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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나락으로 (89/120)

89. 나락으로

마법사를 위해 설계된 지하 감옥은 일반 감옥과는 다른 특수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돌벽 사이사이, 마나를 흡수하는 스톤이 다른 감옥과 차별된 가장 큰 요소였다.

그 탓에 마나를 가진 자는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심한 탈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베르는 감옥의 복도를 고요히 걷고 있는 아인을 흘끗 쳐다보았다. 다소 권태로움이 묻어나는 무표정한 얼굴. 그 또한 마법사였으나 그다지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끝없는 생각에 갇힌 듯 고요했다. 눈 밑이 어두운 걸 보니 간밤의 침입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이 마음에 걸려서 날도 밝지 않은 이른 시각, 이렇듯 다시 침입자를 찾은 걸까.

아인을 살피는 도베르의 시선에 궁금증이 스미던 그때, 두 사람의 걸음이 침입자가 묶여 있는 감옥 앞에 닿았다.

침입자는 스톤이 촘촘히 박힌 벽에 몸을 기댄 채 사슬에 붙들려 있었다.

도베르는 마나를 빨리는 기분이 뭔지 알지 못했지만 축 처진 남자의 모습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조금은 예측할 수 있었다.

푹 숙인 고개, 이마 위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다. 변함없이 파란 빛을 내며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구속구는 거머리처럼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그 푸른빛에 잠시간 시선이 빼앗겼던 아인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남자에게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자 힘없이 감긴 두 눈, 파리한 얼굴이 드러났다.

횃불이 유영하는 공간 속에서도 이마 위를 타고 흐른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검었다.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검은 속눈썹과 같이.

“이 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느냐, 도베르?”

“아뇨,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도베르는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을 내던 남자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에 얇은 턱선, 선이 곱지만 인상에 남는 선명한 이목구비. 묘하게 힐레인을 닮았다 생각했지만, 말을 아꼈다.

눈썰미 좋은 아인이 그 점을 그냥 지나쳤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른 체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저번처럼 황후가 보낸 자객일까요?”

이어질 말이 뭔지 알고 물은 질문이었지만 아인은 의외의 답을 꺼냈다.

“아니.”

“네? 그럼…….”

“이 자가 노린 건 내 목숨이 아니었다. 지난번과 목적이 다르니, 황후일 가능성은 작지.”

황후의 짓이라고 보기엔 두 자객의 접점이 없었다. 이 마법사는 저번의 자객들과 달리 자신의 목숨이 아닌 코어를 노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만일을 대비해 함정으로 파놓았던 가짜 코어를.

체르샤의 보석을 수거하지 못해 신경이 거슬리던 차, 아인은 미약하게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처음은 체르샤의 보석이었다.

이어서 서너 명의 보석이 추가되었을 때 아인은 행동에 나섰다.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맹세의 보석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아인은 기꺼이 덫을 놓았다. 번거롭긴 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쥐새끼가 발을 디딜 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아인은 자신의 덫에 갇힌 먹잇감을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 능력이면 함정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었을 텐데.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이유가 뭘까.

아인이 마법사의 턱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나온 마나가 나무줄기처럼 뻗어 나가 남자의 머릿속에 침투했다.

그 순간 꼭 감겨 있던 속눈썹이 스르르 올라가고, 탁해진 붉은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무슨 목적으로 내 궁에 침입했는지 말해.”

“…….”

“싫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든가.”

잔혹한 경고가 감옥을 서늘하게 울렸다. 아인은 꾹 다물어진 침입자의 입술을 보며 조소했다. 그래,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너덜너덜, 넝마처럼 해진 후에 답을 듣는 것도.

* * *

“선배.”

푸른 새벽빛이 번진 숲 사이로 도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아지트로 향하던 그가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네가 여긴 웬일이야? 아직 황자궁으로 안 돌아갔어?”

“으음……. 아직 시간은 괜찮아요, 그냥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불안감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도베르가 올 때까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 또 노력했는데.

도베르의 얼굴을 보자 꾹 눌렀던 감정이 조금씩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침착해보고자 숨을 내쉬었지만, 미약한 흐느낌이 뒤따랐다.

“너 왜 그래……? 응?”

“저는 괜찮아요, 밖에 오래 있어서 너무 추워서 그래. 그나저나…… 그 침입자를 가두고 오는 길이에요? 황태자궁에서 오는 것 같진 않은데…….”

“아, 침입자가 마법사라서 중앙 감옥에 가둬야 했어. 지금은 거기서 오는 길이고. 근데, 뭐가 궁금한데?”

“침입자는 어떻게 됐어요……?”

“배후를 밝히기 위해 신문 중에 있어.”

“신문…… 이라고요? 고문도 해요?”

“응. 그나저나 참 독해. 정신 고문을 견디는 걸 보면 황후 쪽에서 보낸 침입자 같은데 황자님은 황후와 관련이 없을 거라 하시고. 뭐, 차차 알게 되겠지. ……근데 그게 궁금해서 왔어?”

도베르가 참 궁금할 것도 없다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말에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다가 고개를 푸욱 숙였다. 도저히 지금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문이라니, 그것도 정신 고문? 정신 고문은 후에 풀려나더라도 후유증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간혹 미쳐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가가 욱신거렸다. 눈앞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후두둑, 눈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뿌옇게 변한 시야 속에서 제레미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온몸을 결박한 구속구가 마치 그를 박제된 나비처럼 옭아매고 있겠지. 손끝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그 순간 멀쩡히 두 발을 딛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미워졌다. 제레미를 지키겠다고 다짐해놓고 이렇게 또 무력하게, 그를 내어주고 말았다.

“힐레인?”

도베르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고개를 틀며 고집스럽게 얼굴을 숨겼다. 그러는 사이 북받친 울분이 떨리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우으…….”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감쌌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서러움에 젖은 울음이 스며 나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내 뺨을 감싼 도베르가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부지런히 눈물을 닦아내고 있음에도 다시금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그의 손바닥을 축축이 적셨다.

“정신 고문 그거 많이…… 아플까요. 흐윽.”

“침입자와 아는 사이야?”

엉엉 울음을 쏟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동생……?”

울다가도 귀를 의심할 엉뚱한 물음이었으나 설움에 북받친 상태라 제대로 된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자기 멋대로 짐작한 그가 호들갑을 떨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세상에. 동생 맞지? 예전부터 너 그림자 기사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했었다며. 그만두게 하려고 코어를 부수러 온 건가……? 맞지?”

“흐윽…… 아, 아니이…… 흑.”

탈진할 정도로 엉엉 울어대는데도 도베르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내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에 몸을 떨자, 잠시 들렀다 가라며 그가 나를 아지트 안으로 이끌었다.

잠시 후, 모포에 폭 둘러싸인 내 손에 따뜻한 우유가 손에 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레미는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을 텐데.

제레미에 대한 죄책감에 우유를 테이블에 올리고 모포를 걷어냈다. 그러자 도베르가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 몸 위에 모포를 둘러주었다.

“자기. 이러고 있으면 뭐가 나와? 얼른 기운 차려서 동생을 구하러 가야 할 거 아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이럴 땐 머리가 나쁜 게 얼마나 싫은지 몰라요.”

고개를 무릎에 묻으며 자책했다. 그러자 가만히 내 꼴을 보고만 있던 도베르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고개를 들게 했다.

“자기, 3년 전 야만인들한테 둘러싸였던 것 기억나?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던 때 눈사태를 일으켜서 퇴로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게 누구였어?”

“…….”

“마물이 사는 성으로 무혈입성했던 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얼마 전 모두가 질 거라 입 모아 말했던 재판에서 이겨 보였던 게 누구였지?”

“그건…… 운이 좋아서.”

도베르가 아니, 아니, 아니. 라고 말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롯불이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도베르의 눈동자가 한없이 따스한 빛을 머금었다.

“자기 머리가 똑똑해서 그래. 가끔 자잘한 실수들 때문에 다른 기사들이 허술하니 뭐니 말하지만. 그거 다 시기고 질투인 거 알지? 자기는 똑똑해, 기지도 좋고. 그러니 자기 자신을 믿으란 말이야, 응?”

“…….”

“이번에도 분명 네 특유의 기지로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 거야.”

내 특유의 기지라.

늘 장난스럽게 농담을 내뱉곤 하던 도베르의 입술이 오늘만큼은 신뢰를 담아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눈물이 멎어 있었다.

우유 한 모금을 삼키며 생각에 골똘하자, 잘하고 있다는 듯 머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 * *

동이 트기 전, 황자궁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잘할 수 있을 거라던 도베르의 격려가 무색해지게 제레미를 생각하자 자꾸만 초조해졌다. 수십 개의 계획이 머릿속에 들어찼다가 얼마 안 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때면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도베르가 쥐여준 모포에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생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큰 계획은 감옥을 습격해 제레미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준비 없이 홀로 들어가면 죄인이 추가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도베르의 말에 의하면 중앙 감옥, 특히 마법사를 가둬두는 감옥은 경계가 삼엄하여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었다간 몇 걸음도 못 가 잡힐 거라고.

[나도 도와주긴 할 테지만, 너랑 나 둘만으로는 부족해. 네 계획대로 교란작전을 펼친다 해도 최소한 열 명쯤 돼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중앙 감옥을 습격하는 사이, 인원의 반을 반대편에 풀어 교란 작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도베르의 조언대로 좀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많은 인원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기사들을 따돌려 감옥을 습격할 정도로 실력도 뛰어나야 할 텐데. 입이 무거운 믿을 만한 자들이어야 하고.

‘잠깐.’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을 나열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황후 폐하의 사람 중에 그런 자들이 있었지 않나?’

나는 황태자궁을 습격했던 황후의 자객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민첩한 움직임을 보였고, 붙잡히자마자 자결하는 등의 곧은 충성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힘을 실어준다면 황자님을 구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황후 폐하께 부탁해볼까.’

황후는 카렌을 도와준 보답으로 훗날 위험한 일이 생기거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까지 도움을 줄지는 의문이었다.

카렌의 안전이 최선인 사람이 이런 위험에 발 벗고 나서줄까. 이내 고갤 저었다.

체르샤에게 그랬듯 이득이다 싶으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린다. 함께 침몰할지도 모를 통통배에 의리 하나로 오를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황자님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르는데.

부탁할 수 없다면 강제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었다. 황후가 나를 도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흐릿하게 방법을 떠올리는 사이 어느덧 창문으로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둠이 지나갔음을 알리듯, 스며든 햇살이 방 안을 훤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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