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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평행선 위의 두 사람 (100/120)

100. 평행선 위의 두 사람

레틴은 불안한 표정으로 제레미를 살폈다.

얼마 전, 백치 가면을 벗겠다 선언한 뒤로 그는 어딘지 모르게 변한 듯 보였다. 아인을 치는 걸 주저하던 옛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일의 진행이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어제 어디를…… 다녀오셨다고요?”

레틴은 대수롭지 않게 읊조린 제레미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태자궁.”

세상에. 우리 황자님이 요즘 왜 이러시나.

황태자궁으로 갔다가 들켜서 돌아온 게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황태자 궁으로 걸음하다니. 계획도 좋지만 자신에게 조금의 언질도 없이. 이건 아니지 않나?

사춘기 때도 말썽 한번 없이 잘 커 준 우리 황자님이 다 큰 지금에야 질풍노도를 겪고 계시나?

“거길 또 가셨다고요? 들켰으면 어쩌려고요!”

“두 번은 안 들키지.”

제레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람 놀라게 하는 걸 보면 화를 내고 싶은데, 그 위험한 곳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온 걸 보면 ‘내가 이렇게 대단한 군주를 모신다.’며 괜스레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사이, 제레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주머니에는 은은한 금빛이 흐르는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뭔가요?”

“황태자의 코어야. 성분과 그 안에 걸려 있는 마법을 분석하려고 조금 긁어왔어.”

“세상에……. 황자님!”

레틴이 표정을 굳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제레미도 알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화를 내고 싶겠지.

하지만 제아무리 위험하다 한들 몇 번이고 다시 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힐레인을 아인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보석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니까.

다시는 아인이 자신의 의지대로 힐레인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리라.

코어 가루를 바라보는 제레미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 속에 깃든 감정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걸 알기에 레틴은 다시 입을 닫아야 했다.

‘일단은 무사히 돌아오셨으니까. 그리고 코어만 파괴할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에게도 이득이야.’

만약 코어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면 황자님의 바람대로 힐레인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 외에도, 그림자 기사단에 균열을 만들어 놓을 수 있다는 이득이 있었다.

코어가 없으면 황태자는 기사단을 부리는 데 상당한 불편을 겪을 테니까.

“그럼 코어를 제거한 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제레미는 아인의 날개를 차근차근 꺾어 놓을 계획이었다. 첫 번째가 코어를 제거해 그림자 기사단을 와해시키는 거라면 두 번째는 아인의 죄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헤렌 폭발 사건을 일으킨 진범이 아인이라는 걸 밝혀내야 해. 지금부터 증거를 수집해야 할 테니, 레틴 경도 준비를 부탁해.”

레틴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지금 제레미가 하겠다는 일은, 레틴이 내내 설득했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했던 일이었다.

아인에게 늘 죄인이었던 제레미는 감히 아인의 죄를 들출 생각을 하지 못했었기에.

“……그걸 밝혀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죠?”

“알아.”

제레미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요가 완전히 사라진 눈동자에 그의 곧은 의지가 드러났다.

“아인을 실각시켜야지.”

아인과 결코 접점을 만들지 않으려 했던 제레미는 인제 그만 평행선 위에서 내려오기로 했다. 어느 순간 맞닿아 한쪽이 무너지게 되더라도 멈추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거듭된 회귀 속에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던 그녀처럼.

* * *

좀체 서류에서 눈을 떼는 일이 없던 아인은 요즘 부쩍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등지고 있던 햇살에 시선을 두는가 하면,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곤 했다.

그런 아인의 시선 끝에 힐레인이 있다는 것은 도베르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석 달 전,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문을 의식한 탓인지 힐레인은 최근 들어 자주 제레미와 함께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달달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안전하다는 걸 인식해서인지, 힐레인은 내내 살가운 얼굴이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황자 또한 지금껏 봐온 이래 가장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참으로 예쁜 한 쌍이 아닌가. 가끔은 행복해하는 여동생 내외를 보는 것 같아 도베르는 괜스레 눈이 시큰거릴 때도 있었다.

‘난 그렇다 쳐도, 황태자님은 무슨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걸까.’

종종 그늘이 지는 아인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도베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도 아인의 표정은 서늘하기만 했다. 여름의 햇살 아래서도 홀로 겨울을 견뎌내는 사람처럼 이질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던 도베르는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아인에게 꺼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글쎄…….”

아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힐레인을 워낙 특별히 생각했으니 단순하게 본다면 질투와 같은 감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인은 그런 쪽에 있어서는 매우 메마른 사람이 아닌가.

만약 힐레인에게 사랑, 그 비슷한 감정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그는 그녀를 취했을 것이다. 제레미 곁에 버려두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아인이 품은 감정은 힐레인에 관한 것이 아닐 것이다.

혼자서 그렇게 결론을 내리던 찰나, 아인이 입을 열었다.

“저 아이 말이다. 우습지 않으냐……?”

“황자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쥐여준 첩자의 손을 잡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 것이 우스워.”

아인의 시선이 힐레인의 손을 맞잡은 제레미에게로 닿았다.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서 편안하겠구나. 백치처럼, 즐거울 테지.”

비웃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마치 그날의 기분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제레미가 백치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 그 날.

“도베르, 내가 유디트의 유언을 처음 실행했을 때.”

도베르가 기억을 더듬었다.

유디트가 남긴 유언은 황가의 핏줄을 말리라는 것이었다. 제레미든 후에 태어날 동생이든.

아인은 유디트가 세상을 떠난 날 도베르에게 독초를 구해오라 지시했다. 임무는 중간부터 자신의 손을 떠났지만 독초가 어디로 갔는지는 며칠이 지난 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황자가 독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군.]

동료가 가져다준 짧은 소식에 도베르는 자신이 구해준 독초를 삼킨 게 제레미라는 걸 대번에 눈치챘다. 그 후 제레미는 꼬박 한 달 동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눈을 떴을 땐 백치가 되어 있었다.

“예, 기억합니다. 유디트님의 유언에 따라 황자를 제거하려 했죠…….”

회상을 마친 도베르가 아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유디트의 유언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도베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아는 유디트의 유언은 황가의 핏줄을 몰살하라는 것 하나밖엔 없었다. 한데 또 다른 유언이 있었다니?

대답을 요구하듯 집요하게 따라붙은 도베르의 시선에 아인은 유디트의 첫 번째 유언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아인, 내 아들아. 황가의 핏줄을 모조리 짓밟아, 피를 흘리게 하고 뜬눈으로 죽게 만들어라.]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제레미든 카렌이든 모두 죽이는 것이 옳다고, 그리 여겼었다.

하지만 종종, 마른 가지에 바람이 찾아들듯 결심이 흔들렸다.

두 가지 유언을 남겼던 유디트처럼.

[아인……. 내가 떠나거든 네가 제레미를 대신 품어주거라……. 그 아이 제 어미에게 사랑 한번 받지 못했던 아이가 아니더냐. 너랑 나밖엔 모르던 애였어.]

폐궁에 갇혔던 유디트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었다. 두 가지 유언 중 어떤 것이 진실이었는지 그녀가 정말 바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유디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는 늘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10년 전, 도베르가 구해왔던 독초를 독성이 약한 것으로 바꿔놓았던 그때처럼.

미간을 찌푸린 아인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지금도 그때와 다를 바 없는 기분을 느끼며.

아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깨부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을 화폭에 담아두는 미련한 사람들처럼, 손에 쥐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참 미친 짓이지. 그래 봐야 참혹한 현실만 깨달을 뿐인 것을.

아인은 인제 그만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이대로 제레미를 곁에 뒀다간 그 어떤 유언도 따를 수 없을 테니.

길고 지루했던 평행선 위에서 내려올 시간이었다.

“도베르.”

“예, 황태자님.”

“힐레인을 데리고 와.”

아인이 창밖에서 시선을 뗐다. 평상시처럼 차분해진 그의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 * *

제국민들을 상대로 한 거짓말은 다행히도 순항 중이었다. 황자 부부와 관련된 비밀스럽고도 자극적인 소문에 레소드가 만든 소문은 금세 묻히고 말았다. 임신을 계획 중인 몸으로 어떻게 감옥을 습격할 수 있겠냐면서.

석 달이 지난 지금, 소문만 무성했던 침입자 탈출 사건은 이제 영영 미제로 남게 될듯싶었다.

그래도 아인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이 문제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나는 오후의 볕이 드리운 유리온실 안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아인을 바라보았다. 문득 찾아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화초에 시선을 두고 있는 아인에게 물었다.

“침입자는 이대로 찾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조각처럼 완벽한 장미에서 눈을 뗀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꽃을 바라볼 때와 같이 무료한 시선이 뒤를 따랐다.

“내가 여기서 침입자를 찾으면…… 겨우 진정시킨 레소드의 소문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그건…… 안 되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당황하는 내 모습을 관찰하는 아인의 시선에 조금씩 미약한 흥미가 깃들었다. 조금은 유해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최근 들어 아인은 조금 달라진 듯 보였다.

방금처럼 시시콜콜한 대화에 흥미를 갖는가 하면, 보고 장소를 유리온실이나 황태자궁 전용 정원을 택하는 등의 파격을 보였다.

더 놀라운 건 그가 더 이상 제레미에 대한 것을 물어보지 않는다는 거였다.

티타임 또는 산책이 목적이었던 사람처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게 다였다.

그가 제레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회귀 전엔 없던 일이라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초조한 기색을 숨기려 찻잔을 손끝으로 문지르고 있던 그때, 아인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결코 한가한 티타임에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슬슬 황자비 임무를 거둘까 하는데.”

“……예? 갑자기 왜…….”

당황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갑자기 왜 임무를 거둔다는 것일까. 최근 들어 제레미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은 것도 다 그 탓이었나? 혹시 나 말고 다른 첩자를 심으려는 건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자 그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제레미에게 대공 직을 하사해 달라고 청할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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