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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제레미와 제레미 주니어 (93/120)

93. 제레미와 제레미 주니어

늦은 밤, 환하게 밝혀진 황자궁의 방 안은 소년의 숨소리와 우왕좌왕하는 베르킨의 발걸음 소리로 가득했다.

“으……음.”

얀으로 변한 제레미는 침대 위에서 자꾸만 몸을 바르작거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 헐떡이다가 가슴의 고통을 호소하며 옷깃을 쥐었다.

“레틴 경, 제발 빨리 와주게…….”

베르킨은 안절부절못하며 레틴을 기다렸다.

처음 레틴이 황자궁 창문을 두드렸을 때만 해도 베르킨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검은색 일색인 옷차림, 그리고 품에 안긴 작은 소년.

레틴은 긴 설명 없이 곧장 베르킨에게 소년을 맡겼다. 그 후 그는 미친 듯이 방 안을 뒤지고 다녔다. 뭘 찾느냐고 물어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대답이 없었다.

서랍을 모조리 열어보던 그는 좌절한 얼굴로 잠시 다녀오겠다며 사라졌다. 그 어떤 치료사도 부르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채.

텅 빈 방 안에서 베르킨은 떨리는 손으로 소년의 땀을 닦아주었다. 단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색색, 힘든 기색으로 숨을 내쉬고 있는 이 소년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황자님…….”

베르킨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제레미의 곁을 지켰다.

과거, 어린 제레미가 심한 감기몸살로 홀로 아파할 때 그의 옆에 있었던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지금은 폴리모프를 한 탓에 그때와는 다른 모습이었으나, 베르킨은 어릴 적 제레미와 눈앞의 소년을 겹쳐보았다. 거친 숨이 새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도 그때와 똑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물수건을 갈아드리는 것밖엔 없군요…….”

과거의 무기력감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그때,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갑작스러운 폭우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버린 힐레인이 보였다.

그녀는 자객들이 입을 법한 야행복 입고 있었으나 베르킨은 놀라지 않았다. 지금은 그 어떤 걸 본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수건을 가져와 힐레인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닦는 둥 마는 둥 정신없는 표정이던 그녀가 제레미의 곁으로 다가왔다.

* * *

빗물에 미끄러져 헛도는 반지를 벗자, 제레미에게 걸려 있던 폴리모프가 풀어졌다.

베개 위로 흐트러져 있던 제레미의 머리칼이 점차 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예상했던 대로 헤렌 축제 때 만났던 또 다른 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역시……. 헤렌 축제 때 날 감싸줬던 소년도 황자님이었나.

무엇 때문에 자꾸만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는 걸까. 자의로 소년의 모습이 되는 것 같진 않고……. 체질 같은 건가? 몸이 아플 때 소년으로 변한다든가.

제레미의 파리한 볼을 손으로 감쌌다. 소년으로 변한 그는 얇은 유리잔처럼 연약해 보였다.

“베르킨, 어서 판님을 좀 불러줘.”

“저도 그러려 했지만 레틴 경이 치료사를 들이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갔습니다……. 치료는 소용없을 거라고…….”

“소용이 없다니…… 레틴 경은 지금 어디에 있어?”

“뭔가를 다급히 찾으시다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뭘 찾고 있었다고?”

이상했다. 아픈 제레미를 두고 뭔가를 찾으러 갔다고? 내가 아는 한 레틴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황자님을 두고 갈 정도로 급박하게 찾아야 할 게 뭐가 있었을까. 뭔지는 몰라도 제레미가 아픈 것과 관련이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오나, 오자마자 서랍을 죄다 열어 보시더라고요…….”

“서랍이라고…….”

무심결에 베르킨이 미처 닫지 못한 책상 서랍에 시선이 닿았다. 저 정도 공간에 들어갈 물건이라면 크기가 꽤 작을 것이다.

혹시나 하여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엔 작은 노트와 필기구, 안경이 전부였다.

‘뭐지, 레틴이 찾던 게 뭐였을까…….’

낯익은 은빛의 안경을 바라보다 문득 기억이 났다. 비밀 서재의 책상 위에 안경이랑 책들, 그리고 조그만 약병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만, 약병……? 레틴이 찾고 있던 게 약은 아니었을까?

다급히 몸을 움직여 숨겨두었던 하얀 손수건을 찾아왔다.

손수건을 펼치자 끝부분이 살짝 긁힌 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 판에게 의뢰했다가 남은 제레미의 약이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약을, 그리고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레틴이 아픈 제레미를 두고 뭔가를 찾으러 나갔다면 분명 약을 구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그렇담 지금 가장 의심스러운 게 바로 이 약이었다.

“레틴 경이 찾던 게 이 약일 거야.”

판은 단순한 두통약이라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마법 약은 평범한 약에 마법을 걸어 만드는 거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두통약과 가벼운 진통제 등이 많이 사용된다고.

만약 이 약이 마법 약이라면 치료사인 판은 모르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컸다.

“확실해, 이 약이야.”

손에 쥔 약을 조심스럽게 제레미의 입술 사이에 밀어 넣었다.

“황자님, 약이에요. 드셔야 편해지실 거예요.”

제레미를 내게 기대게 한 채 조금씩 물을 흘려 넣었다. 입술 끝으로 흘러내린 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다시 물을 흘려주기를 반복했다.

잘게 쪼개놓은 듯 시간은 느리게만 흐르고, 제레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빠르게 타들어 갔다.

돌처럼 굳은 채 제레미의 상태를 살피던 그때였다. 기대에 부응하듯, 꼭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미약하게 들어 올려진 눈꺼풀 사이로 연보라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꿈결에 휩싸인 듯 몽롱한 시선이 열심히 내 눈을 쫓았다.

“……힐레인?”

“네, 황자님. 저예요.”

제레미의 눈이 힐레인의 검은 옷자락을 지나 작게 변한 자신의 손을 훑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지?”

작게 중얼거린 그가 다시금 힐레인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제레미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모든 고통을 털어낸 것 같이 환하게.

하얗고 작은 손이 힐레인을 향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인 것 같아 몸을 조금 숙여주자 그가 두 팔을 그녀의 목에 둘렀다.

목덜미에 닿은 감촉은 가냘프기만 한데, 힐레인을 끌어안는 힘은 뜨겁고 강렬했다. 오랫동안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을 겨우 가진 아이처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이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힘을 주면 안 될 것 같은데…….”

다시 제레미를 눕히려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나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아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편한 자세를 만들어주는 게 낫겠다 싶어 제레미를 번쩍 안아 무릎 위에 모로 앉혔다.

“제가 안아드릴게요.”

아이처럼 안긴 게 부끄러운지 제레미가 고개를 숙였다. 창백했던 뺨이 붉어지고 있었지만, 내 품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옷깃을 살짝 붙든 작은 손이 너무 귀여워, 그를 꼬옥 안아주었다.

잠시간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베르킨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다. 왜 소년으로 변한 거냐는 추궁은 잠시 미뤄두었다. 반드시 알아내야 할 숙제였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은 오아시스처럼 찾아온 평온을 즐기고 싶었다.

작은 등을 가만가만 다독여 주던 나는 문득 머릿속에 파고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쩐지 황자님 주니어와 있는 것 같아요.”

“주니어…….”

내 말에 제레미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싫으세요?”

“힐레인에게 아이처럼 보일 게 부끄러워……. 어른스럽게 보여야 하는데.”

제레미가 조그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밖으로 나온 귀가 잘 익은 과실처럼 붉어져 있었다.

“왜 어른스럽게 보여야 하는데요?”

“나는 힐레인의 마음을 얻는 중이니까. 기대고 싶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남자로 보이고 싶어.”

슬며시 손을 내린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불안한 듯 살짝 찌푸려진 미간, 연보랏빛의 커다란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어른스러운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보호 본능이라 할 수 있으려나?

그건 비를 쫄딱 맞은 강아지를 봤을 때, 날개가 부러져 떨고 있는 자그마한 새를 봤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지켜주고 싶고, 마구 애정을 주고 싶은 그런 기분.

“힐레인……?”

내 표정이 이상해진 걸 느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같이 지낸 시간이 있어 그런지, 그는 내 표정의 의미를 금세 간파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방금 전의 이야기로…… 내가 좀 더 좋아졌어?”

뭐라 말할지 고민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레미의 표정이 묘해졌다. 내 감정의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기쁜 모양이었다.

쿡쿡, 낮게 웃음을 흘린 그가 팔을 허리에 감으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등을 차분히 다독거려주자, 제레미가 어리광을 부리며 어깨에 몸을 기댔다.

어쩐지 도움이 필요한 작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몽글거렸다.

“힐레인.”

“……네.”

한시름 놓고 나자 급격히 잠이 쏟아졌다. 이름을 부르는 제레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릴 정도였다.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 사실 꿈에서…….”

* * *

나도 모르게 잠시간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대략 30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그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품 안에 안겨 있던 작은 제레미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있었다.

침대 끝에 닿을 정도로 큰 키, 너른 어깨, 소년의 티를 벗어낸 날렵해진 턱선.

자라난 신체를 눈으로 훑다, 문득 몸이 너무 밀착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강인한 두 팔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몸을 살짝 틀자, 제레미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안녕, 신부야.”

성인 남자의, 낮아진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잠결에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몹시나 야살스럽게 들렸다.

“……언제 이렇게 커진 거예요?”

“힐레인이 꾸벅꾸벅 졸 때.”

“아…… 제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봐요. 죄송해요. 무슨 얘기를 하다 말았었죠?”

분명 잠결에 중요한 얘기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았는데.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자 그가 내 손을 슬그머니 쥐었다.

“내일 얘기해 줄 테니, 지금은 조금 더 자.”

머리 위로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고 있는 제레미가 보였다.

“저는 괜찮은데…….”

말과는 달리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제레미가 머리를 팔에 기대게 했다. 잠결에 뺨을 가슴팍에 비비자 허리를 감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강인한 감촉이 느껴졌다.

“잘자, 힐레인.”

* * *

제레미는 노랫소리를 감상하듯 눈을 감았다.

힐레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너덜너덜하게 해졌던 정신이 조금씩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소리는 악몽의 끝을 말해주듯, 따뜻하고 감미로웠다.

“사랑해…….”

사랑하는 그녀가 있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웃고 떠들고, 서로를 끌어안아 주는, 아름다운 일상으로.

깊은 안도와 함께 잠이 밀려들었다. 제레미는 등을 다독이는 힐레인의 다정한 손길 아래에서 스르륵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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