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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여우의 아이를 가졌나요? (98/120)

98. 여우의 아이를 가졌나요?

판으로부터 루의 행방을 들은 나는 곧장 도베르의 아지트로 갔다. 기절했다 깨어난 루를 도베르가 데려갔다는데 그의 성격상 지금쯤 루에게 따뜻한 우유와 담요를 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무룩한 사람만 봤다 하면 한여름에도 장작불을 지피는 도베르니, 제법 가능성이 있었다. 집, 온기, 수다 꽃이 마음을 풀어줄 거라 생각하는 천상 집돌이니까.

버려진 탑의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이윽고 가장 꼭대기에 도착했다. 미친 계단을 쉬지 않고 오른 탓에 문을 두드릴 즈음엔 거친 숨을 헐떡였다.

“헉, 헉. 도베르 선배. 안에 있죠?”

혹시나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노크 소리에 도베르가 문을 열었다. 산짐승이라도 온 줄 알았다며 싱긋 웃은 그가 한 발짝 물러서며 들어오라고 말했다.

역시나 루는 아지트에 있었다. 활짝 젖힌 커튼, 그 사이로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파리한 루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우유 잔을 든 채 멍하니 타들어 가는 장작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솟아났다.

“루나?”

눈 주변이 붉어져 있는 걸 보니 울음을 그친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는데. 나를 보자마자 그는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왜, 왜 울어?”

크게 당황하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담요를 루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저번에 도베르의 아지트에서 엉엉 울다가 알게 된 건데 저 담요, 울음을 그치는 데 꽤 효과적이었거든.

“루나…….”

담요를 두 손으로 꼭 여민 그가 시선을 내 배 쪽으로 내렸다. 루에게는 담요가 별 효과가 없는 것인지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정말 아이를 가진 거예요? 그 여우의 아이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도베르를 바라보았다. 도베르는 임신이 아니라는 걸 분명 들었을 텐데.

‘말 안 해줬어?’

입 모양으로 도베르에게 묻자 그가 ‘재밌잖아.’라고 말하며 배꼽을 잡았다.

속으로 혀를 차며 들고 있던 약병을 다시 품에 숨겼다. 지금은 엉엉 울고 있는 루부터 달래놓아야 할 듯했다.

“저기 루 대공, 있잖아. 임신에 대해 할 얘기가 있는데.”

임신이란 단어에 루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축하해야 할 일인데, 죄송해요.’라며 눈물을 훔치던 그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왔다.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루나…….”

“응?”

“설마 그 여우 자식에게 마음까지 준 건 아니죠? 어차피 임무가 끝나면 헤어질 사이잖아요.”

임무가 끝나면 헤어질 사이라……. 지금까지는 살아남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임무가 끝나기 전 죽는 게 더 먼저였으니까.

하지만 만약 끝까지 살아남아, 아인이 임무를 거두는 날이 오게 된다면…….

“떠나야지. 영원히 가짜 황자비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저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 생각할래요.”

“뭐?”

“당신에게 아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나를 선택해주기만 한다면…… 배 속에 있는 그 아이도 내 아이처럼 키울 자신이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대공. 내 말 좀…….”

“그러니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제게 오는 걸 주저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내게 와도 반길 거니까.”

진심이라는 듯 그가 눈물을 지우고 곧게 시선을 마주해왔다. 정말 아이 아빠라도 되겠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단숨에 진실을 털어놓았다.

“나 임신 아니야.”

내 말을 분명 들었을 텐데, 루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장작불을 볼 때 만큼이나 멍한 눈빛이었다.

“방금 뭐라고…….”

“위기를 면하려고 황자님과 밤을 보냈다고 거짓말한 거야. 어쩌다 보니 임신으로 몰리게 되었지만, 절대 아니라고.”

다시 한번 더 강조해 말하자 그의 선홍빛 눈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너무 반짝거려 별을 박아놓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아직 저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군요?”

기회를 말하는 그를 보며 이래서는 안 된단 생각이 들었다. 약의 영향을 받는 그는, 진짜 감정도 아닌데 계속해서 짝사랑의 고통을 겪어야 할 테니까.

‘어서, 어서 루를 놓아주자.’

루는 한 여자에게만 얽매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자유분방하게 사랑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진짜 루지.

그를 약의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자유롭게 생각하게 된 루가 그간 자신을 잡아두었던 나를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더라도. 이젠 그에게, 자유를.

더는 갈등하지 않고 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탁자 위에 슬그머니 올려두자 도베르와 루의 시선이 동시에 유리병 위에 닿았다.

“이게 뭐예요……?”

마음을 굳게 먹기 위해 두 손을 꼭 말아쥐었다. 짧게 심호흡을 한 나는 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았다.

“묘약의 부작용을 없애줄 약.”

루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지고, 이젠 자신의 손으로 옮겨온 유리병을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원치 않는 감정을 품게 만들어서 미안했어. 이런 말로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 미안해, 루.”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가 유리병을 손에서 만지작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늘 웃고 있던 입매가 일자로 다물어져 있었다.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습관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지만 금세 흩어질 듯 희미했다.

“저는 이 약을 보니 마음이 착잡한데.”

“…….”

“루나는 어땠어요? 이 약을 받았을 때 기분이.”

나는 그의 말에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염치가 없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부작용을 없앨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야 하는데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었다. 루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이, 그에게 약을 줘야 한다는 결심을 흔들어 놓기도 했었지.

“기뻤어요?”

루가 대답을 보챘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에 움찔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염치없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후 머리맡으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요?”

“네가 나를…… 한순간에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까 봐. 혹은 혐오하거나…….”

잦아든 목소리 뒤로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루의 표정은 살필 생각도 못 한 채 다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참 이기적이지. 네가 내게 무슨 감정을 느끼게 되든 감수하는 게 맞는데. 하지만 그건 처음에 느꼈던 생각이고 지금은 달라. 네가 약을 먹고 나를 어떻게 대하든 이젠 괜찮아. 욕하고 때려도 다 맞아줄게. 그래도 풀리지는 않겠지만 여튼, 내 마음이 그래……. 네겐 많이 미안해…….”

“그만.”

내 말을 끊은 루가 허리를 숙이고 고개 숙인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그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과하지 마세요.”

“……?”

“루나가 기쁘고 홀가분했다면 정말 서운했을 것 같긴 한데. 슬펐다고 하니까 좀…… 기분이 좋네요.”

“응?”

“루나가 나를 잃기 싫은 거잖아.”

그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살살 흐트러뜨렸다. 정말 그걸로 괜찮다는 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약은…… 내가 원하는 때 먹을게요. 묘약을 먹을 땐 루나의 의지였지만, 해독제는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때 먹을래요.”

루가 손에 쥔 유리병을 슬그머니 주머니 안에 감췄다. 의미심장한 뒷말을 덧붙이며.

“뭐, 약을 먹어도 변하는 건 없겠지만요.”

* * *

황궁 밖으로 나가는 루를 배웅하고, 도베르는 할 말이 있다며 황자궁으로 가는 길을 나와 함께 걸었다. 인적이 드문 숲길에 접어들자 그가 슬슬 본론을 꺼냈다.

“네가 감옥을 습격한 날 말이야. 레소드가 화살을 맞은 거 기억해?”

“어? 그걸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나. 그때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레소드에게 잡혀 지금 이렇듯 황궁 길을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살을 날린 게 누구였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베르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선배였어요?”

“응. 일이 꼬이는 것 같아서 급하게 달려가 봤었지.”

“그때 선배는 황태자님이랑 함께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맞아. 안 그래도 다급히 사라진 탓에 의심하시더라. 너한테 간 거 아니냐고.”

“선배가 사라졌는데 왜 저를 의심해요?”

이상하다 생각하며 눈을 찌푸렸다.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베르가 사라졌다는 하나만으로 어떻게 나를 유추해 낸 거지?

“아무래도 침입자의 생김새가 너랑 많이 닮은 탓도 있었겠지……? 네가 워낙에 사고를 많이 치기도 했고.”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요?”

“너한테 간 것 맞다고……. 아얏!”

손으로 팔을 철썩 때리자 그가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으라며 팔을 어루만졌다.

“나도 네가 의심스러워서 몰래 가본 거라고 했지. 근데 태평한 얼굴로 누워 자고 있더라고. 그렇게 말했더니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셨어.”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도베르 때문에 들키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저렇게 똑 부러지게 상황 수습을 해두었을 줄이야.

그런데 황태자님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좀 의외이긴 했다.

“괜찮아요? 선배 황태자님한테 거짓말 안 하잖아요?”

“……솔직히 지금도 마음이 편치는 않아.”

도베르가 심장 쪽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이제 사고 좀 그만 쳐. 너 때문에 내가 황태자님을 볼 때마다 여기가 막 찔린다고.”

도베르가 내 머리에 꿀밤을 놓는 시늉을 했다.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서 사탕 몇 개를 꺼내 놓자 그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오라버니한테 잘해라. 알겠어?”

사탕을 보상으로 두둑이 챙긴 그가 엄포를 놓았다.

일단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긴 했으나…… 지킬 수 있을지는 나조차도 의문이었다.

* * *

황자궁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손에는 제레미의 약을 감쌌던 손수건을 든 채.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것 같으니, 잠시 묻어두었던 제레미의 약에 관해서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나도 대처법을 알아두는 게 좋을 테니까. 하지만 제레미가 순순하게 이야기해줄지.

“있지 센,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황자님 이야기예요?”

“응. 꼭 알아내야 하는 중요한 일인데…… 말을 안 해줄 것 같아.”

“흠…… 남편의 입을 열게 하는 거야 쉽죠. 특히 신혼 때는 말이죠.”

“어떻게……?”

“핑크빛 분위기를 만들고 슬그머니 물어보는 거예요. 아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비밀을 얘기해버리도록.”

센이 음흉하게 눈을 빛냈다. 굳이 제레미의 입을 열게 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다른 의도가 다분히 깃들어 있는 듯하여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음……, 미안한데 그 바람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네……?”

생각 없이 뱉은 말에 아차, 싶었다. 점점 기묘해지던 센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이런, 제가 잠시 방심했네요. 당장 내일부터 예쁜 잠옷을…….”

이러다가는 또 잠옷 패션쇼를 벌이게 생겼단 생각에 다급히 센을 말렸다.

“아냐,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아주 왕……왕성하게 하고 있어.”

목소리 끝이 떨려 나오자 센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쐐기를 박아야겠다는 생각에 버럭, 소리를 지르듯 거짓말을 내뱉었다.

“매일 한다고, 매일!”

“꺅!”

갑자기 센이 입을 막으며 부끄러운 척을 했다. 거기에 힘입은 나는 당당히 어깨를 펴며 허풍을 떨었다.

“내가 밤마다 우리 황자님을 괴롭히고 있다고.”

“저기 황자비님……!”

“지쳐서 잠드는 황자님을 볼 땐 미안할 정도야.”

“저기……!”

“오늘도 괴롭혀드릴 계획이야, 아하하하!”

절대 잠옷으로 시달리지 않겠다는 염원을 담아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말을 내뱉었다.

창피함을 웃음으로 가리자 소리가 조금 괴상해지긴 했으나, 입을 가리고 볼을 붉히고 있는 센을 보자 만족감이 일었다. 이대로면 센이 잠옷 가지고 날 괴롭힐 일은……!

“신부야.”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한껏 추켜올렸던 어깰 아래로 털썩 떨어뜨렸다. 충격에 휩싸인 채 천천히 뒤를 돌자, 볼을 붉힌 채 시선을 옆으로 비킨 제레미가 보였다.

“오늘은 살살, 부탁해…….”

복숭앗빛으로 빨갛게 볼을 붉힌 그가 스르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색기 어린 미소 끝에 나만 볼 수 있는 진득한 장난기가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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