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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구출 (92/120)

92. 구출

그 시각, 기절한 제레미는 또다시 그 꿈속에 있었다.

힐레인이 죽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봐야 하는 자신. 아인과의 죽음을 각오한 싸움.

꿈이 보여주는 세계는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가장 슬픈 순간에서 끝난 꿈은 도돌이표처럼 다시 힐레인의 죽음 전으로 되돌아왔다.

장면이 거듭될수록 제레미의 정신은 차츰차츰 무너져내렸고 끝도 없는 바닥으로 치달았다.

산 채로 박제된듯한 기분이었다. 끔찍한 고통이 이어지는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살아 있음에도 죽음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것 같았다.

붕괴에 가까운 수준으로 정신이 해져가던 그때, 다시금 힐레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번째가 있을까…….]

영원 같던 슬픔 속으로 미약한 의문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작은 틈새가 생겨났다. 눈앞의 장면이 사라지고 제레미는 이제야 겨우 슬픔 외의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세 번째.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

되풀이되는 장면 속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그 말을 읊조렸었다. 다음 기회를 기대하는 듯도 보였다. 죽음 끝에서 다음을 기대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구속구에 묶인 제레미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무겁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탁해진 눈동자에 미세하게 빛이 스며들었다.

‘설마.’

힐레인이 다음 생을 기대한 거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환생을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거라면 다음 생이 있을까 라고 말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분명 세 번째가 있을까 라고……. 이상하게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꿈속에서 본 게 힐레인의 두 번째 생이고, 지금이 세 번째 생이라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보니 몇 가지 석연치 않았던 점들이 맞아떨어졌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예지몽을 꾼다는 힐레인의 말.

예지몽을 꾼 게 아니라, 직접 미래를 겪어본 거라면?

자신이 정신 고문에서 본 기억들이 사라진 미래의 일이라면?

제레미의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정신 고문은 내재된 기억을 건드리는 것.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뿐, 꿈 속의 모든 내용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을까.

“윽…….”

그 순간 겨우 멈춰놓은 악몽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고문 마법을 남아 있는 마력으로 누르던 제레미는 생각을 바꿔 되레 그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마법이 보여주는 꿈속으로. 사라진 미래일지 모를 기억 속으로.

혼탁한 눈동자에 미세하게 푸른빛이 스미고, 제레미는 마법을 교묘하게 조정해 힐레인이 죽었던 시점에서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빛이 스며든 방 안의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힐레인이 있었다. 그녀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서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레미의 차분한 시선이 힐레인의 차림새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아랫단이 찢어진 드레스, 차가운 밤공기가 묻은 피부. 잔뜩 긴장한 채 움츠러든 어깨.

첫날밤, 홀로 남겨졌던 그 밤인가.

제레미는 아인에게 보고를 마치고 온 그녀와 마주쳤던 밤을 떠올렸다.

하지만 알고 있는 기억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힐레인을 발견한 것이 아닌 그녀가 직접 저를 깨웠다는 점이었다. 옷차림도 그날 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뒷 여밈이 뜯어진 게 아닌, 치맛자락의 반이 찢어져 있었다.

‘내가 알던 때와 다른 시간대야.’

생각에 잠겨 있던 차, 힐레인이 먼저 입을 뗐다.

“저…….”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오므렸다가 펴길 반복하는 입술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린 그때였다.

“이런 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하얀 드레스 자락 위로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고운 물결을 그려냈다. 실재하는 그녀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심장이 울렸다. 제레미는 손을 살며시 잡는 그녀를 막막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저는 황자님을 돕고 싶어요.”

곧게 뜬 눈동자가 선명한 붉은 빛으로 빛났다. 믿어달라는 듯 절박해진 표정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황자님을 황태자님으로부터 지켜드리고 싶어요.”

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정신이 멍해졌다. 자신이 들은 게 진짜일까, 혹은 절박함 끝에서 튀어나온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채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가슴이 먼저 벅차올랐다.

그동안 힐레인의 발걸음이 황태자궁을 향할 때마다 얼마나 많이 무너져내렸는지 모른다.

시기와 질투. 집착과 소유욕. 그녀의 시선을 제게로 돌려놓고 싶었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주길 바랐다. 아인이 아닌 나. 나를 생각해 줘.

그리고 지금,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건 분명 자신이었다.

오랫동안 염원했지만 단 한 번도 감히 현실로 이뤄질 거라 믿지 않았다. 가끔 힐레인의 행동에 의문이 차오르던 순간이 있었지만, 이내 지워버리길 반복했다.

입안에 굴린 사탕처럼 달콤하지만 깨어지면 파편처럼 부서져 여린 살을 파고들 게 분명했기에.

멍하니 생각에 잠긴 사이 눈앞의 장면이 흐려졌다. 순식간에 흩어진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고, 곧이어 심장으로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크윽.”

점점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제레미는 구속구에 의지해 몸을 늘어뜨렸다. 쇠사슬에 힘없이 걸린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문 마법을 역으로 파고든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약효과 까지 사라진 상태였다.

약을 제때 복용하지 않으면 강한 고통이 찾아들 거라던 경고가 거짓은 아니었던지, 잠시 후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지금은 안 되는데…….’

한계에 도달한 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헐렁해진 구속구 사이로 손목이 빠져나오고, 축 처진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한없이 약해진 몸이 돌바닥으로 부딪치기 전, 누군가의 손길이 그의 몸을 강인하게 감쌌다. 보드라운 온기가 차가운 제레미의 몸을 품었다. 온힘을 다해 스르르 눈을 뜬 제레미가 눈앞의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자정의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붉은 달을 닮은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이대로 눈을 감기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리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 * *

퀴퀴한 냄새가 밴 지하 감옥 안, 그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철창 안에 있었다. 힘없이 꺾인 고개, 벽에 기댄 지쳐 보이는 몸.

“황……자님?”

안간힘을 다해 울음을 참은 나는 감옥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작스레 제레미의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것처럼 얇아진 손목이 구속구 밖으로 빠져나오고, 깜짝 놀란 나는 기울어지는 그의 몸을 품에 안았다. 안쓰러울 정도로 작고 가벼운 몸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제레미의 몸을 바로 세웠다. 곱슬 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식은땀이 맺힌 이마 위로 굽이쳤다. 10살 남짓한 나이지만 마냥 아이처럼만은 보이지 않던 소년, 얀이었다.

‘얀도 당신이었어요?’

따뜻한 별채 안에서 온종일 나를 간호했던 얀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몰랐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다정했던 말투, 눈물을 머금은 붉은 눈가. 가볍고 단아한 걸음걸이. 그 모든 것이 다 제레미였는데.

“지금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얼른 나가야 합니다.”

망을 보고 있던 레틴이 나를 재촉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나를 밀어내고 제레미를 등에 업었다.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며 내 신경은 온통 레틴의 커다란 등에서 죽은 듯이 기절한 제레미에게로 향해 있었다. 황자궁으로 도착할 때까지 그가 견뎌 주기를. 힘없이 흔들리는 손을 가만히 그러쥐던 그때였다.

지하 감옥을 막 빠져나오는 길,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검을 고쳐 쥐며 레틴의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레틴의 주변으로 기사들이 원으로 대열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맹렬한 경고를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인을 내려놓아라!”

제일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어둠 속에서도 타오르는 듯한 빛을 머금은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기사단장임을 말해주는 붉은 띠가 상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레소드 데일만.’

우리 앞을 막아선 기사들은 많은 인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소드와 그의 기사단 실력을 감안해 봤을 때 마냥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레틴을 흘끗 쳐다보았다.

위급한 상황이 오면 반드시 제레미의 탈출을 우선시할 것.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레틴이 몸을 뒤로 비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를 포함해 레틴의 수하들이 레소드 앞을 막아섰다.

“도망친다! 다들 저 자를 잡아!”

레틴을 발견한 레소드가 곧장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가장 먼저 걸음을 뗀 기사를 검으로 막아내며 레소드에게 낮게 경고했다.

“여길 지나가고 싶으면 나부터 먼저 꺾는 게 좋을 거야.”

레소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복면 아래의 얼굴을 가늠하듯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의 탐색 후 레소드가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발도해 검을 세웠다. 스르릉, 검집과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서늘한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이 내리그어졌다.

온몸이 근육으로 이뤄진 듯한 강인함, 거구의 체력에서 쏟아진 힘이 고스란히 맞붙은 검에 쏠렸다.

나 또한 힘에서 밀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확실히 이런 근육 괴물과 맞서려니 몸이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을 가까스로 흘려내며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고매한 기사님들은 검이 아닌 공격을 반칙이라 생각하나, 몇 년 전까지 국경을 지켰던 레소드는 오히려 이런 공격이 달가운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적수를 만났다는 듯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레소드가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을 흘려낼 때마다 그는 더 미쳐서 날뛰었다.

하지만 그는 고조된 흥분감 속에서도 조금의 실수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제2 기사단장이라 불리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젠장…….’

이런 유형의 상대가 제일 골이 아팠다. 수 분 내로 일격을 가하지 못한다면 체력이 고갈될 게 분명했다. 저 괴물 같은 놈은 내 체력이 고갈될 때를 귀신같이 알고서 파고들겠지.

하지만 그런 놈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커다란 체구는 커다란 과녁과 똑같았다. 즉, 때릴 곳이 아주 많다는 뜻이었다.

“합……!”

빠르게 치고 들어가서 그의 오른팔을 가격했다. 곧장 검이 내게로 내리꽂혔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검을 피한 나는 이번엔 몸을 숙여 그의 다리를 그었다. 하지만 레소드가 발을 빼는 게 더 빨랐다.

힘을 실은 발길질이 내 얼굴을 가격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바닥에 엎어진 내게 레소드가 재빨리 거리를 좁혀왔다.

그의 검이 내 어깨에 닿기 직전, 나는 땅을 손으로 긁어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으윽!”

눈에 모래를 맞은 그가 검을 떨어뜨렸다. 그가 방심한 사이 도망가려는데, 다리를 잡아끄는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어느새 레소드의 코앞까지 다가간 나는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 목이 잡힌 채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누구냐.”

레소드의 손이 복면의 천을 붙들었다. 잠시 후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복면이 걷어졌다. 어둑한 밤공기 사이로 레소드의 커다래진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온 그 순간이었다.

“크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레소드의 팔을 관통했다. 멱살을 쥐던 힘이 사라지고, 바닥으로 떨어진 나는 곧장 뒤돌아 다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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