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금기를 깨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치맛자락을 쥔 채 인사를 해 보였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인 엘리샤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친근감을 표했다.
엘리샤의 미소에 미약하게 죄책감이 일었지만 이내 외면했다.
그녀가 보이는 친근감은 언제 사라질지 모를 신기루와 같은 것.
그녀는 체르샤에게 그랬듯 도움이 되면 거두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가장 권력자적인 면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황후의 심중에 자리한 내 위치도 체르샤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협박과도 같은 말을 늘어놓을 것에 대해.
나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엘리샤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후 폐하, 기별도 없이 발걸음 한 이유는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였습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급히 할 얘기가 있다는 내 말에 엘리샤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차도 들지 않고 본론부터 꺼내는 걸 보니 몹시 급한 일인가 보군, 황자비?”
“황태자님의 계획과 관련된 일입니다.”
황태자란 얘기에 평화롭던 엘리샤의 표정이 굳어졌다.
“계획이라? 그 아이가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냐?”
“꾸미고 있다기보단 현 상황을 이용하는 거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연달아 자객의 침입을 받으셨지 않습니까.”
자객의 침입이란 말에 찻잔을 들고 있던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떨림을 숨기듯 곧바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침착해 보이려 애쓰고 있었지만, 챙 하고 소리를 내며 안착한 찻잔처럼 삐져나온 동요를 채 감출 수 없었다.
“황후 폐하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찬찬히 그녀가 보인 감정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황태자가 나를 의심하더냐?”
“비록 증거가 나온 건 아니지만, 첫 습격은 황후 폐하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고 계십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요.”
“…….”
“제겐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황후 폐하를 도우러 온 것입니다, 지난번 카렌을 도왔던 것처럼.
덧붙인 뒷말에 엘리샤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래, 너는 내 편이었지.”
엘리샤는 조금은 긴장을 푼 듯 보였다. 그녀가 아까보다는 좀 더 솔직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래, 네 앞이니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어제의 일은 내가 벌인 짓이 아니다. 황태자도 알지 않느냐?”
“예, 황태자님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럼 되었다. 네 말대로 첫 습격의 증거가 나오지 않았는데, 황태자가 내게 무슨 위협을 가할 수 있단 말이냐. 어젯밤의 일은 내가 벌인 짓이 아니니 사서 걱정할 건 없지.”
실제로 엘리샤가 걱정할 건 없었다. 첫 습격은 증거가 없었고, 어제의 습격은 황후와 관련이 없으니까. 이대로 발을 빼고 있으면 그녀는 안전할 것이다.
내 말에 동요하지만 않는다면야.
“황후 폐하. 황태자님께서는 진짜 배후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젯밤 잡힌 침입자는 황후 폐하를 배후로 지목할 것입니다. 대가는 구명. 지금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지만, 언제 어느 때 마음을 바꿀지 모를 일이지요.”
“황태자가 나를 배후로 꾸밀 거다…… 이 말이냐?”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쥔 엘리샤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예. 첫 습격에 두 번째 습격까지 통틀어 황후 폐하께 죄를 뒤집어씌울 것입니다. 황태자님께서는 진범을 밝혀내는 것 보다 거슬리는 적을 제거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시니까요.”
내 말에 황후의 시선이 흔들렸다.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빨라지고 여유가 가신 얼굴 위로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잠시 후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덫에 빠진 작은 동물처럼 반쯤은 이성이 마비된 듯 보였다.
“그럼. 내가 어찌해야 하느냐?”
답을 구하듯 엘리샤의 눈이 간절해졌다. 그 시선에 보답하듯 나는 엘리샤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다정한 믿음을 주기 위해.
“침입자가 증언하기 전, 몰래 빼돌리셔야 합니다.”
그러곤 엘리샤에게 진짜 목적을 꺼냈다.
“제가 직접 침입자를 빼내 오겠습니다. 수하들을 빌려주십시오.”
엘리샤는 감수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짊어져야 하겠지만, 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대로 그녀가 덫에 빠져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엘리샤가 내 제안을 수락하겠다 밝히며 고갤 끄덕였다. 보이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남은 죄책감도 차 한 모금으로 씻어내려 버렸다.
* * *
황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레틴을 만났다. 복도를 초조한 얼굴로 서성거리던 그는 나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섰다.
“황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마에 맺힌 땀방울,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라진 황자님을 종횡무진 찾아다녔던 모양이었다.
“시종장과 같은 거짓말을 할 셈이라면……!”
역시 레틴까진 속일 수 없는 걸까. 조금은 체념한 채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잠시 후 방 안에 둘만 남자 레틴이 내 팔을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저를 속일 생각 마십시오. 황자궁 전체를 다 뒤지고 오는 길이니까요.”
“속이지 않을게요.”
레틴을 속일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가릴 것 없이 손 하나라도 더 보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를 이 일에 끌어들이면 성공 확률도 높아지겠지.
하지만 레틴을 동참시키려면 내가 가진 비밀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 생에서의 실패로 다시는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금기와도 같은 말을.
‘나는 황자님의 편이에요.’
어렵게 결심했으나 막상 입 밖으로 말하자니 망설여졌다. 밝혀도 괜찮을까? 두 번째 삶에서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면 어쩌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는 나를 보는 레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또 무슨 일입니까. 황자님이 위험해진 겁니까?”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틴의 시선이 잘 벼리어진 검처럼 예리해졌다. 레틴에게 붙잡힌 팔에 욱신거릴 정도의 악력이 느껴졌으나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벌을 받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인생의 반을 제레미를 지키는 데 써왔던 레틴에겐 참으로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든 비난을 감수할 생각이었다. 이번 사건의 원흉이 나니까.
“어제 습격 사건, 이미 들어 알고 있죠?”
“황태자궁에 자객이 들었던 일 말입니까? 그런데 그 얘길 왜…….”
“범인으로 잡힌 사람이 황자님이니까요.”
“예……?”
“황자님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레틴의 미간이 좁아졌다. 뒤이어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런 재미없는 농담하지 마십시오. 황자님이었다면 벌써 소문이 났겠죠.”
“정말이에요. 모습을 바꿔서 아직 정체를 들키진 않았지만…… 범인으로 잡힌 사람은 분명히 황자님이에요.”
가만히 손을 들어 폴리모프 반지를 보여주었다. 반지의 정체를 아는 그가 시선을 미세하게 떨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하…….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침입자가 황자님이라고? 당신이 모습을 바꾼?”
한걸음에 거리를 좁힌 레틴이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정련되지 않은 감정이 거친 숨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걸 내 앞에서 털어놓는 이유가 뭐야…….”
레틴이 옷깃을 강하게 붙잡아 올렸다. 그의 손아귀에 함께 쓸려갔던 진주목걸이가 터지며 옷자락 위로 후두둑 흩어져 내렸다. 분노로 붉어진 시선이 진주 구슬을 따라 내리떠졌다.
“양심이 없어? 황자님은 감옥 안에 있는데, 태연히 치장이나 하고 황궁을 돌아다녀? 너는 네 임무를 다했다 이거냐? 황자님이 널 위해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분노에 휩싸인 그가 힘껏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허공에 멈춰 바들바들 떨고만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가 반항하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후 폐하를 설득하고 오는 길이에요. 황자님을 구출하기 위해.”
“뭐?”
“아직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커요. 그러면 최고 실력의 자객들도 이 일에 동참을 해주겠죠. 레틴, 당신도 같이 갈 거죠? 황자님을 구하러.”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지금 마치…… 황자님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맞아요.”
마른침을 삼킨 채 레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는 황자님을 돕고 있어요.”
결국, 스스로 세웠던 금기를 깼다. 그 자체만으로도 당장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눈을 힘주어 감았다. 파르르, 꾹 눌린 눈가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비록 황태자님의 명을 받고 황자님을 감시하러 오긴 했으나…… 저는 황자님의 편이에요. 그동안 황태자님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고, 황자님을 지켜왔죠.”
“…….”
레틴의 딱딱한 시선이 내 얼굴 위로 고정되었다. 믿을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황자님을 감시하기 위해 가짜 황자비 자리에 오른 너를, 내가 뭘 믿고.”
“지금은…… 그런 거 다 제쳐놓고 황자님을 구하는 것만 생각해줘요. 이번 일만 끝나면 나를 다시 힐난해도 좋으니 며칠만 제발.”
아아,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앞이 흐려지고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틴 경, 도와줘.”
“…….”
태연한 표정이 깨지고 그 위로 드러난 민낯에 레틴이 몸을 움찔했다. 내 팔을 붙든 힘이 스르륵 풀리고, 레틴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로? 또 뭔가를 꾸미는 게 아니고?”
“그런 거라면 내가 왜 황자님을 폴리모프 시켜드렸겠어요……. 염치없지만, 지금은 나를 믿고 도와줘요, 레틴 경.”
레틴이 표정을 굳혔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제레미를 폴리모프 해줬다는 사실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의 레틴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여전히 막막해 보였으나 나를 내려보는 눈빛에서 더 이상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작전이 뭔지, 그것부터 말해.”
* * *
“하…….”
메마른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드나들었다. 제레미는 아인이 걸어 놓은 정신 고문 속에 몇 시간 째 헤매는 중이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무의식 속에서 그는 긴 꿈을 꾸었다. 마냥 고문스러운 장면만 반복될 것 같았던 꿈은 생각했던 것보다 평온했다.
서서히 비극의 정점에 치달아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레미는 그 속에서 안주했다.
꿈속에서 그는 분주하게 결혼기념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혼한 후 처음 돌아온 결혼기념일, 상기된 두 뺨과 입가에 맺힌 무구한 미소가 들뜬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 준비한 선물은 방 한 칸을 다 채울 정도로 쌓여 있었다. 이러다가는 내일이 오기 전 선물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행복하고도 달콤한 고민이었다. 힐레인이 선물 중에 무엇을 가장 좋아해 줄까. 제레미는 커다란 선물 상자 위에 놓인 조그만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를 열자 영롱한 빛을 머금은 붉은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힐레인이 웃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이곤 했다. 그 선명한 붉은 빛을 담아낼 수 있는 보석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에 대해 의문을 품곤 했는데.
놀랍게도 온전히 그 빛을 담아낸 보석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떠오르는.
제레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지던 그때였다.
“황자님! 피하셔야 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레틴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피로 엉망이 된 옷이 보였다. 단꿈이 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제레미는 힐레인을 찾아 미친 듯이 다릴 움직였다. 복도를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던 그때, 피로 범벅이 된 공간 속에 천장을 바라보며 곧게 누운 힐레인이 보였다.
“힐레인!”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힐레인을 끌어안았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죽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서, 꺼질 듯 흔들리는 촛불과 같이 가여운 꼴로.
“세 번째가 있을까…….”
죽음 앞에서 힐레인이 몸을 떨었다. 그 속에 담긴 뜻이 뭔지 제레미는 알 수 없었다. 가장 귀 기울여 들었어야 할 말임에도 그 순간엔 감정이 복받치어 제대로 된 생각이 이어질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끝을 향해 타들어 가던 힐레인이 이윽고 눈을 감았다.
제레미가 그녀의 몸을 살짝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은 채 떠지질 않았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붉은 빛이 사라졌다. 늘 따뜻한 온기를 품었던 몸이 차갑게 식고, 자신을 볼 때마다 붉게 상기되었던 두 뺨은 생기를 잃고 흰빛을 띠었다.
제레미는 힐레인의 몸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물기 어린 미련한 고백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반복해 말하여도 이제 이 세상에 자신의 고백을 들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레미가 힐레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점차 잃어가는 온기에 부서진 마음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조그만 새처럼 재잘거리던 기분 좋은 목소리, 그 끝에 피어난 무구한 미소. 자신을 볼 때마다 휘어지던 부드러운 눈매. 그 어떤 것도 이젠 그의 삶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겨우 발을 딛고 있던 세상에서 완벽하게 탈락되어 나온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