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은빛 새
“어떨 땐 또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손에 쥐고 싶기도 하고.”
아인의 손끝이 내 턱을 받쳤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세세히 살펴보듯, 내리깔린 금안이 내 얼굴 위를 느릿느릿 훑었다.
“이게 다 어제의 일 때문인가? 그것도 그것대로 우습군. 고작 어제의 그 일 하나로 이런 변덕이 들다니.”
“…….”
“너는 그 자객에게 감사해야겠구나.”
아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변덕? 자객에게 감사? 어째 자객을 막은 일로 나를 다시 신임해 주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나는 아인의 변덕을 덥석 물었다.
“그 말씀은 배신자 낙인을 지워주겠단 말인가요? 저 이대로 황자비 임무를 계속해도 되는 거죠?”
아인이 변덕을 부린 이 틈을 노려야 했다. 봇물 터진 듯 다양한 요구 사항을 쏟아냈다.
“대신관에게 확인받는 것도 그럼……?”
“그건 네가 알아서 처리하려무나.”
치, 치사해! 미간을 와락 구기자 아인의 미간도 덩달아 좁아졌다.
“이것저것 저질러 놓고, 바라는 것도 많구나.”
그건 그렇지……? 아인이 말을 바꿀세라 곧바로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황태자님! 복 받으세요!”
환하게 웃으며 아부를 떨자, 아인의 시선이 재잘거리는 내 입술 위로 닿았다.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것도 어릴 때랑 똑같구나.”
잠시간 입술 위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느릿느릿 올라와 이번엔 눈가에 닿았다. 지난번처럼 진실을 가늠하기 위해 쳐다보는 것 같진 않았다. 비뚜름한 미소가 입꼬리에 걸려 있는 걸 보면.
어둠이 배제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내 고민했던 일이 해결된 탓일까?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아인을 따라 덩달아 미소지었다.
“헤헤.”
그런데 그때였다. 황태자궁의 후원으로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그것을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아인의 시선 또한 기척이 느껴진 곳에 닿아 있었다.
뭐지? 또 자객인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니.”
아인이 나를 붙들어 세웠다. 그는 마나스톤을 사용해 작은 돌풍을 일으켰고, 잠시 후 기척이 느껴졌던 곳을 돌풍이 쓸고 지나갔다.
독기를 머금은 바람에 잠시 후 새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하지만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아인의 정원 한가운데 추락하고 말았다.
“새였나 봐요.”
“…….”
아인은 대답 없이 추락한 새를 응시했다.
독기에 당한 걸까. 은빛 날개가 애처롭게 떨렸다.
* * *
표본이 될 만한 자를 찾아 나섰던 제레미는 황태자의 후원에서 뜻밖에도 힐레인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흐드러진 봄꽃과 포근히 내려앉은 햇볕 사이로 힐레인과 아인이 있었다. 그들만의 낙원을 차려놓은 듯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에, 제레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힐레인은 어떤 표정으로 그를 마주할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힐레인을 응시하던 제레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인에게 뭔가를 열심히 물어보고 있었다. 어젯밤. 제 앞에서 진실을 내어놓기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던 것과는 확연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제레미의 눈동자에 어둠이 스몄다.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배처럼 차근차근 절망을 곱씹었다.
그런데 그때, 힐레인의 얼굴 위로 말간 미소가 피어올랐다. 차갑게 얼어붙은 만년설마저도 녹여버릴, 환하고 따스한 미소가.
제레미는 다급히 아인의 얼굴을 살폈다. 채 막아볼 틈도 없이 지독히도 무감정한 남자의 얼굴 위로 인간적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한층 부드러워진 아인의 시선이 힐레인의 붉은 눈동자를 깊게 옭아맸다.
‘황태자. 부디 그 마음을 알아채지 마.’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감정의 변화. 제레미는 그런 아인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레미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마나가 스며 나왔다.
아인과 힐레인이 서로에게서 눈을 떼고 제레미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얽혀든 두 사람의 감정을 잠시나마 끊어놓았다는 비겁한 희열이 머릿속을 덮쳤다.
독기를 머금은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오고. 제레미는 그것이 자신의 몸에 닿기 전 모습을 감췄다.
* * *
황자궁으로 돌아온 제레미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러려고 황태자궁에 갔던 건 아니었는데. 빈손으로 돌아온 건 물론이고, 마법으로 두 사람의 시선을 끌기까지 해버렸다.
다분히 이성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결과적으로 들키지는 않았지만 아인이라면 침입자의 흔적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터져 나오려는 질투심을 잠재우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드는 그 순간이 떠오르는데……. 미칠 것 같았다.
힐레인을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어졌다. 비틀린 마음이 커질수록 집착은 커지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졌다.
황후의 보관을 탐했던 트릭샤처럼. 타인의 것을 가로채고 소유하려 했던 제 어미의 피를 똑 빼닮은 것인지도 모르지.
똑똑-.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베르킨이 들어오고,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제레미에게로 다가왔다.
“황자님?”
베르킨은 놀란 눈치였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 백치 연기를 하지 않는 제레미를 봤을 때보다도 지금의 모습이 더 놀라웠다.
항상 곧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던 황자님이 왜……. 혹여나 술을 마신 건가 하고 주변을 둘러 봤지만, 탁자 위는 깨끗했다.
“……왜?”
제레미가 눈가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얼굴에서 손을 치운 제레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베르킨은 실례를 무릅쓰고 제레미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체크했다.
뜨거울 거라 생각했던 이마는 몹시 차가웠다. 내내 밖에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난롯불에 장작을 좀 더 밀어 넣고 온 베르킨이 머뭇머뭇 보고를 올렸다.
“황자님. 루 대공의 알현 요청이 있었습니다.”
“…….”
제레미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좀처럼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분인데. 베르킨은 의아함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기민하게 살폈다.
“어떻게 할까요?”
“……거절해 주겠어?”
제레미는 대번에 루의 알현을 거절했다. 보나 마나 힐레인을 보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일 터. 괜한 추문에 휩싸일 수 있으니 황자비가 아닌 자신에게 알현을 요청한 게 분명했다.
그간의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하니…… 보통 때라면 알현을 허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아니었다.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연적을 끌어들인다니. 달갑지 않았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레틴 경께서 꼭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신 건데…….”
베르킨이 잠시간 말하기를 주저하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약병이었다.
새로 바뀐 약인가. 제레미는 오후에 약을 전달해주겠다던 레틴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무방비하게 전달할 사람이 아닌데…….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베르킨이 더듬더듬 죄를 실토했다.
“죄송합니다. 원래는 상자에 담아 주신 거였는데 실수로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내용물이 괜찮은지 확인만 하려다가 그만…….”
“……괜찮아. 이리로 줘.”
베르킨은 믿을 만한 자이니 그가 본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입이 무거우니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할 자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걱정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황자님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제레미는 단순한 두통약일 뿐이라 말하며 그만 나가봐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르킨은 두통약이 아닐 거라 확신했다. 그런 거라면 상자에 넣어 비밀스럽게 전달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계속 추궁한다 한들 제레미가 쉽게 말해줄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린 베르킨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제레미 쪽을 돌아보았다.
‘황자비님께라도 말씀드려 봐야 하나.’
하지만 그런 베르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한 방 안으로 제레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베르킨. 약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으면 해. 특히 황자비에겐 더더욱.”
“……!”
화들짝 놀라는 베르킨을 보며 제레미는 미리 경고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실까 봐 그러십니까?”
“글쎄…….”
걱정, 걱정이라. 힐레인의 걱정은 말만 들어도 가슴 한쪽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살면서 그런 날이 오긴 할까. 힐레인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날이.
제레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 큰 바람은 감히 품지 않기로 했다. 자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사랑에 보답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종종 오늘과 같은 비뚤어진 집착과 소유욕에 시달리고 말겠지만…… 그래도 지금 힐레인의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니까. 어쩌면 어제와 같은 행운을 취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제레미는 수줍게 볼을 붉히던 힐레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좋아하는 거라 말했을 때 그녀는 몹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부정은 하지 않았다.
몸만 좋은 거라 해도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렇게라도 힐레인에게 닿을 수 있는 게 어디야. 몸 정이라는 것도 무시 못 하는 거잖아?
제레미는 새삼 거울을 들여다 보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경국지색이라 불렸던 트릭샤를 빼닮은 탓에, 저가 봐도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한때는 참 싫다고 생각했지만 힐레인이 예뻐하는 모습이니 제법 정이 갔다.
제레미는 못난 질투를 지워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곧 힐레인이 올 시간이었다.
웃으며, 다정히 맞아주어야지.
붓꽃 같은 눈동자가 휘어지며 고운 호선을 그렸다. 청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맑은 미소가 천사보다도 아름다웠다.
* * *
며칠 후. 연이어 제레미로부터 매몰찬 거절을 받은 루는 황당해하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 허허.”
제레미를 폴리모프 시켜 힐레인의 곁에 머물게 해준 사람이 누군데? 곤경에 처할 뻔했을 때 구해준 게 누군데?
기가 막혔다. 연적과 당당히 승부하자 마음먹었던 게 후회가 됐다. 이 여우 황자는 착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엉덩이에 꼬리가 9개 달린 불여시라는 걸 이제야 깨닫다니.
‘흥, 이러면 제가 못 갈 줄 알았나 보죠.’
생각 같아선 힐레인에게 바로 알현 요청을 넣고 싶었으나 괜한 추문에 휩싸이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바람둥이 이미지가 있는 자신이 갓 결혼한 힐레인을 찾는 것은 사교계에 좋은 가십거리가 될 터이니.
하지만 황궁으로 들어갈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기다리시죠, 괘씸한 연적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