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기나긴 의문의 마침표
“세상에, 축하드립니다.”
“황손의 탄생이라니, 황실에 이런 경사가!”
“아니, 난…….”
하지만 차마 임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거 중이었다는 해명을 한 내가 어떻게 임신이 아닐 거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거짓말을 했다고 스스로 밝히는 꼴밖엔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아주 소심한 저항밖엔 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도 아닌걸요……. 아마도 아닐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요…….”
“아뇨, 저는 왠지 임신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오, 제발 센. 얼굴을 굳히며 들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의 환호성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얼굴도 잘 모르는 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커진 스케일에 벌벌 떨던 그때였다.
누군가 귀족들 사이를 헤치며 비척비척 앞으로 걸어왔다.
“루나…….”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가온 사람은 루였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의 끝이 떨려서 나왔다. 뭐라 묻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 듯, 그가 입을 빠끔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가에 스르륵 힘이 풀어지며 그가 정신을 놓았다.
“루 대공!”
타이밍 좋게도,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도베르가 루를 받쳐주었다. 도베르의 품에 머리를 기댄 그는 횡설수설하며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 * *
아인은 소란스러운 장내를 차분히 지켜보았다. 일이 있어 늦게 참석한 회의는 생각지도 못한 축제의 장이 되어 있었다.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황자님, 황자비님.”
“아직 임신이라 단언하기엔 이르지 않을까요, 체한 걸 수도 있는 걸요…….”
저마다 황자 부부에게 축하의 말을 쏟아내기 바빴고 오늘의 안건은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랜 것 같았다.
아인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이번 건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는데. 역시나 그녀는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넘겼다.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힐레인의 표정을 봤을 때 의도하지 않은 것 같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레소드의 소문을 덮는 데 큰 역할을 한 듯 보였다.
‘임신이라.’
아인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잘록한 허리를 스쳐 지나간 그의 시선이 다시금 힐레인의 얼굴 위에 닿았다.
아인은 힐레인이 임신은커녕, 제레미와는 밤도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림자 기사단에서도 그녀는 연애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외골수 같은 기질 덕에 검밖에 몰랐고, 사랑이라는 섬세한 감정은 품어본 적도 없으리라.
다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그건 제레미 쪽이었다.
[황자님께서 조사 중인 황자비님을 막무가내로 데려가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창을 맨손으로 걷어내 상처를 입으셨다 합니다.]
며칠 전 자신의 귀에 흘러든 보고는 실로 놀라웠다.
제레미가 힐레인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단 것쯤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제레미가 백치가 아니라면 좋아하는 척만 하는 것일 테고, 백치가 맞다면 정말로 정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겠지.
항상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던 아인은, 그날의 제레미의 행동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창을 맨손으로 걷어내면서까지 힐레인을 데리고 갔다면…… 제레미는 힐레인을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백치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기에 힐레인을 사랑할 수 있었겠지.
그러니 제레미는 백치다.
제레미가 백치가 아니라면 자신이 보낸 첩자를 진실로 사랑할 리 없지 않은가.
미치지 않은 이상.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힐레인을 쫓는 제레미의 시선을 보며, 아인은 단칼에 결론을 내렸다.
길고 길었던 의문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개운함은 뒤따르지 않았다.
저렇게나 좋아하는 티를 내는데, 힐레인은 제레미에게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을까.
자신이 모르는 시간을, 숱한 밤을 두 사람은 함께 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남녀가 아닌, 한쪽이 사랑을 품은 상태에서. 건조한 밤은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었을까.
아인의 금안에 서늘한 빛이 스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에, 그는 힐레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걸음이 힐레인의 앞에 닿고, 그녀는 드레스 자락에 닿을 듯 말 듯 다가온 아인의 구두 끝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붉은 눈동자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아인은 커다란 두 눈에 가득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핏빛을 머금은 입술이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기다란 손가락은 힐레인의 작은 손을 받쳤다.
힐레인의 손등 위로 천천히 입을 맞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축하하네, 황자비.”
아인의 손끝이 약동하는 맥박 위를 스치고 힐레인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아인이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나가 사라진 금안이 오후의 해를 즐기는 수사자와 같은 느른한 빛을 머금었다.
[임신은 아닌데.]
맹세의 보석을 통해 말소리를 전하자 힐레인이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인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그럼, 그렇지.
인제 그만 떨리는 가여운 손을 놓아주려 마음을 먹은 그때였다.
“형.”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제레미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아인에게서 힐레인의 손을 뺏어 온 그가 싱긋 웃으며 그녀를 뒤로 숨겼다.
“축하해줘서 고마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레미가 힐레인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그러곤 천천히 자신의 입가로 가져와 손등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 아인의 흔적을 지워내려는 듯이.
“형이 힐레인을 내게 준 덕분이야.”
사르르 녹을 듯한 눈웃음 사이로 연보랏빛 눈동자가 말간 빛을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던 아인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요란했던 회의가 끝이 나고, 임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판을 포함한 치료사들이 중앙궁으로 왔다. 답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뻔했다.
“임신이 아닙니다.”
“예?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를 가지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셨고…… 오늘은 입덧 증상도 보이셨는 걸요. 최근 무기력해 보이시기도 했고…… 또.”
센은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증상을 치료사에게 나열했다. 말만 들으면 내가 정말 임신이라도 한 것만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초기 임신 증상을 겪으셨고, 아이를 그토록 염원하셨다면 상상임신을 하신 것이 아닐까 의심됩니다.”
임신이 아니라는 말에 몇몇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다시 레소드의 일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아이를 염원하던 내가 그 위험한 중앙 감옥에 직접 침입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이 일단락되고,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중앙궁을 나왔다. 기절한 루가 눈에 밟히긴 했지만, 지금쯤이면 임신이 아니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굳이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황자비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가서 맛있는 점심 준비해드릴게요.”
생각에 잠겨 있는 내 모습을, 실망해서 말이 없는 것이라 여겼는지 황자궁으로 가는 내내 센이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특별히 센의 정성이 가미된 점심을 다 먹어갈 때쯤, 뜻밖의 손님이 황자궁으로 찾아왔다.
“녀석, 원 참!”
성큼성큼 직선으로 걸어오는 걸음걸이, 삐죽이 올라간 눈매. 뭔지는 몰라도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얼굴의 판이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파, 판님?”
내가 뭘 또 잘못한 건가 싶어 몸을 움츠리는데,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시울이 붉어진 게 보였다.
“많이 실망하였느냐?”
“뭐, 뭘요?”
“내 후배 녀석에게 들었다. 네가 아기를 무척이나 원하고 있었다고……. 아직 젊으니 기회는 많을 게야, 아가.”
투박한 손길이 머리 위에 닿았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판을 올려다보았다. 지난번, 임무 중에 그런 짓 하는 거 아니라고 교육할 때는 언제고……. 실망한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 같은 모습이란 말인가.
“……저.”
판에게만큼은 진실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거친 판의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딸랑이였다. 아기들이 좋아할 만한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딸랑이는 사랑스러운 핑크빛을 머금고 있었다.
“미래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 준비했단다.”
“임신도 아닌데…… 선물을 주시면 어떡해요……?”
“곧 쓰임새가 있을 게야. 너도 다음이 있다고 믿고, 실망하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거라. 알겠지?”
꼭 딸랑이를 전해줘야겠다는 것보다는 실망한 나를 달래주려는 의도가 보였다. 사실을 털어놓기는 틀렸다는 생각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위로를 받기 전이면 몰라도, 지금 얘기했다가는 귀에 피가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녀석 참. 감동하기는.”
“……하하.”
어색하게 미소를 짓던 찰나 판이 또 한 가지 선물을 더 꺼냈다.
“열어 보거라.”
이런, 선물을 몇 개나 준비하신 걸까. 식은땀을 흘리며 미적미적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기용품이라기엔 너무 단조로웠다. 액체가 담긴 길쭉한 유리병이었는데, 코르크 마개를 열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뭐예요?”
“네가 부탁해놓고 벌써 잊어버린 것이냐?”
“네? 제가 부탁했다고요……?”
“묘약 부작용을 푸는 약이다.”
“……!”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약병을 내려놓았다. 드디어…… 루의 부작용을 고쳐줄 수 있는 건가?
묘약에 의해 가짜 사랑을 느끼고 있는 그를 볼 때마다 항상 마음속에 죄책감이 일었었다. 한창 사랑에 빠져 있어야 할 청춘이 나 같은 칙칙한 첩자에게 붙들리고 말았으니…….
“감사합니다, 판님! 정말로, 감사해요.”
당장 루에게 가져다주자고 마음을 먹으며 약병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 내키지 않는 감정이 스며들었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운 감정에 표정을 굳혔다.
‘기뻐해야 할 일이잖아? 어서 대공에게 가져다주자고.’
이성은 분명 올바른 길을 안내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아니었다. 결국 걸음을 멈춰 선 나는 판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이 약을 먹으면…… 루 대공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판이 뭐라고 대답하든 약은 반드시 그에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루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했다.
만약 약을 먹고…… 그가 나를 혐오하게 되면 어쩌지? 호감을 없애주는 약이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저를 싫어하게 될까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싫고, 밉다거나…….”
이대로 루와의 관계가 깨지는 건 싫었다. 잘못된 계기로 시작된 관계였으나 염치없게도 그와 지낸 시간이 무척이나 즐거웠었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참 재밌게도 놀았지, 우리.
그러는 사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루는 내게 있어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생에 있어 또다시 루와 같은 멋진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단언컨대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와의 관계를 깨뜨리기 싫다.’는 이기심이 드는 건지도…….
못난 욕심이란 걸 알기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무룩해진 나를 바라보던 판이 손으로 수염을 쓸었다.
“글쎄다……. 이런 약은 나도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 잘은 모르겠구나.”
판이 내 어깨를 다독였다. 고개를 들자 그가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죄지었느냐?! 표정 풀지 못해? 어깨 펴고.”
갑작스러운 호통에 몸을 바로 하자,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네…….”
“하지만 말이다, 힐레인. 지금의 관계를 정말 친구라 부를 수 있느냐?”
친구.
나는 서슴없이 그를 친구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묘약의 부작용을 앓고 있는 그에게 나는 짝사랑 대상일 뿐.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니겠지.
“루 대공과 친구가 되고 싶으면 이 약을 주려무나.”
“……?”
“너에 대한 감정이 다 사라지고, 심지어 너를 미워하게 될지 모르지만. 상처받지 말고 다시 그에게 다가가려무나. 처음 친구를 사귈 때와 같이 인사를 나누고 관심사를 이야기하면서. 진실한 관계를 맺어.”
머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판은 이해심 어린 눈빛으로 기다려주었다.
“다시 시작…….”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건 늘 어려운 일이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회귀를 거듭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루가 나를 영영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건 적어도 가짜가 아닌 진짜.
내가 원하던 진실된 관계일 테니까.
“이제야 좀 너다운 표정이구나.”
판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뒤로 ‘애 키우는 건 힘들다’며 짧게 하소연을 붙였다.
소소한 대화가 주는 행복감에 웃음을 터뜨리자 웬만해선 웃음소리를 잘 내지 않던 판도 기분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네 살가움을 거절할 이가 누가 있을까. 어서 가보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