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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죄책감 (99/120)

99. 죄책감

“괴롭혀준다며, 신부야?”

제레미가 쿡쿡 웃으며 뒤돌아 누워 있는 내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제레미의 장난에 완전히 토라져 버린 나는 굳세게 돌아누운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어깨를 따라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그의 손을 견디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가볍게 솜털을 건드리던 감촉이 맥박 위를 맴돌았다.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말아 간질이는가 하면, 민감하고 여린 살을 부드러이 누르기도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 나는 목덜미를 맴돌던 그의 손을 붙잡아 침대 위에 붙였다.

“황자님, 저를 자꾸 자극하시면 정말로 지쳐 잠이 드는 수가 있어요.”

“……나는 힐레인이 먼저 지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내기해도 좋고.”

제레미가 붙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을 들어 내 뺨을 느릿느릿 쓸었다. 붉게 젖은 눈시울과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관능적인 분위기를 머금었다. 나를 유혹하기로 작정한 듯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야살스러웠다.

이러다가는 여우에게 홀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문득, 머릿속으로 센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핑크빛 분위기를 만들고 슬그머니 물어보는 거예요. 아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비밀을 얘기해버리도록.]

어쩌다 보니 판은 깔렸고. 그렇담 조금만 더 파고들면 제레미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좋죠……, 내기.”

누워 있는 제레미의 허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다리를 부드럽게 휘어 감자 제레미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는 게 보였다.

그의 벌어진 셔츠 깃을 쥐자 너무도 쉽게 단추가 뜯어졌다. 깊이 벌어진 셔츠 사이로 티 하나 묻지 않은 매끈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끝으로 슬며시 근육을 미끄러뜨리는 것에 반응하여 제레미가 몸을 움찔했다. 미지의 버튼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레미가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탄 상태가 되었다.

그가 한 손은 허리를, 다른 한 손은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다급히 내려온 입술이 여유 없이 거칠게 닿았다.

뒤통수를 감싼 그의 손끝에서 머리카락이 꼬이고 헝클어지는 게 느껴졌다.

“……읍.”

제레미는 지금까지와 달리 성급하게 나를 탐했다. 깊고 농염한 키스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릿속이 텅 비는 것만 같았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가까스로 정신을 붙든 나는 슬쩍 그의 상체를 밀어냈다. 입술을 뗀 그가 잔뜩 흐트러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슬그머니 질문을 꺼냈다.

“요즘도…… 약 먹고 있어요?”

제레미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입술을 마주쳐왔다. 그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무슨 약이에요, 그거……?”

자꾸만 키스를 끊자 그가 야속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토라진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말 안 해요?”

웃음을 참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조금은 힘이 들어간 내 목소리에 그가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러기야……?”

“궁금해요.”

부푼 입술에 짧게 입맞춤을 하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센의 말대로 남편의 입을 여는 건 한순간이었다.

“제약을 없애주는 약이야.”

“제약……이요? 아, 혹시 어려지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응……. 마법을 과하게 쓰면 제약에 걸려 어려지거든.”

그가 인제 그만 보상을 달라는 듯 집요하게 내 입술을 응시했다. 눈동자를 반쯤 덮은 촘촘한 은빛 속눈썹이 아련한 빛을 머금었다.

“더 해줘, 힐레인.”

나는 그의 입술 대신 이마에 요란하게 뽀뽀를 해준 뒤 슬며시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조그맣게 몸을 웅크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자, 얼굴 위로 따가운 시선이 내려왔다.

“힐레인……, 너.”

모른 척, 웃음을 참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잠시 후 제레미가 내 허리를 와락 잡아채서는 자신의 품으로 밀착시켰다. 조금의 틈도 없이.

“꺅!”

그의 셔츠가 거의 다 뜯어진 탓에 피부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손으로 밀어내보려 해도 닿는 곳이 온통 단단한 살결이라 민망함에 볼이 달아올랐다.

“황자님, 조금만 옆으로 가봐요.”

“나를 홀린 벌이야.”

“그럼 셔츠라도 다른 거로 입고 오시면 안 돼요? 너무 야해서 저 코피 쏟을 것 같은데요.”

“견뎌, 힐레인.”

그가 시선을 내려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의 복수라도 하듯이.

“난 네가 견디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순간 그가 내 목덜미를 덥석 베어 물었다. 간지러운 감촉과 함께 쿡쿡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 *

늦은 아침 해가 방 안에 스밀 때쯤 눈이 떠졌다. 텅 빈 침실의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제 어떻게 됐더라……?’

제레미의 유혹을 견뎌냈던가? 혹은 함락당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견디다 잠이 든 것 같긴 한데, 침실의 풍경을 보니 또 아닌 것 같았다.

‘시트가 왜 이렇게 흐트러져 있는 거야……? 베개 솜은 왜 다 뜯어져 있고?’

잔뜩 구겨진 시트 위, 하얀 깃털들과 제레미의 것으로 추정되는 터진 베개 커버가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일을 저지른 건가 싶어 다급히 거울 앞으로 가 옷차림을 살폈다. 단추 몇 개가 뜯어져 있는 것 빼고는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

‘휴……, 그럴 리 없지. 기억이 안 나는 걸로 봐서는 곯아떨어졌던 게 분명해.’

안도의 숨을 삼키며 쇄골까지 열린 단추를 잠갔다. 그런데 문득 목덜미 위로 붉은색의 자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두 뺨이 달아오르는 제레미의 흔적이었다.

* * *

“꺅!”

실로 오랜만에 평화를 되찾은 황자궁 안, 우렁찬 비명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깜짝 놀란 궁인과 기사들이 곧장 황자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안에서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상태였다.

“황자비님 혼자 안에 계신 상태인데…….”

“비켜 보시오, 문을 부숴야겠으니.”

기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문을 내리쳤다. 장정의 힘이 합해진 덕에 안에서 우지끈하고 잠금장치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혼비백산한 사이, 문틈 사이로 힐레인의 조그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정의 힘을 견디고 문을 붙들고 선 힐레인은 제가 가진 파워에 비해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들 물러가 줘.”

“황자비님, 무사한 것만 보고 갈 테니 이 문만 좀……!”

“아니, 아니야! 문 열지 마…….”

길고 긴 대치가 이어지는 사이, 이 상황을 말끔히 해결할 남자가 등장했다.

“무슨 일이야?”

시녀들의 설명에 제레미가 굳은 표정으로 문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노크하며 힐레인을 불렀다.

“나야, 힐레인.”

잠시 후 안에서 조그만 대답이 흘러나왔다.

“황자님만…… 들어오세요.”

우여곡절 끝에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벌어지고, 제레미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레미의 시선이 곧장 힐레인을 살폈다. 머리카락 사이로 깃털이 꽂혀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혹여나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하여 힐레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그녀가 손을 들어 제레미의 움직임을 막았다.

“오, 오지 마세요.”

완강한 거부에 제레미의 걸음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왜 그러는데?”

“하,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응.”

“제가 어제 결국…….”

힐레인이 울음을 삼키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황자님을 건드렸나요……?”

그녀가 고개를 떨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제레미는 극악한 범죄라도 지은 듯이 구는 힐레인을 보며 입술을 벌렸다.

황당한데…… 몹시 귀여웠다. 중앙 감옥을 습격할 정도로 대담한 그녀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자신이 무슨 짓을 했을까 겁을 내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힐레인?”

“만, 만지지 마세요. 저는…… 자숙해야 해요. 세상에…… 어떻게 베개를 다 뜯어버릴 정도로 황자님을…….”

“베개?”

제레미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힐레인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침실 쪽을 가리켰다.

완전히 뜯어져 깃털이 날리고 있는 베개를 보며 제레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 힐레인은 좀체 제레미를 놔주지 않았었다. 겨우 품에서 빠져나왔을 땐 그녀에게 새로운 인형이 들려 있었다. 그게 바로 제레미의 베개였다.

코를 베개에 박고서 터질 듯이 껴안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결국 가여운 베개가 그녀의 품에서 터져버린 모양인데.

“쿡쿡.”

“왜, 왜 웃어요?”

“힐레인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을까 봐 그래?”

“……어제 목덜미에 키스하신 이후에 기억을 잃었거든요. 잠이 든 건가 했는데 베개를 보니 이성을 잃었던 건 아닌가 해서……. 근데 저 아무 짓도 안 했나요?”

어젯밤 힐레인은 키스 후 곧장 잠이 들었었다. 뜨거워진 남편을 내버려둔 채 홀로.

“글쎄…….”

제레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곧장 답을 주기엔 어젯밤이 너무도 길고 외로웠었기에.

“그게 기억나지 않는다니…… 제레미 조금 슬퍼지려고 하네.”

“……!”

제레미가 시선을 내리깔고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반면 힐레인의 표정은 겨울의 호수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 * *

적막감이 깔린 비밀 서재 안, 제레미는 생각에 잠긴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힐레인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리던 그는 경고 없이 흘러들어온 생각에 입가의 미소를 지워냈다.

힐레인은 키스할 때 자주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가끔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듯 몸이 굳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레미는 힐레인이 아인을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인에게 두고 온 마음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품어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런 거라면 얼마든 기다려줄 생각이 있었다.

몸이든 감정이든 조금씩 힐레인의 시선을 뺏어온다면 언젠가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잘못 생각한 거였다. 힐레인은 아인에게 두고 온 마음 때문에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회귀 전의 시간들요.]

회귀 전을 기억한다는 말에 힐레인은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힐레인의 앞에서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첫 번째 시간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에 그녀는 크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힐레인이 그 시간을 후회하고 있음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첫 번째 삶에 강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얼마 전 감옥에 갇혀 정신 고문 마법에 걸렸을 때, 제레미는 지워졌던 그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

거친 천, 검은색 일색의 복장. 얼굴의 반을 가린 복면.

첫 번째 삶, 힐레인이 자신을 죽이러 온 그날. 그녀는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복장으로 제게 검을 휘둘렀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모를 수 없었다. 날렵한 선을 이루는 몸, 가벼운 움직임, 칠흑같이 어두운 밤 공간 속에서도 붉게 빛나는 눈동자.

방심한 틈을 타 그녀의 검이 제레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비린내에 반응하듯 그녀의 눈에 짙은 살기가 깃들었다.

반드시 눈앞의 적을 죽이고 말겠다는 살의에 지배당한.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녀는 금세 살기를 거둬들이고 모습을 감추었다. 본인의 의지는 전혀 깃들어 있지 않은 행동이었다. 줄에 엮인 마리오네트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인의 보석 탓이란 의심이 강렬하게 찾아들었다. 그녀를 도구로 전락시킬 사람은 그자밖에는 없으니까.

상념에서 깨어난 제레미는 마른세수를 하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동요로 흔들리던 눈동자는 손을 거둠과 동시에 단단하게 여물었다.

이제 웅크린 몸을 피고 움직여야 할 때였다. 과연 자신이 아인을 칠 수 있을지, 지금도 자신은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힐레인을 아인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그녀를 살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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