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얼마가 지났을까. 레소드와의 지루한 대치가 이어지는 사이 문밖으로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누군가가 기사들과 실랑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컹거리는 문틈으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단호하게 파고드는 목소리의 주인,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제레미를 떠올렸다.
‘설마.’
문밖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창으로 나를 막아섰다. 단단한 창의 손잡이에 가로막혀 있던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레틴 그리고 그 뒤로 제레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레미의 고요한 시선이 내 얼굴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어깨를,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창을 향했다.
연보랏빛 눈동자에 선득한 빛이 스몄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내게로 다가왔다.
기사 중 그 누구도 황자인 그를 막아서지 못하던 그때, 레소드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제레미의 걸음이 멈추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황자님. 황자비님은 현재 조사를 받는 중입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불가합니다.”
예리하게 제레미의 표정을 훑는 시선에, 레틴이 다급히 곁으로 다가갔다.
“레소드 경. 황자님을 막아서다니, 자네는 위아래도 없는 것인가.”
“나는 황제 폐하의 허락하에 황자비님의 조사를 진행하는 것일세. 황자님의 곁을 잘 보필하여야 할 자네가 되레 동참하면 어쩌자는 겐가.”
레틴의 말에 레소드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대치한 두 사람 사이에서 팽팽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황자님, 돌아가 주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황자비께서는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밝혀낸 건 있고?”
제레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내게서 모른다는 대답밖에 듣지 못했던 레소드는 침묵을 지켰다.
“영 소질이 없어 보이는데? 조사는 제레미가 할게. 내가 해도 충분해.”
“저희가 철저히 조사해 밝힐 테니 황자님께서는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증거는 있고?”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조마조마하게 제레미를 지켜보았다. 말투와 표정이 백치 연기와 평상시 모습을 교묘하게 건드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위태롭게 느껴졌다.
저러다 들키면 어쩌나. 보는 사람은 불안해 죽겠는데 제레미는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법 예리한 질문을 섞으며.
“레소드 경 말고는 목격자도 없다면서?”
제레미가 싱긋 웃으며 레소드의 허점을 늘어놓았다.
해맑은 얼굴로 가시를 세우는 그를 보며 레소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 외에는 목격자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자신의 허점을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질문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
“……예, 밤이 깊었던 탓에 얼굴을 본 건 저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2 기사단장입니다. 일반인들의 증언과는 힘도, 무게도 다를 테지요. 제 직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물러섬이 없이 당당한 태도였다. 잠시간 제레미의 설득에 현혹되었던 기사들도 다시금 비장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제레미 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치처럼 맑았지만, 지나치게 맑고 순수하여 가소롭다는 비웃음으로 들리기도 했다.
“제2 기사단장 직함이라. 너무 가벼운 거 아냐?”
“…….”
“직함이 아닌 목숨 정도는 걸어야지. 상대가 황자의 신부인데.”
일순간 제레미의 얼굴 위로 차가운 그늘이 졌다. 백치와 본모습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모습에 주변이 찬물을 끼얹은 듯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것도 황자가 무척이나 귀애하는.”
붉은 입술 위로 느릿느릿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기운이 사그라들었지만, 연보랏빛 눈동자에 스민 미약한 광기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이중적인 제레미의 모습에 기사들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가 알던 그 황자님이 맞나. 백치에 광기까지 도지신 건가. 긴장하면서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제레미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목숨을 걸 게 아니라면 신부는 제레미가 데려갈게.”
가로막힌 창 쪽으로 제레미가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채 말릴 새도 없이 예리한 창끝에 제레미의 손이 닿았다. 창을 밀어내는 손바닥이 피로 붉게 얼룩졌다.
“황자님!”
제레미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차마 그 손을 잡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자, 그가 조금 더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았다.
“가자.”
아름다운 입꼬리가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옷자락과 바닥에 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이 방에서 나오게 하는 게 최대 목표인 사람처럼 고집스럽게 앞을 향해 걸었다.
방 안을 가로지르는 제레미를 따라 짙은 적막이 흘렀다. 상반된 두 모습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이 방 안의 분위기를 내리눌렀다.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 * *
나는 황자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제레미를 소파에 앉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쪼그려 앉은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살폈다. 손바닥을 가로지른 상처에서 붉은 핏방울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서 치료해요.”
속상한 마음에 말투가 자연스럽게 딱딱해졌다. 일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던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치료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외출할 때 다시 상처를 만들어야 할 거야. 상처가 사라진 걸 보면 의심할 테니.”
“붕대를 감고 있으면 되잖아요, 얼른 치료해요. 당장.”
목소리 끝이 떨려서 나왔다. 울음을 참느라 애를 먹는 나를 보며 제레미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말끔히 치료된 손을 살피는 동안에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웃어요? 창을 맨손으로 만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요?”
흉터 하나 남지 않은 것을 꼼꼼히 확인하자 꾹꾹 눌렀던 분노가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레미는 화를 내는 내 모습을 즐기는듯한 얼굴이었다. 말간 눈동자에 은은한 미소가 스몄다.
“자꾸 웃을 거예요? 난 지금 화가 나 미칠 것 같은데?”
“그래서. 그래서 자꾸만 웃음이 나와.”
내 속도 모르고 제레미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했다. 처음으로 제레미를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나를 이토록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맙고.”
“…….”
“사랑스러워서.”
뜻밖의 대답에 정신이 멍해졌다. 이럴 땐 다그치기도 하고 화도 내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게 애교를 부리니 난감했다.
불만스럽게 눈을 찌푸리자 별안간 그가 눈가에 입을 맞췄다.
“……!”
깜짝 놀라 입술을 벌리자 그가 기습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내 입술을 삼켰다. 한번, 두 번, 세 번. 짧은 입맞춤이 이어지고, 그가 살짝 입술을 뗐다.
붉어진 내 뺨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상하던 그가,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두 팔로 안아 올렸다.
나를 모로 안아 든 그가 소파에 앉아 깊숙이 몸을 기댔다. 얼떨결에 그의 무릎 위에 앉은 나는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진 제레미의 말에 동작을 멈췄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지.”
“……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홀로 버티느라.”
흠칫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한한 이해를 담은 온화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게 무슨…….”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하는 시간이라니……?
어쩐지 제레미가 회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나……?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동요 없이 차분하게.
하지만…… 그가 그 시간을 기억할 리 없잖아.
그의 말대로 지난번의 삶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 하는 시간이었다. 회귀한 당사자인 나를 제외하고는.
그러니 제레미가 그 시간에 대해 알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기대감을 숨길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한번…….”
“네가 회귀한 걸 알고 있어.”
“……!”
가끔 홀로 감당하는 기억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거울 때가 있었다.
함께 보냈던 1년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제레미를 마주했을 때.
조금은 친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회귀 후 다시 불신의 눈빛을 보낼 때.
황태자의 앞에서 또다시 길고 긴 거짓말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아등바등 열심히 노력해도 어느덧 코앞에 닿은 죽음을 발견했을 때.
또다시 기댈 곳도 없고 안주할 곳은 더욱이 없는, 완전히 혼자인 세계로 떨어져버렸을 때.
그때마다 나를 집어삼키는 외로움은 쉽게 덜어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늘 홀로 버텨냈다. 버티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속으로는 함께 손잡아 줄 이를 기다리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러다 감정이 잦아들면 정말로 괜찮아진 거라고. 이젠 익숙해졌다고 자신하면서.
하지만 실은 괜찮아진 게 아니었다. 꾹꾹 누르고 외면했던 마음은 제레미의 한마디에 곧바로 상처를 드러냈다. 오랫동안 알아봐 주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어……?”
눈물을 흘리고 있단 걸 눈치챈 것도 그 순간이었다. 언제 차올랐는지도 모를 눈물이 여러 갈래로 뺨을 타고 흘렀다.
“미안해. 널 죽게 내버려 둬서.”
내 뺨을 감싼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눈물 자국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갔다.
“제가 죽었던 것까지 다…… 기억이 난 거예요?”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진득한 울음이 배었다.
“아직 다는 아니지만…… 네가 날 지키다 죽었다는 거, 이번 삶이 세 번째라는 것 정도는.”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쓸던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마에서부터 이어진 부드러운 감촉이 콧잔등을 간지럽히고, 서로의 숨이 섞여들 정도로 가까워졌다.
가만히 이마를 맞댄 그가 내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반드시 다 기억해낼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받쳤다. 애를 태우듯 간지러운 손길이 느껴지고, 그가 손끝으로 내 입술을 살짝 벌리게 했다.
잠시 후 눈길만큼이나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고, 마음을 다독이는 다정한 감촉이 이어졌다.
용기를 내 화답하자 제레미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쉴 틈을 주던 여유로운 키스는 온데간데없이. 내내 굶주리던 짐승처럼 탐하고, 또 탐했다.
참지 못하고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자, 그가 칭찬하듯 숨을 내어주었다. 헐떡이며 따뜻한 숨결을 삼키자 다시금 입술이 포개어졌다.
의식을 덮어버린 열락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어루만져졌다. 벽난로를 지핀 오두막 같은 품 안에서 긴 키스가 이어졌다.
며칠간 자지 못했던 탓에 한꺼번에 피곤이 몰려왔다. 제레미 품에 안겨 잠이 들었던 나는 불쑥 꿈에 나타난 한 장면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감히 사랑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은 대가일까.
꿈속에서 나는 제레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첫 번째 삶에서 저지를 뻔했던 내 과오였다.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제레미는 조금씩이지만, 회귀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길 죽이려 했다는 것도 기억해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몸을 틀어 제레미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그가 보였다. 내가 깬 걸 알아챈 것인지 그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자지. 피곤해 보이는데.”
그가 내 눈가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황자님.”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안해하는 내 표정에 제레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응?”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회귀 전의 시간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