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맹세의 보석을 들키다
황태자궁에서 빠져나와 황자궁의 담을 넘을 무렵, 옆구리에서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임시로 상처에 천으로 묶어둔 상태였는데 이동하며 벌어진 것인지 천이 붉게 변한 게 보였다.
나는 고통을 꾹 참으며 테라스 난간을 잡았다.
‘조금만 더 가면…….’
하지만 난간을 넘어서는 순간 겨우 붙들고 있던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지기 직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감쌌다.
잠시 후 단단한 가슴의 촉감이 느껴지고,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나에 물들어 새파란 빛을 띠는 제레미의 눈동자가 보였다.
“황자님…….”
제레미는 침대로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고집스럽게 앞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냉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나를 침대 위로 눕힌 제레미가 상처 부위의 셔츠를 걷어냈다. 손길이 미세하게 떨리고 곧이어 옆구리를 가로지른 기다란 자상이 드러났다.
“…….”
제레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무언가를 인내하듯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죄송해요.”
“죄송하다니. 네가 왜 내게 사과를 해.”
“하지만…….”
제레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미안해할수록 그는 차츰차츰 무너져갔다.
“다친 건 넌데. 항상 모든 괴로움을 도맡고 있는 게 넌데……. 미안한 건 나야.”
제레미가 시선을 피한 채 치료마법을 시전해 주었다. 자상의 크기가 점차 줄어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흉터조차 남지 않고 아물었다.
상처 부위가 깨끗해지자 제레미가 단정한 손길로 옷을 정리해주었다. 피부에 맞닿은 손 온도만큼, 눈길이 뜨거웠다.
“상처는 왜 입은 거야. 그가 이랬어?”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열심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힐레인. 내가 황태자의 기사를 그만두라고 말해도. 너는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이지?”
“……네.”
“혹시…… 그만둘 수 없는 이유에 이것도 포함돼?”
제레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초록빛의 보석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크기 빛깔. 모를 리 없다. 탁한 검은 빛으로 물든 그것은 그림자 기사의 죽음을 머금고 있는 맹세의 보석이었다.
착용자의 눈 색깔을 따른다는 걸 감안해 봤을 때, 보석의 주인은 아마도 초록색 눈을 가진 사람. 나는 어렵지 않게 체르샤를 떠올렸다.
“이게 왜 황자님께 있는 거예요?”
제레미는 맹세의 보석을 어떤 경위로 손에 넣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 갈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네게도 있어?”
“……!”
제레미의 물음에 그만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뒤늦게 표정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이미 그는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것도 말해주지 않을 셈이야……?”
“황자님…….”
“내가 미덥지 못해서 그래?”
내리깐 시선에 잔잔한 슬픔이 모여들었다. 믿음을 얻지 못해 내게 서운함을 느끼는 게 아닌, 믿음을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가득 묻어나왔다. 제레미는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다급히 제레미를 붙들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처 입은 가여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 몸을 뒤로하자 그가 그러지 못하도록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게 아니면 보여줘. 보석을.”
그의 단호한 눈빛이 나를 옭아맸다. 아름다운 얼굴이 굳어지며 잔잔한 어둠이 내리깔렸다.
“…….”
그늘이 드리운 제레미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더 이상 거부했다간 제레미가 깊게 상처받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보여……드릴게요.”
느릿느릿 셔츠의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풀어나갔다.
단추를 세 개 정도 끄르자, 맹세의 보석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훤히 드러난 허리, 피부를 에워싼 차가운 공기, 세밀하게 내리꽂힌 제레미의 시선.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알지만 창피했다.
나는 명치에 닿은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열기를 주저했다. 보일 듯 말 듯, 애가 탄 것인지 제레미가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톡-.
작은 동작에 단추가 풀어졌다. 셔츠가 옆으로 벌어지며 곧이어 붉은색을 띤 맹세의 보석이 드러났다. 얼마간 보석을 바라보던 제레미가 손끝으로 맹세의 보석을 쓸었다.
“……!”
간지러운 감각에 움찔 놀라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붉은색 보석을 담고 있는 연보랏빛 눈동자에 기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만지면, 아파?”
제레미가 떨리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만 살짝 저었다.
“아인이 이걸 심은 이유가…… 뭐야.”
“그분은 눈에 보이는 충성심을 원하시니까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지만 제레미는 숨은 뜻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잘게 흔들리는 시선 속에 고요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명을 거역하면…… 체르샤처럼 목숨을 잃게 되는 거야?”
“…….”
대답을 주저했다. 무언 속에 담긴 긍정을 읽은 그의 얼굴에 두려움과 공포가 물들기 시작했다.
언제 어느 때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제레미가 맹세의 보석을 부숴버릴 듯 노려보았다.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어?”
“……그런 방법은 없어요. 억지로 제거했다간 저도 죽을 테니…….”
“그럼 아인이 죽으면 돼?”
내리깐 속눈썹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은빛의 잔광 뒤로 숨은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머금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주변에서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상시 보이던 마나와는 성질이 달라 보였다. 원래의 마나가 맑고 푸른 빛을 가졌다면, 지금은 퇴색된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 깃든 불길한 기운에,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황자님.”
손등을 미약하게 흔들자 탁해진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다 무의미해. 살려둘 이유가 없어.”
탁해진 눈동자에 일순간 살기가 깃들었다. 아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집어 삼키겠다는 듯 매서운 광기가 휘몰아쳤다. 꼭 시체의 산 위에 선 폭군을 보는 듯했다.
“황자님 그런 말씀은 마세요…….”
낯선 그의 모습에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나는 어깨를 미약하게 떨며 제레미의 옷깃을 꼭 붙들었다.
떨고 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제레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인간적인 감정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는 매마른 눈을 보며 몸을 굳혔다.
그런데 그때, 제레미의 주변으로 한 층 더 짙고 농밀한 마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일렁이는 모양새는 닿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만 같았다.
“윽!”
이를 증명하듯 제레미의 옷깃을 붙든 손에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이 점차 거세졌지만 나는 그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놓는 순간 검은 빛에 완전히 침식당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 둬서는 안 돼.’
용기를 내 제레미를 품에 끌어안았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온몸 곳곳을 누볐지만 그를 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허리를 꽉 붙든 채 이름을 불렀다.
“제레미.”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부름에 마나가 한풀 꺾인 모습을 보였단 것이었다. 그에 힘입어 나는 그를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들바들 떨며 제레미의 등을 다독였다.
“나 무서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레미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까 봐.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줘봤지만 이내 시야가 흐려졌다.
“흐윽.”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제레미의 어깨를 적셨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툭툭 떨구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을 감쌌던 마나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검은빛이 갈무리되고, 그와 나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가만히 안겨 있던 제레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맞닿은 그의 몸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미안해.”
원래의 제레미로 돌아온 걸까?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기를 머금었던 마나가 걷히고, 연보랏빛 눈동자가 본래의 빛을 머금었다. 어느새 그는 잔잔하고 고요한, 내가 알던 제레미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내 눈물을 훑었다.
“울지 마, 힐레인.”
“노, 놀랐잖아요.”
“……미안해, 미안해. 힐레인.”
“갑자기 왜 그런 거예요? 이, 이상한 힘이 스며든 것처럼.”
“…….”
내 물음에 제레미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말해줘요.”
눈물을 훔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시금 차오른 눈물이 뺨을 적시고, 눈물을 따라 내려가던 제레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말 안 해줄……?”
불현듯 제레미가 가까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제레미를 올려다보았다. 곤란한 상황을 이렇게 모면하려나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또다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제레미의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아…….”
내 눈물을 모두 삼켜버릴 듯, 입맞춤이 이어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에, 붉어진 눈가에, 그리고 눈물이 고인 귀까지.
“아깐 미안했어. 다신 안 그럴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보석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없애 줄 테니.”
“이렇게 슬쩍 넘어가려 하시면…….”
제레미를 밀어내려 하자 그가 그러지 말라는 듯 내 두 볼을 손으로 감쌌다.
“조금만, 나를 조금만 봐주면 안 될까.”
제레미가 시무룩한 얼굴로 속삭이듯 읊조렸다. 부드러운 속삭임 속에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려는데 뺨을 감싸고 있던 제레미의 손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예민한 피부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스미고,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혼을 아주 쏙 빼어놓을 심산인지 그가 입술 가까이에 입을 맞췄다.
“……!”
반쯤 내리깐 시선이 뺨 위에 닿았다. 내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지켜보던 그가 손끝으로 명치 위를 느릿느릿 쓸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침범했다. 명치를 간지럽히는 손길만큼 느리고 관능적인 움직임이 이어졌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휘어 감은 그가 한숨 섞인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에 섞인 열락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서로의 숨이 섞이고, 발끝까지 오그라드는 저릿한 기분에 휩싸였다.
“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제레미의 눈빛에 색기가 흘렀다. 그런 그의 눈빛 앞에 무방비하게 놓인 나는 고양이에게 붙잡힌 쥐가 된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