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부작용
제레미의 키스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구름이 낀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먹잇감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포식자였고, 나는 능란한 그의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체력엔 꽤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주는 쾌락 앞에선 무소용이었다. 자꾸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열병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뜨거워졌다.
“하…….”
그가 잠깐 입술을 뗀 사이, 나는 겨우겨우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잘했다는 듯 제레미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게 올라간 입술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연분홍의 입술 색은 무서울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자 제레미가 웃으며 다시 입을 마주쳤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가 뜨겁게 터져 나온 숨을 야금야금 베어먹는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열락에 정신이 몽롱해질 무렵, 제레미의 손이 셔츠의 단추를 건드렸다.
“……!”
이미 명치까지 열려 있던 탓에, 더 이상 셔츠를 끌렀다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제레미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자 내리깔린 은빛의 속눈썹이 들어 올려지고, 그 아래 자리한 연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눈빛이 거칠었다.
“……안 돼?”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슬 맺힌 붓꽃 같은 눈동자, 촉촉이 젖어 든 연분홍빛 입술. 열감에 물든 복숭앗빛 뺨까지. 어느 것 하나 야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당연히…….”
말끝을 흐리자 제레미의 눈동자 가득 기대감이 차올랐다. 끝까지 말을 기다리지 못한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추다 목덜미에 쪽쪽 소리가 나게 키스했다.
“당연히…… 아니, 아하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아핫.”
“……?”
동작을 멈추고 제레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한 마디에 자신의 세상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까 봐 불안한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
“미안해요……. 안 된다는 말이었어요.”
“…….”
제레미가 굳은 채 나를 응시했다.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꼭 대리석 조각을 마주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솔직히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내 질문을 슬쩍 넘어가려고 한 데 대한 벌이랄까.
‘그나저나 아까 그 검은 마나는 뭐였을까, 황자님은 왜 내게 그걸 숨기려고 하시지.’
눈을 가늘게 뜨며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힐레인?”
“아까 그 검은 힘 말이에요.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죠?”
“음, 괜찮아. 또 키스하면 되니까.”
제레미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우 같은 눈빛이 얄미운데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제가 그러면 좋아서 넘어갈 줄 알았어요?”
“나는 신부가 제레미 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
이대로 핑크빛 무드는 끝난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말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장난이 섞인, 하지만 제법 정곡을 찌른 말에 나는 코피가 흐를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왜, 왜 그런 생각을……!”
“야한 꿈을 꿨다면서 제레미 몸을 마구 더듬은 적도 있었고.”
“……!”
“같이 씻자고 말한 적도 있었고.”
“그, 그건 말실수!”
“저런 잠옷도 준비하고.”
제레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개어져 있는 잠옷 위에 닿았다. 레이스가 너무 훤히 비쳐서 센에게 도로 돌려주었던 잠옷이었다. 그때 분명 센이 치우겠다고 했는데 저게 왜 저기 있는 거야……?
“방에 떨어져 있는 걸 내가 주웠어.”
“……!”
오, 센.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어?
잘 생각해보니 실수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센의 야심찬 계획의 일부일지도!
“그, 그건 센이…… 부부 사이를 돈독하게 해주고 싶다면서 사 온 잠옷이에요…….”
“아아, 그래서 요즘 잠옷 스타일이 달라진 거구나.”
제레미의 시선이 슬쩍 내 셔츠에 닿았다. 여전히 단추 몇 개가 풀린 채 흐트러져 있는 차림새를.
“내 눈엔 뭘 입든 야해 보이지만.”
“……!”
제레미의 야살스런 눈빛이 셔츠 사이로 드러난 뽀얀 배 위로 닿았다. 화들짝 놀라 단추를 여몄지만, 손에 땀이 밴 탓에 쉽지가 않았다.
내가 몇 번 헛짓하는 동안, 제레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내 단추 위에 닿았다. 그는 단정한 손길로 단추를 꼼꼼히 여며주었다.
방금 전까지의 여우처럼 야살스러운 모습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단추를 모두 여며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내 옆에 누우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자요?”
이불 밖으로 손을 빼 그의 어깨를 콕 찔렀다. 그러자 제레미가 이불을 몸에 두르며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힐레인은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를 거야.”
“괴, 괴로워요?”
“그럼. 매일 밤 예쁜 신부를 옆에 두고서 독수공방을 해야 하거든.”
제레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진득하게 밴 고혹적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죄, 죄송해요?”
당황해서 말꼬리를 올리자 우수꽝스러운 물음이 되고 말았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괜찮아, 제레미는 조신한 남편이니까.”
“……!”
“아내가 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제레미의 손이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가만히 내 손을 그러쥐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청아한 연보랏빛 눈동자가 휘어지며 예쁜 곡선을 그려냈다.
밤의 여우처럼 야시시하다가도, 이럴 때 보면 한없이 청순해 보였다. 남편의 유혹은 오늘도 내 혼을 쏙 빼어놓은 것 같았다.
* * *
다음날 센은 목덜미에 난 울긋불긋한 자국을 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거 봐요, 황자비님! 제가 성공할 거라고 했죠? 오호호.”
“그게……!”
창피한 마음에 그게 아니라고 반박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라고 하면 나를 더 괴롭힐지 몰라. 이상한 잠옷에, 책에. 또 뭘 들고 올지 모르지.
말을 하지 않고 내내 고개만 숙이고 있자 센의 표정이 더 환해졌다. 곧 아기님의 탄생을 기대해도 되겠다면서 웃고 난리가 났다.
혹여나 시녀들의 입을 타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나는 센에게 당부, 또 당부했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겠지?”
“예, 알겠어요. 부끄럼이 많으시니 꼭 비밀로 해드릴게요. 오호호.”
센은 은근히 입이 무거운 편이니 비밀을 지켜줄 것 같았다. 다만 콧대가 하늘 위에 치솟은 듯한 저 웃음만큼은 당분간 나도 어쩌지는 못할 것 같았다.
‘뭐…… 센의 계획이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는 있으니까…….’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었다. 피부의 열감 탓인지 제레미가 남긴 자국이 유난히도 붉게 느껴졌다.
‘또 키스를 하게 되다니. 이래도 되나?’
침을 꼴깍 삼키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서로의 숨을 베어먹던 농밀한 키스, 옆구리를 스쳐 명치까지 올라온 제레미의 손가락. 야하게 얽혀든 시선.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나 제레미에게 완전 졌잖아?’
검은 마나에 대해 물어보려 했는데 키스 때문에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다시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역시 혼자서 알아보는 수밖엔 없나.
‘치사해, 나는 맹세의 보석에 대해 다 털어놨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내어준 정보는 많은데 얻어낸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패.
‘맹세의 보석은 괜히 이야기했어.’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손으로 명치 부근을 쓸었다. 보석을 반드시 없애 주겠다고 말했던 제레미의 말이 걸렸다.
‘설마 맹세의 보석 때문에 무리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시겠지……?’
* * *
그 시각, 제레미는 비밀 서재 안에 있었다. 실험 도구와 책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는 책상, 그 가운데 푸른 마나에 갇힌 보석이 있었다. 잠시 후 마나가 걷히고 죽음의 색을 머금은 초록색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실패인가.’
보석에 걸려 있는 마법을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들다니.
아인이 덧씌운 마법 대부분이 이 세상에 없는 완전한 새로운 마법이었다. 마법을 새로 만드는 것도 몇 년에 걸친 어려운 일이었지만, 파훼법을 알아내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표본이 너무 없었다. 그가 가진 건 죽은 보석이 전부. 이것 하나만으로 실험했다간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 사이 힐레인이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표본을 더 모아와야겠어.’
제레미의 시선이 맹세의 보석 위로 닿았다. 아인은 분명 모든 그림자 기사들에게 이 보석을 심었을 게 틀림없다.
황태자궁에 차고 넘치는 게 그림자 기사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기절시켰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보내주면 되겠지.
그렇게 결심하고 이제 막 서재를 나서려던 그때였다. 문을 열고 레틴이 들어왔다. 다급히 온 것인지 얼굴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황자님, 분부하셨던 대로 약에 대해 다시 알아보고 오는 길입니다.”
제레미는 검은 마나에 의문을 품고 레틴에게 알아보길 부탁했다.
어젯밤, 분노의 감정과 함께 새어 나온 검은 마나는 분명 약의 부작용이었다.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부작용이 없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약을 복용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부작용이 나타났다.
“얘기해주신 검은 마나에 대해 물어봤더니, 상인이 말하길 황자님께서 혹시 일전에 흑마법을 손 댄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흑마법? 제레미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으로 웬만한 건 다 이룰 수 있는데, 굳이 흑마법을 건드릴 리가.
“상인의 말로는 내재 되어 있던 흑마법의 힘이 약에 의해 깨어난 거라 하던데요. 오직 흑마법을 사용했던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합니다.”
“……이상하군. 나는 흑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상인이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흑마법 계열의 약을 먹으면 종종, 일전에 사용했던 검은 마나가 깨어나기도 하니까.
자신의 경우는 흑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어 해당 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기에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해결책은?”
“흑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으면 다른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만들어 놓겠다고 하더군요. 늦어도 오늘 오후까지는 완성해두겠다 했습니다.”
제레미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틴은 그런 제레미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힐레인에 관해서는 조그만 것도 전전긍긍이면서, 본인의 일에는 어찌 저리 무심하신 것인지.
* * *
늦은 아침, 목욕을 마친 아인은 시종들을 물렸다. 자객을 심문하느라 잠을 설친 탓에 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아인은 무기력한 몸을 창가에 기대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물기 어린 금발 위로 내려앉고.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하얀 셔츠에 물 얼룩을 남겼다.
번져 드는 물기를 보며 아인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불현듯 힐레인의 옆구리에 번지던 핏자국이 머릿속을 스쳤다.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있던 아인이 팔걸이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게 무어라고.
이내 손에 힘을 풀었지만 불쾌한 감정은 여전했다.
힐레인은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와도 같은 존재였다. 작고 하찮지만 호수의 전면을 흔드는 파문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녀석이 고요한 수면 위를 건드릴 때마다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이렇게 신경 쓰일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들이는 게 아닌 것을.
아인은 힐레인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