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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황자님을 죽이겠습니다 (80/120)

80. 황자님을 죽이겠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인의 명을 따를 생각도 없었다.

“싫습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아인에게 보란 듯이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렇듯 대놓고 아인의 명령을 거부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게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늘 차갑다고 생각되었던 금안이 불꽃처럼 일렁이는 게 보였다.

“싫다?”

서늘한 목소리가 핏빛의 입술 사이로 스며 나왔다. 나를 내리누르는 압박감은 숨도 못 쉴 정도로 무겁고 단단했다.

“예, 저는 제가 이 임무를 그만둬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황자님을 감시하며 꼬박꼬박 보고도 드렸고, 사람들에게 가짜 황자비란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습니다. 황자비 임무에서 벗어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제가 왜 임무를 그만둬야 합니까.”

“넌 나를 배신했다. 이유가 더 필요한가.”

“배신이 아니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황녀님을 죽이는 건 지금도 저는 반대입니다. 아무런 죄 없는 일곱 살짜리 여동생을 왜……!”

“카렌에게 했던 것처럼 제레미도 지켜줄 요량이냐?”

“……!”

핵심을 건드리는 말에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굳혔다. 아인은 내 두 뺨이, 입술이, 눈빛이 굳어지는 것을 느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 표정은 무엇이냐.”

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맹세의 보석으로 사람의 목숨을 거둘 때도 무감정한 냉혈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가, 이토록 맹렬히 타오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그가 다시 거리를 붙여왔다. 그의 팔이 내 허릴 강하게 붙들었다.

허리를 붙잡은 손이 느릿느릿 명치를 향해 올라왔다. 셔츠 사이를 파고든 그의 손끝이 기어코 맹세의 보석을 건드렸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후회하게 되지 않느냐. 너를 감옥에서 살렸던 일을.”

아인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내게로 내리꽂힌 그의 시선에 차가운 분노가 일렁였다.

“나를 위해서라는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됐어.”

“꾐이 아니라……!”

아인의 손가락이 맹세의 보석을 쓸었다. 더 이상 말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보석을 통해 점차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싶게 만드는 고통을 견디며 아인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어떻게 해야…… 저를 다시 믿으실 건가요.”

“배신이 아니니 기회를 달라?”

“예.”

“……좋다. 너에게 배신자의 오명을 지울 기회를 주지.”

아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악마의 피처럼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려냈다.

“지금 당장 제레미를 죽이고 와.”

“……!”

“그것이 네가 내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니까.”

아인의 예리한 시선이 내 얼굴 곳곳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시선 앞에서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고민에 빠졌다.

아인은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제레미를 죽이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첩자를 심는 등의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았을 테지.

그는 그저 나의 동요를 보고 싶은 거였다. 제레미를 죽이라는 말에 흔들릴지, 아닐지를.

그렇담 지금, 그리하겠노라고 답하는 게 옳다. 그래야 아인의 신임을 다시 얻어, 황자비 임무를 지속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 아인이 정말로 제레미를 죽이고 오라고 하면 어쩌지?

막 결혼을 마친 시점에서 똑같은 명령을 들었을 때는 이전 생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대번에 그러겠노라 답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확신이 없었다. 명령을 내린 시점이 완전히 다르니까.

그렇다면 뭐라고 대답하는 게 정답일까. 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황자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죽이겠다 말하는 것이, 아인의 화를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 그러지 않겠노라 답했다.

도저히 제레미의 목숨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예상한 대로 매서웠다.

“힐, 더는 나를 시험하지 말거라.”

아인의 눈에 분노가 스미었다. 들끓은 감정이 풍랑처럼 일렁였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고 해서, 어디까지 봐줄 수 있는 건 아니다.”

“…….”

“만약 네가 황자에 대한 걸 숨기고 내 앞에서 연기를 벌인 것이라면. 나는 더는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힐.”

“그런 게 아닙니다……!”

들끓는 감정을 잠재우려 애쓰며 생각에 잠겼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모든 상황이 내게 황자비를 그만두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미련하게 버티다 꺾여버릴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상황이 내게 호락호락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껏 꺾이지 않고 잘 살아남았지 않나. 그리 생각하니 지금이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머릿속이 차분해지자 차츰 계획이 그려졌다.

“다시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지금은 황자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라. 무슨 뜻이냐.”

“지금 저를 시험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 없이 황자님을 죽이겠다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차분히 아인의 모순을 파고들었다. 평상시의 아인이었다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지만, 이성을 잃은 상태라 명령에 빈틈이 보였다.

“황실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백치 황자가 갑자기 자객의 습격을 받는다니요. 황녀님 때의 일처럼 귀족의 원한으로 둘러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담 사람들은 누구를 의심할까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아인을 바라보았다. 곧게 파고드는 시선에도 나는 겁먹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황자가 죽음으로써 확실한 황위 계승권자가 되신 황태자님을 의심할 것입니다. 혹은 친어머니의 원수를 갚은 거라 떠들지도 모를 일이지요.”

“제레미가 죽은 뒤의 일이 걱정돼 내 명을 따르지 않겠다?”

“그것도 있지만, 이런 일엔 신중해지셔야지요. 황자님을 죽일 수 있는 완벽한 빌미를 잡기 위해 제가 황자비 자리에 있는 거잖습니까. 그런데 되레 제게 황자비 자리를 내려놓으라 하시다니요.”

“…….”

“황태자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리셨는지는 알겠으나,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앞으로는 황녀님 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계속 황자비 임무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황자가 백치가 아니란 게 밝혀지면, 황태자님의 위협이라 생각되면.”

하기 싫은 말을 하기 위해 손을 꾹 말아쥐었다.

“그때, 황자의 목숨을 끊어놓겠습니다.”

진실을 가늠하듯 아인의 시선이 예리해졌다.

“어째서 그리하는 것이지? 이번에도 나를 위함이라 말할 셈이냐?”

“예.”

짧지만 강하게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이젠 아인이 결정을 내릴 차례였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가에 따라, 세 번째 삶이 허무하게 끝이 나버릴 수도.

하지만 나는 이어진 아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아인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그때 수상쩍은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황태자의 방 앞에 단말마와 같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윽!”

뭐지, 자객?

예리하게 문 쪽을 주시하며 검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시커먼 옷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십 명의 사내. 자객이었다.

그 순간 나는 곧장 명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위급 상황 시 동료들을 부를 수 있는 장치였다.

“기사들을 불렀으니 수 분 내로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때까진 제 뒤에 계십시오.”

검을 발도 하며 아인의 앞에 등을 보이고 섰다. 자객들의 검에 피가 흥건한 걸 보면 주변을 지키던 그림자 기사를 죄다 베고 온 듯싶었다.

그렇담 다른 그림자 기사들이 올 때까지 나 혼자 아인을 지켜야 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제레미를 죽이겠다는 말을 입에 올린 밉살맞은 아인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객들에 의해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모순이기도 했다. 악당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는. 그건 내가 아인에게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갓 그림자 기사 되어 아인의 곁을 지켰던 지난날, 나는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겹쳐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런 아픔을 겪고도 저렇게 훌륭하게 크시다니.]

정확히는 오랫동안 황궁을 지켰던 수다스러운 시녀의 말을 들은 뒤부터였다. 그녀를 통해 알게 된 아인의 어린 시절은 나와 비슷했다.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어른들에 의해 겪어야 했고. 끝내는 부러지지 않은 채 어른으로 성장했다.

비록 폭군으로 자라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꺾이지 않았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단 걸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아니까.

그래서 나는 아인이 이따위 자객에게 비명횡사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아인이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할 일은 아인이 꺾이지 않게 지키는 것.

“하압!”

세 명의 기사를 동시에 막아내며 검을 세웠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아인이 보였다. 문제는 그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겨우 이런 오합지졸들에게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닌데. 능력도 나보다 좋잖아. 왜 저러고 있는 거야?

그는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려는 듯.

그리고 그때, 어딘가에서 숨어든 자객 한 명이 아인을 향해 돌진했다. 서슬 퍼런 검날이 아인에게로 향하고. 나는 다급히 아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크흑!”

하마터면 자객의 검을 막지 못할 뻔했다. 무리하게 끼어든 바람에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 말았지만 긴장을 한 탓인지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나는 곧장 다른 자객에게로 검을 뻗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림자 기사들이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자객들을 베어내는 도베르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 *

한바탕 소란이 정리된 후, 살아남은 세 명의 자객이 아인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그중에는 내 검을 막은 자객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옆구리의 자상을 손으로 꾹 누른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객들이었다. 임무에 실패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하나같이 자결을 시도했다. 행동을 봐서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 보였다.

이토록 고도로 훈련된 자객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굴까. 생각 끝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했던 말도.

[아인은 제 목숨 지키는 것에 급급하게 될 거거든.]

그렇담 이들은 황후가 보낸 자객인가? 그때 황후의 말을 듣고 눈치를 챘었어야 했는데. 이런 일은 항상 뒤늦게 깨닫고야 만다.

짧은 후회감을 느끼고 있던 그때, 아인이 자객들에게 다가갔다.

“누구부터 지옥을 보고 싶으냐.”

섬뜩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자객들 중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인은 일말의 여지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 옆구리에 자상을 입힌 자객 앞에 멈춰선 아인이, 그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으윽…….”

자객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아인은 그의 옷깃을 잡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으로 차가운 살기가 넘실거렸다.

“이놈만 남기고 다 죽여.”

재갈이 물린 자객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비릿한 혈향이 아인의 방 안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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