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미행
루와 헤어진 다음 날, 나는 제레미와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요즘 제레미는 아침 식사 후에 사라져 늦은 밤에야 돌아왔기에 그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지금밖에 없었다.
도베르의 일에 대해 어떻게 물어 봐야 할까. 묻는다고 그가 사실대로 얘기해주긴 할까. 속으로 치열하게 갈등하다 그가 나이프를 내려놓는 순간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황자님, 할 얘기가…….”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제레미가 내 접시와 자신의 접시를 바꿔주었다.
얼떨결에 아래를 내려다보자 한입 크기로 작게 썰린 스테이크가 보였다.
“고, 고맙습니다.”
“뭘.”
제레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예쁜 눈이 초승달처럼 휘고, 창가에 스며든 햇볕 한 줄기가 은빛 속눈썹에 닿아 잘게 부서졌다.
“…….”
잠시간 넋을 빼고 바라보다 이내 고갤 흔들었다. 질문을 해야 하는데 홀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황…….”
“이거 먹어 볼래?”
입을 떼려는 찰나 그가 이번엔 구운 방울 토마토를 건넸다. 이 정도면 일부러 내 말을 막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은 주는 거니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토마토를 입 안에 넣었다. 입을 우물거리자 그가 잘했다는 듯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저렇게 예쁘게 웃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재빠르게 토마토를 삼킨 후 다시 질문을 꺼냈다. 이번엔 그 어떤 방해에도 넘어가지 않겠단 결의를 담아.
“황자님, 할 얘기가 있어요.”
내 비장함을 읽은 것인지 제레미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입가를 매만졌다.
“뭔데?”
“혹시…… 도베르 경과 만난 적 있으세요?”
제레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분명 당황한 듯 보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혹시 보석 때문에 도베르를 조사한 건 아니시죠?”
“이미 다 알고서 물어보는 거 아냐?”
“……! 진짜예요?”
제레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잔잔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황자님!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세요? 대체 뭘 계획 중인 거예요?”
그 후 나는 내내 제레미를 추궁했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때마다 여우처럼 대답을 피해갔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 입에 쏙 넣어 주는가 하면, 곤란한 질문엔 대답 대신 예쁜 미소로 혼을 빼놓았다.
그러다 내가 그의 눈부신 미소에 멍해지기라도 할라치면 볼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기가 아주 선수급이었다.
“황자님……!”
결국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의 진실도 얻어내지 못했다. 나는 그를 원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가 소매를 꽉 붙든 내 손등을 부드럽게 도닥거렸다.
“나중에, 나중에 다 얘기해 줄게.”
내게 털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는 건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제레미가 위험 속을 거니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미행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어쩔 수 없나.
* * *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제레미가 움직일 때를 기다렸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제레미의 계획을 밝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레미 쪽에서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 위로 제레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자고 있는지 확인을 하는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밤 외출이 잦아진 제레미의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자 잠시 후 제레미가 몸을 일으켰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재빨리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 던졌다. 잠옷 아래엔 레틴이 입을 법한 셔츠와 바지를 착용한 상태였다.
‘황자님이 뭘 계획 중이신지 오늘은 꼭 알아야겠어.’
루가 일러줬던 대로 반지에 반대편 손을 올렸다. 잠시 후 헐렁했던 옷 안으로 골격이 알맞게 차오르고, 허리까지 덮고 있던 긴 머리카락이 짧아졌다.
과연 반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하늘색의 삐친 머리카락, 치켜 올라간 시원스러운 눈매. 거울 앞에 선 사람은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완벽한 레틴이었다.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곧장 문을 열고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제레미의 기척이 느껴졌다.
‘위층인가?’
기척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황자궁의 5층이었다. 벽 안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나는 저번에 우연히 발견했던 비밀 공간을 떠올렸다.
‘여길 이렇게 눌렀던가.’
벽에 손을 대자 잠시 후 비밀의 공간으로 통하는 통로가 드러났다. 좁은 통로 곳곳에 문이 있었고, 유일하게 복도 끝의 문에서만 불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긴장감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잠시 후, 촛불이 이루는 따뜻한 불빛 아래로 비밀 서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가셨지?’
불이 켜져 있기에 이곳으로 들어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레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 넓지는 않은 공간. 그러나 층고가 높은 탓인지 확장감이 있었다. 높다란 벽에 빼곡히 꽂힌 책들이 공간을 더 웅장하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비밀 공간이라 조금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반 서재처럼 보이는 그곳은 단정하고 안락했다. 그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이.
얼마간 주변을 둘러보다 제레미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과 서류, 제레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은빛의 안경. 그리고 그 옆엔 조그만 유리병이 있었다.
약이 들어 있는데? 의아함을 느끼며 약병을 살펴보았다. 여러 개의 알약이 가득 들어찬 약병엔 어떠한 설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평소에 그가 약을 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약일까. 단순한 상비약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때, 갑작스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았다. 촛불이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따스한 빛을 품은 은발이 보였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커다래지고, 레틴으로 변한 내 모습 위로 시선이 닿았다.
날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변신은 완벽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 시간엔 웬일이야?”
다행히 아직까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건을 두고 간 것 같아 다시 들렸습니다. 황자님께서는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하던 일도마저 해야 하고. 약도 먹어야 하고.”
제레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바라보았다.
“또 말릴 셈이야?”
“……?”
그제야 손에 약병을 들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당황하여 책상 위에 올려두자 제레미가 가까이 다가와 약병을 손에 쥐었다. 약을 바라보는 시선에 미약한 피곤함이 서렸다.
“제약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만 먹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예.”
이상하게 볼까 봐 얼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반은 알아듣지 못한 상태였다. 제약? 완전히 풀릴 때까지?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그게 뭐냐고 묻을 수는 없었다. 레틴은 이 약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서 뭐냐고 묻는 건 레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테니.
나는 제레미가 약을 넣어 두는 곳을 유심히 봐두었다. 이따가 몰래 와서 약을 한 알 빼돌리기 위해.
“그래서 두고 간 물건은 찾았어?”
“예? 아…….”
책상에서 퍼뜩 시선을 떼고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밤이 늦었으니, 가서 쉬도록 해.”
아, 이제 나가보라는 뜻인가? 하지만 지금 나가기는 너무 아쉬운데. 이대로 제레미의 계획도 알아내지도 못한 채 물러서야 하는 걸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황자님, 근데…… 요즘 하시는 일 말입니다.”
“응? 뭘?”
되묻는 그를 보며 잠시간 고민했다. 이대로 계속 두루뭉술하게 얘기했다간 원하는 걸 알아내지도 못한 채 쫓겨나게 될 테고.
들킬 위험이 있긴 하나 지금이 낚싯줄을 던질 타이밍이었다.
“황자비님의 보석이요. 어디까지 일이 진척되었죠?”
과연 제레미가 미끼를 물어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표정을 살폈다. 잠시 후 제레미가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반대하던 거 아니었어?”
역시. 맹세의 보석 때문에 매일 밤 밖으로 나가는 거였어. 그나저나 레틴도 반대할 만큼 위험한 일을 벌인 걸까?
생각 같아선 버럭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살짝 입술을 깨문 나는 최선을 다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황자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제가 알고는 있어야죠. 그래야 돕든 말리든 할 거 아니에요.”
대충 레틴이 할 법한 말로 얼버무린 거였는데. 오히려 제레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를 수상쩍게 바라보던 제레미가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주춤 물러섰지만, 뒤가 벽이라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벽과 제레미 사이에 갇힌 채로 나는 미세하게 시선을 떨었다.
제레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눈을 응시했다. 초승달처럼 어여쁜 미소가 입가에 걸리고, 재밌다는 듯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뭘 도와달라고 할 줄 알고?”
제레미가 손끝으로 내 턱선을 쓸었다. 다른 한 손은 벽을 지지한 내 손등을 겹친 채.
턱을 간질이는 관능적인 손길. 색기 어린 촉촉한 눈빛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입술이 떨리는 걸 지켜보던 제레미가 천천히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미세한 숨결이 솜털을 건드리고, 촉촉한 입술이 귀를 야금야금 물었다.
“……!”
몸이 쭈뼛해질 정도로 간지러운 감촉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렸다.
고개를 틀어 귀를 물지 못하게 하자 그가 고요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청아한 눈동자, 천사같이 무구한 얼굴.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는 악마의 유혹보다도 더 달콤하고 관능적이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이제 알겠어?”
손목을 따라 올라온 손이 팔의 가장 여린 살을 건드렸다. 내가 몸을 움찔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값비싼 도자기를 다루듯 느릿느릿 올라온 손이 쇄골을, 그리고 도톰한 입술을 건드렸다.
황자님이 레틴과 이런 스킨십을 할 사람은 아닌데. 나란 걸 눈치챈 걸까?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자 제레미가 쿡쿡, 짧은 웃음을 흘렸다.
“얼굴이 달라져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너란 걸 알겠어, 힐레인.”
색기 어린 시선에 짙은 장난기가 피어올라 있었다.
“인제 그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줘. 레틴의 모습이라 뭘 할 수가 없네.”
대, 대체 뭘 하려고? 침을 꼴깍 삼키며 반지를 건드렸다.
절대 뭔가를 기대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어차피 들킨 거 더 이상 이 모습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뭣보다도 레틴의 모습으로 제레미와 밀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잠시 후 폴리모프 상태를 풀자 점차 키가 줄어들고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머리카락과 헐렁해진 옷을 정리하는데, 문득 내 몸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몹시 크게 느껴져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커졌다가 작아진 탓일까. 제레미에 비하니 내 체구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레미가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나는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묘한 어색함을 느끼며 고개를 내리는데 제레미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받쳐 올렸다.
그는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가 느른한 포식자처럼 눈을 빛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맹수에게 붙들린 토끼가 바로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