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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취조 (94/120)

94. 취조

새벽녘 푸른 하늘에 동이 터올 무렵. 몽롱한 잠기운을 깨고 제레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편안하고 안정된 숨소리, 연분홍빛으로 혈색이 돌기 시작한 뺨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자게 내버려 두고 싶어 조심조심, 수면 향을 찾아 불을 붙였다. 제레미에겐 수면 향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긴 했으나, 피곤에 지친 지금 몸 상태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수면 향의 일렁이는 촛불과 새벽빛이 섞여들며 제레미의 얼굴을 잔잔히 비추었다. 여명을 머금은 은빛의 머리카락이 오묘한 색으로 들어차며 아름다운 잔광을 남겼다.

제레미의 얼굴에서 조금 더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 문득 앞섶이 잔뜩 벌어져 있는 그의 가슴팍에 시선이 닿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실례일지 몰라도, 촘촘한 근육이 박힌 그의 가슴팍은 꿀잠 베개였다. 어젯밤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며 끌어안았을 때,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것도 다 그의 가슴팍 탓이 컸다.

‘황자님이 뭔가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뭐였을까.’

꿈속의 이야기라 했던가? 하지만 바로 잠이 든 탓에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목소리로 보아 중요한 내용인 게 틀림없는데. 그는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별안간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시 후 점잖은 노크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리고, 베르킨이 새벽의 불청객을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소드 경께서 왜 이런 시각에…….”

잔뜩 낮춘 베르킨의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반면 감히 황자궁에 알현도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은 되레 당당한 태도였다.

“비키시오, 황자비님을 데리러 왔소.”

“그게 무슨…….”

약간의 소란이 벌어지고 잠시 후 베르킨을 밀어낸 기사들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방 안을 뒤흔들었다.

“황자비님, 죄인을 탈옥시켰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나오시겠습니까, 저희가 들어갈까요.”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또렷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침실의 문을 열었다.

“황자님께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

어젯밤, 시린 빛을 띠던 그 눈빛으로 레소드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간 내 뜻을 따라 침묵을 지키던 그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만족감을 품은 입꼬리가 들어 올려졌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속으로 낭패감을 느끼며 얼굴을 굳혔다.

달이 뜨지 않는 밤은 칠흑처럼 어두웠었다. 찰나의 시간에 벗겨진 복면 사이로 내 얼굴을 알아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레소드가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기사들이 머뭇머뭇 내게로 다가와 팔을 둘렀다. 나는 기사들에 의해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침실의 열린 문틈 사이로 잠에 빠져든 제레미가 보였다. 수면 향을 키고 나온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사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뭔가를 남겨 두고 온 것처럼 종종 황자궁을 돌아보며.

* * *

“그거 들었는가? 간밤에 황자비가 죄수를 탈출시켰다는군. 레소드 기사단장이 두 눈으로 목격했대.”

“정말인가?”

“아 그럼 기사단장이 목격했다는데 진짜지, 가짜겠는가? 쯧쯧, 그러니 황자비는 제대로 뽑았었어야지. 웬 듣도 보도 못한 남작가에서 데려오더니 결국 이 꼴이 났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죄수를 탈출시키다니, 황자비가 제정신이신지 모르겠군.”

온갖 구설수가 암암리에 떠도는 황궁 안에 오늘은 보다 강렬한 가십거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황자비가 간밤에 죄수를 탈옥시켰다.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사건이었으나, 이미 공공연하게 황궁 안이 떠들썩했다.

아인은 웅성거리는 궁인들을 유유히 지나쳐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에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들어찼다.

힐레인. 참 여러 번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손 많이 가는 부하가 아닌가.

하지만 지난번처럼 분노의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좀 허탈하고 우스운 정도. 그건 아마도 그녀에게 건 기대치가 낮아진 탓일 거라 생각했다.

평화로운 나날 속에서 얌전히 황자비 임무를 수행하는 건 아무래도 그 아이의 성미와는 맞지 않은 모양이니.

“도베르.”

“예, 황태자님.”

“남쪽궁에 불이 났던 그 시각에 너는 급한 용무가 있다며 나가지 않았느냐?”

“…….”

도베르는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아인의 말을 기다렸다.

어젯밤 그는 중앙 감옥으로 향하는 레소드의 뒤를 따라갔었다. 그가 레소드의 뒤를 밟지 않았다면 목이 졸리고 있는 힐레인을 구하지 못했을 터. 백번 잘한 일이었으나 확실히 뒷감당은 좀 무서웠다.

눈치 빠른 주군을 속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힐레인에게 간 것이냐?”

아인의 시선이 예리하게 도베르를 주시했다. 도베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천천히 입을 뗐다. 평소와 달리 조금은 여유를 잃은 목소리가 방 안을 조곤조곤 울렸다.

* * *

힐레인이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동안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것에 반해 어제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 덕분에 무겁게 꽉 차 있던 머리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마저도 곧 힐레인이 차지하고 말았지만.

눈을 뜬 제레미는 곧장 힐레인을 찾았다. 하지만 돌아온 건 베르킨의 걱정 어린 눈길뿐이었다.

“황자님…….”

“힐레인은?”

“…….”

아무런 대답도 내어놓지 못하는 베르킨을 보며 제레미의 미간이 좁아졌다.

* * *

“황자님!”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제레미가 복도로 나왔다.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 탓에 셔츠의 단추는 반 정도 풀어져 있었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매섭게 변한 제레미의 눈동자만큼은 매우 선명하고 또렷했다.

성큼성큼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제레미를 베르킨은 막을 수 없었다. 당황한 채 허둥지둥 제레미의 뒤를 쫓아가던 그때, 때마침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레틴과 마주쳤다.

백치 연기도 까맣게 잊은 검날처럼 예리해진 눈빛, 웃음기 사라진 입술.

레틴은 적잖이 당황한 채 제레미를 지켜보았다.

“황자님……?”

“나중에, 레틴.”

레틴이 뭐라 말을 하려던 찰나 제레미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황자님!”

계단을 뛰듯이 내려간 레틴이 제레미의 팔을 붙들었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황궁을 장악한 소문은 귀를 따갑게 할 정도로 요란했으니까.

“어디 가십니까? 혹시 황자비 때문에 이러는…….”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황자님!”

자신의 손을 뿌리치는 제레미를 다시 한번 더 강하게 붙들었다. 그의 표정 어디에도 백치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 황자궁 밖을 나간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보내줄 수 없었다.

“이럴 거면 10년 동안 무엇을 위해서 백치 가면을 썼습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황자님! 어찌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레틴. 그깟 여자가 아니야.”

어떻게 그런 하찮은 말로 그녀를 형용할 수 있을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부터 한결같이 곁에 있어 주었던 여자였다.

첩자, 배신자, 가짜. 온갖 폄하와 비난의 화살이 제게로 날아오는데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기꺼이 버티며.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까맣게 그녀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런데도 힐레인은 변함없이 자신의 곁을 지켰다. 기억해주는 이 아무도 없는 세계 속에서.

무너져내리는 제레미를 보며 레틴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은 실언하였습니다. 황자비님이 아니었다면 황자님을 구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가야지.”

“아뇨, 황자님. 황자비님이 그런 큰 위험을 감수한 이유를 떠올리셔야지요. 겨우 구해온 황자님이 다시 진창으로 들어가시는 걸, 과연 황자비님이 바랄까요?”

“…….”

“죽을 각오로, 필사적으로. 그렇게 황자님을 구해드린 거였습니다. 부디 그녀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하.”

제레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나 고뇌로 지친 피곤까지 씻어낼 수는 없었는지, 드러난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완전하게 기억난 건 아니지만 지난 생에서도 주욱 그랬던 것 같다.

불완전한 평화라도 쥐기 위해 그는 백치여야 했고, 그렇게 수갑처럼 채워진 제약 속에서 힐레인을 도울 방법은 많지 않았다.

이대로는 결국 지난번과 같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또다시 허무하게 힐레인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 그럴 바엔 차라리…….

“백치 연기를 그만둘 거야.”

“……네?!”

항상 제레미가 백치 연기를 그만두길 바랐던 레틴조차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본모습을 드러내는 건 좋지만 이렇게 불시에, 무방비하게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제레미 또한 그건 불가능하다 여긴 것인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말대로 지금은 무리겠지.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 말씀은 황태자와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이야기죠?”

잠시간 말이 없던 제레미는 꿈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아인과 서로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던 그때를.

그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간의 길을 걷는 결과가 힐레인의 죽음이라면.

기꺼이 짐승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제레미의 눈가에 희미한 그늘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레틴은 조금은 들뜬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틴은 이 순간을 늘 꿈꿔왔었다. 아인과 대적하지 않으려는 제레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나, 과거의 죄책감에 얽매여 있기엔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제레미만큼 황제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그럼 그에 대한 대비를 차근차근…… 화, 황자님? 어디 가십니까?”

방으로 발걸음을 돌릴 거라 예상했던 제레미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레틴이 그의 뒤를 쫓았다.

“설마 황자비님을 구하러 가시는 건 아니시죠?”

“맞아.”

“지금 당장 본모습을 밝히진 않을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밝히지 않아. 하지만 힐레인은 반드시 구할 거야.”

제레미의 고집스러운 말에 레틴은 당황했다. 백치 황자인 상태로 어떻게 힐레인을 구해올 수 있다는 것인지.

그러나 제레미는 무언가 생각해 놓은 사람처럼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중앙궁으로 향하는 걸음이 박차를 가했다.

* * *

내가 갇힌 곳은 지난번처럼 감옥이 아니었다.

방 안은 침대가 없다는 걸 빼고는 남쪽궁의 귀빈 객실과 유사했다.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테이블에 앉은 나는 맞은 편에 선 레소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냉철한 기사로 평이 나 있었다. 기사다운 단단한 얼굴 위로 감정이 드러나는 일은 극히 적었고 자연스럽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종종, 나를 내려다볼 때 그의 얼굴 위로 채 숨기지 못한 울분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연히 마주친 황궁 안에서 나는 레소드와 체르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 적이 있었다. 곁을 잘 내주지 않는 체르샤가 유일하게 살갑게 대하는 사촌이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두 사람이 얼마나 끈끈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저런 얼굴로 날 보는 걸까. 내가 체르샤의 몰락에 일조했다 여겨서.

“왜 자꾸 쳐다보시는 겁니까. 자백을 결심하기라도 했습니까?”

눈이 마주치자 레소드가 냉담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뇨, 아까도 말했듯 저는 제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도 없습니다.”

“지금 자백하신다면 참수형은 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버티실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황궁 밖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니다. 황자비가 황태자를 죽이려 한 죄인을 빼돌렸다고. 황자님을 황제로 추대하기 위한 모략을 짜는 것이라고.”

레소드의 말에 나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제레미를 구하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내가 범인으로 잡히면 제레미에게 갈 영향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이……. 황자님의 상태를 모르지 않을 텐데요.”

“글쎄요, 황당한 추측이라고 생각하지만 황자님이 백치가 아닐 거란 이야기도 돌더군요. 황태자를 제거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

여러 사람의 입을 탄 소문은 근거가 없기에 더 예리하고 무서웠다. 백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생겨났을 줄은.

이렇게 계속 버티다가는 황자님께 불똥이 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는 배후라도 만들어서 차라리 자백하는 게 나으려나.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하지만 금세 메마른 사막처럼 목이 바짝 조여왔다. 헤어나올 수 없는 그물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엉키고, 온몸을 옭아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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