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악몽 속에서
힐레인을 안은 채 복도를 걸었다. 곧게 걷고 있음에도 눈앞이 휘청였다. 피로 물든 힐레인, 그림자 기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복도, 악몽 같은 풍경이 눈물 속에서 흔들렸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눈물이 흐르고, 잠깐 동안 맑아진 시선 사이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잔뜩 흐트러진 금발, 힐레인에게 고정된 음울한 눈동자.
형이라 부를 수 없는 자신의 혈육. 아인이었다.
제레미의 시선이 아인에게서 죽은 기사들에게로. 그러다 다시 힐레인에게로 돌아왔다.
그와 자신 사이에 희생된 가여운 죽음들. 아등바등 피해 보려 애썼으나 결국은 파국이었다.
우린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을까. 왜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야 했을까. 왜 목숨보다 사랑했던 힐레인을 잃어야 했을까.
제레미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미소가 스며 나왔다. 공간을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광기가 넘실거렸다.
아인이 힐레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웃고 있는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얼음 같은 얼굴 위로 차가운 분노가 들어찼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인의 동요를 보는 건.
아마도 유디트가 죽었을 때 저런 얼굴이었으려나.
아인에게 있어 힐레인이 유디트만큼 소중했던 걸까. 아아, 그랬던 것 같다. 자비라곤 없는 차가운 남자가 힐레인의 앞에서는 봄볕에 눈 녹듯 굴곤 했었으니.
지금도 봐. 저가 죽여놓고. 지옥 속에서 떨고 있는 청승맞은 꼴을 봐. 후회하는 것을 보라고.
가증스럽게.
그 순간 제레미의 주변에서 푸른 빛의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닿는 것만으로도 생을 앗아갈 듯 위협적인 빛이었다.
“너도 죽어, 아인.”
[너도 죽어, 제레미.]
유디트의 장례식에 찾아갔던 날, 아인에게 들었던 말을 제레미는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그날 아인은 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언젠가 똑같이 되갚아 주겠다 말했다.
이런 식으로 돌려받을 줄은 몰랐는데.
제레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미소를 머금은 채 분노하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공평해져서. 즐거워?”
제레미가 힐레인을 안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 형성된 푸른 빛의 마나가 날카로운 창의 모양을 띠었다. 물로 이뤄진 것처럼 반투명의 푸른 빛을 머금은 창이 아인의 목 끝에서 멈추었다.
“웃어야지, 아인.”
섬뜩한 미소가 그림자 진 제레미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가 내뿜는 살기를 온전히 견디고 있던 아인이 느릿느릿 입을 뗐다.
“힐레인은, 죽었나?”
뚝뚝 끊겨나온 음성. 아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코앞에 다가온 자신의 죽음보다도, 힐레인이 더 중요하다는 듯 그의 시선은 제레미에게 안겨 있는 힐레인에게 닿아 있었다.
제레미는 아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이미 아인도 힐레인의 죽음을 알고 있을 터. 다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건 제레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밖으로 힐레인의 죽음을 말하는 순간, 영영 이별이 될 것만 같았다. 속절없이 무너져버리겠지.
이를 악문 제레미가 아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상반된 두 마나가 광포한 소음을 내며 부딪쳤다. 황궁 건물이 울릴 정도의 진동이 일고, 먼지 바람이 자욱한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의 목을 움켜 쥐었다.
힐레인은 얇은 막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의 곁을 지켰다.
“난 말이야, 아인.”
자는 듯 눈을 감은 힐레인에게서 시선을 뗀 제레미가 아인을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눈동자에 물기가 스미고, 데일 듯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한 줄기로 흘러내렸다.
“…….”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았어.”
“…….”
“내 어머니 때문에 겪었을 상처가 크다는 걸 아니까. 감히 나까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는 일이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웅크리고 살았어. 당신에게 영원히 무해한 백치로 남아서.”
제레미의 말이 끝나자 단정했던 아인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그게 아니지, 제레미. 넌 비겁하게 숨었을 뿐이야. 어릴 땐 트릭샤의 뒤로. 커서는 힐레인의 뒤로.”
“…….”
“힐레인이 죽은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천만에. 힐레인이 죽은 건 너 때문이다. 너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죽었어!”
내내 차갑기만 하던 아인의 시선에 불같은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폭발음과 같은 소음이 터지고, 제레미가 뒤로 주욱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내뿜은 엄청난 힘에, 제레미가 밀려난 거리만큼 대리석 바닥이 심하게 긁히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이 동시에 거리를 좁혀왔다. 일격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손에 담은 채.
이질적인 두 마나가 허공을 찢을 듯이 부딪치고, 거대한 마나 폭풍이 일었다.
“흐윽……!”
그 순간 제레미는 몸이 두동강 나는 고통과 함께 정신 고문에서 깨어났다.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저려왔다.
구속구에 의지해 몸을 축 늘어뜨린 제레미는 꺼질 듯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꿈의 끝자락을 붙들었다.
자신과 아인, 둘 중 누가 죽음을 맞았는지. 힐레인은 어떻게 해서 회귀하게 되었는지.
그 무엇도 떠올리지 못한 채 점차 의식이 흐려졌다.
* * *
힐레인이 황후궁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제의 부름이 있었다. 아마도 황태자궁의 습격에 관해 논하기 위함이겠지.
엘리샤는 올 것이 왔다 생각하며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힐레인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가보면 알 수 있을 터.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을 땐 이미 상당수의 귀족과 함께 아인이 도착해 있었다.
“간밤에 또 침입자가 나타나다니. 기사들은 대체 황궁 경비를 어떻게 하는 것인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황제의 호통이 떨어졌다. 황태자궁에 있었던 자객 사건도 아직 채 배후를 밝혀내지 못한 상태인데. 며칠이 지났다고 또 침입자가 들었다는 말인가.
“황태자궁의 기사를 충원하고, 침입자의 배후를 철저히 밝히도록 하라!”
“예, 폐하.”
황제의 명령에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요즘 들어 왜 이리 불미스러운 일이 자주 생기는 것인지. 배후가 밝혀지면 감히 황가의 핏줄을 노린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주리라. 황제의 시선에 선득한 분노가 담겼다.
엘리샤의 담담한 푸른 눈이 분노한 황제를 훑고 지나갔다. 엘리샤는 짐짓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가느다란 입술은 꾹 다물린 채였다.
힐레인의 말을 듣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녀는 끝까지 담대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힐레인의 입을 통해 들은 아인의 계획이 자꾸만 그녀의 평정심을 흩뜨려 놓았다.
힐레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구나. 아인이 장난질을 치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장내의 분위기를 살피던 사이, 황제가 이번엔 아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아인, 침입자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
“중앙 감옥에 가두어 고신 중에 있사옵니다.”
“그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배후를 밝히는 데 집중하거라.”
“예, 폐하.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겠습니다.”
아인의 시선이 스치듯 엘리샤를 지나갔다. 그 찰나에 엘리샤는 많은 것을 읽어냈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정녕 황자비의 말대로 인가.’
얼마 전 암살 시도 때도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었다. 자신이 보낸 자객들은 충성이 확실한 자들이었고, 죽음으로써 그것을 증명해낸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침입자는 다르다. 누군지도 모르고 누가 보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힐레인의 말대로 그자가 자신을 배후로 지목한다면?
이번 사건은 결코 자신의 짓이 아니었지만, 침입자가 그리 진술한다면 배후로 몰릴 가능성이 컸다. 이미 여러 번 아인과 공개적으로 대적해오지 않았나.
지금 상황에선 털끝만 한 의심만 주어져도 상황이 불리하게 작용 될지 몰랐다.
힐레인의 말을 토대로 여러 상황을 대입해 보니, 아인이 진범을 밝혀내길 포기하고 범인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한 게 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장 귀찮은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일 테니까.’
엘리샤가 아인을 지긋이 내려보았다. 아인의 입가에 붉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승기를 붙잡기 전에 다른 무언가 조처를 해야 했다.
* * *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두운 밤. 칠흑같이 검은 수풀 사이로 검은 옷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기척을 죽인 채 웅크린 그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냈다.
그들 중 반은 레틴을 포함한 황자님의 전속 기사들이었고 반은 황후가 보내준 자들이었다. 양쪽 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실력을 갖춘 자들이라는 건, 이곳에 오기 전 짧게 진행한 작전 회의에서부터 알아보았다.
차근차근 제대로 된 훈련을 밟아온 레틴의 기사들, 실전을 누비며 예리하게 실력을 다듬어온 황후의 자객들, 그리고 도베르가 칭찬해 마다치 않는 기지에 뛰어난 나까지.
모두가 머리를 맞댄 덕에 계획은 좀 더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모든 인원을 감옥 습격에 투입하고자 했던 원 계획은 양동작전으로 수정되었다. 반은 감옥을, 나머지 반은 감옥과 반대편에 있는 남쪽궁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황궁 내 불이 나면 최소 인원을 제외한 모든 기사가 불이 난 곳에 집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해 남쪽궁에 불을 낼 계획이었다. 그러면 감시 인원이 줄어들 테니, 제레미의 구출도 훨씬 수월해질 터.
아인의 갑작스러운 부름으로 도베르가 막판에 빠지긴 했으나,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출발하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반으로 갈라진 인영이 어둠 속을 날아올랐다. 난데없는 기척에 놀란 새들이 우왕좌왕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 * *
황제와 함께 집무실에 있던 아인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창밖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했다. 위치로 보았을 때 남쪽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마침 아인을 따라 시선을 옮겼던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의 호출에 제2 기사단장 레소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남쪽 부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데.”
“남쪽궁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서둘러 인원을 동원하는 중입니다.”
“불이라?”
황제는 몹시도 놀란 눈치였으나 아인은 내내 무심한 표정이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도베르가 안도의 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불현듯 아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남쪽궁은 현재 사용을 중단한 상태가 아니었느냐? 머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예. 관리를 위해 궁인들이 낮에 드나드는 것을 빼고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쪽궁은 황실로 초대받은 자들이 묵을 수 있게 마련된 곳이었다. 헤렌 사건 후 황궁 경계를 강화하자는 황제의 뜻에 따라 폐쇄된 지도 벌써 한 달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밤에, 사람도 없는 남쪽궁에 불이라……. 뭔가 이상합니다, 폐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도베르가 등 뒤로 식은땀을 주룩 흘렸다. 도베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의 반응을 주시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한 것이지?”
“일부러 불을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선을 돌리기 위한 속임수로 쓰기 위해서 말입니다.”
창문을 통해 남쪽궁을 바라보는 아인의 눈은 잘 벼리어진 검처럼 예리했다. 그의 시선 끝에서 검은 연기가 불길한 형태로 피어올랐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라……. 무엇을 말이냐.”
“남쪽궁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중앙 감옥이 의심됩니다. 최근 중죄를 지은 침입자가 수용되지 않았습니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긴 하나 하필 이 시기에 남쪽궁에서 불이 난 게 이상하다 여겨집니다.”
“황태자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재 진압에 기사들이 동원되면 중앙 감옥의 경계가 소홀해지니까요.”
가만히 경청하고 있던 레소드가 아인의 말을 거들었다. 잠시 후 느릿느릿 턱을 쓸던 황제가 레소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중앙 감옥으로 가보게, 레소드 경.”
서둘러 방을 나서는 레소드의 뒷모습을 보며 도베르가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가면 힐레인이 위험해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