시 아래 두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아인은 길고 길었던 제레미와의 인연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멀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버리는 것으로.
그렇게 해도 여전히 거슬리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면 10년 전엔 주지 못했던 독초를 다시 선사하는 것도 좋겠지.
반면 아인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힐레인은 정말로 아인이 제레미에 대해 관심을 끊은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이니, 뭐니. 불쑥 튀어나온 아인의 말 때문에 잠시 길을 잃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인이 제레미에게 관심을 끄겠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건 분명 기뻐해야 하는 일이었다. 거듭된 회귀 끝에 드디어 제레미가 아인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한적한 영지를 하사받게 되면 제레미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목숨을 위협받지 않아도 되겠지.
그야말로 완벽한 평화.
뒤늦게 그 속에 자신의 자리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아인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레미가 대공 직을 하사받기 전, 황자비 임무를 내려놓는 게 좋겠구나.”
“……예.”
당연한 결과였다. 제레미를 감시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황자비 자리는 자연스레 내려놓아야 할 테지.
분명 기뻐할 일인데도 이상하게 목이 탔다. 아인이 내미는 주머니를 받을 때는 손을 떨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저번에 말했듯, 가사상태에 이르게 하는 약이다. 일주일 뒤 이 시간쯤이 좋겠군. 약을 삼키거라. 긴 잠에 빠져들 뿐 고통은 없을 거야. 눈을 떴을 땐 다시 네 자리로 돌아와 있을 것이다.”
힐레인이 조심스레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열어보자 검은 이파리로 이루어진 약초가 보였다.
“가사상태에 이르면 사람들은 저를 죽었다고 생각하나요?”
“고위치료사라면 눈치를 챌 수도 있으나 미리 말을 맞춰둘 것이니 네가 신경 쓸 일은 없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겨우겨우 말을 내뱉고서 바닥을 보이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입안을 적신 몇 방울의 차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잘된 일이야.”
황자궁으로 향하며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이로써 아인의 감시는 끝이 났다. 황자님은 더 이상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아도 되고, 새로이 마련한 터전에선 훨씬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두 번의 회귀를 거듭한 끝에 겨우 얻어낸 결실이었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건 제레미의 마음이었다.
[사랑해.]
속삭임처럼 간지러웠던 고백이 떠올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고백을 제레미에게서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진지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늘 현실감이 없었다.
제국의 황자이며, 속기 마법사이기까지 한 그가 나를? 왜?
그렇게 깊은 사랑은 아닐 것이라 속단했다. 반 년간 매일 얼굴을 보고 살았으니 정이 든 것뿐이겠지.
처음엔 내 공백을 슬퍼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잠깐의 슬픔과 인생을 맞바꿀 정도로 내가 가치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새로이 하사받게 될 영지, 제레미를 도와줄 레틴과 충성스러운 부하, 세월이 가면 자연스럽게 채워질 대공비 자리.
나의 빈자리는 제레미가 가질 것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손실이었다. 저울에 올리기도 민망할 정도니.
그러니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제레미는 괜찮을 거야.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의지를 배반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죽인 흐느낌이 입술 새로 흘러나오며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 * *
제레미가 방으로 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지내는 게 좋을지 생각했다.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황자비로서의 소임을 완벽히 해놓고 싶은데.
뭐가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을 나가자 이제 막 방 안으로 들어온 제레미가 보였다.
“신부야.”
그가 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눈에 가득 담던 나는 조급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황자님.”
제레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인사였지만 일주일이 다 가기 전에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힐레인……?”
말없이 껴안고만 있자 그가 초조한 기색이 묻어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고개만 들어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조금 불안해 보였던 그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스미는 게 보였다.
“다녀오셨어요?”
그에게서 몸을 뗀 나는 겉옷을 벗는 걸 도와주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로 신혼부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 있었어……?”
눈치 빠른 그가 슬며시 내 볼을 손끝으로 쓸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이며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냥…… 이렇게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평범한 부부처럼.”
제레미의 집요한 시선이 붉어진 내 얼굴 위로 닿았다. 왜 그러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갤 기울이자, 보랏빛으로 탁해진 눈동자가 일렁이는 빛을 머금었다.
“꺅!”
그 순간 제레미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한 손은 무릎 아래, 한 손은 등을 받친 그가 성큼성큼 소파로 걸어갔다.
거침없던 걸음과 달리 그는 나를 소파 위로 살포시 내려놓았다. 양손으로 나를 가둔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눈을 마주쳤다. 입술만큼이나 촉촉한 눈길이 시선을 옭아맸다.
“힐레인, 내가 어떻게 해줄까.”
“……?”
“나 지금…… 네게 뭐든 해주고 싶어졌어.”
제레미가 응? 하고 물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 이 마음으로부터 어서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는 듯이.
나는 애절한 빛을 띤 그의 얼굴을 먹먹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의 감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뭘 어쩌려고? 제레미가 가지게 될 온전한 평화와 나를, 저울에 올릴 생각이야?
바보 같은 생각을 지워내며 입을 열었다. 남은 일주일,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지금은 그것만 생각할 거야.
“저는……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그걸 제레미에게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건넨 물음이었다.
“뭐?”
그런 내 말이 뜻밖이라 생각했는지 제레미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황자님께 받은 게 너무 많은데, 해드린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지금이라도 뭔가 해드리고 싶은데…….”
“……뭐든 해줄 수 있어?”
“네, 뭐든.”
제레미의 눈빛이 동요로 미세하게 떨렸다. 은은한 잔광을 남긴 눈동자가 녹진한 물기를 머금었다.
“힐레인.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네가 날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
화들짝 놀라며 제레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은 건지는 몰라도, 제레미는 더는 피할 수 없게 내 시선을 단단히 옭아맸다. 겨우 붙든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빈틈을 파고드는 제레미의 물음, 그와 함께할 시간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이 겨우 붙들어 놓았던 욕망을 건드렸다.
그래서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이 말이 훗날 그에게 어떤 상처를 남길지 생각도 못 한 채.
“사랑해요.”
손으로 제레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제레미, 당신을 사랑해.”
터져 나온 고백을 감추려 뒤늦게 그의 귀를 막아보았지만, 찰랑임 끝에 쏟아져버린 사랑은 이미 그를 흠뻑 적신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