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지켜줄게
다음날, 제레미는 황자궁 내 비밀 공간으로 향했다. 창문 하나 없이 돌벽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그곳엔 체르샤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힘 하나 없이 늘어진 몸, 푸르게 변하기 시작한 피부.
그녀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무엇 때문에?’
정신 고문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지언정 목숨을 끊어놓지는 못한다. 그런데 체르샤가 죽었다는 것은…… 간밤에 누군가 체르샤를 죽이고 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비밀 공간은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었다. 체르샤의 몸엔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독에 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의아함에 체르샤를 살피던 그때, 무언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지?’
체르샤의 몸에서 나온 건 빛바랜 보석이었다. 원래는 초록색이었을 보석은 거무튀튀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도무지 귀족가의 영애가 소지하고 다닐 것 같은 보석이 아니었다.
‘옷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몸에서 나왔다는 게 이상한데…….’
제레미가 보석을 손안에 쥐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마나가 깃들었던 흔적이 느껴졌다.
‘마나스톤?’
제레미의 시선이 체르샤를, 그리고 다시 마나스톤을 향했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며 솜털이 곤두섰다.
‘이게 체르샤의 몸에 박혀 있었던 거라면…….’
불현듯, 힐레인의 명치를 건드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키스가 주는 몽롱한 열감에 그냥 지나치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운을 입고 있다고 해도, 손에 닿는 감각이 기묘했다. 사람의 몸이 아닌, 딱딱한…… 그래, 꼭 저 정도 크기의 보석처럼 느껴졌었지.
빛바랜 보석과 체르샤를 번갈아 쳐다보던 제레미가 마른 침을 삼켰다.
체르샤의 죽음과 마나스톤. 그림자 기사와 아인.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이윽고 황태자와 약속한 밤이 찾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이 스민 새벽 1시, 기다리고 있던 신호가 왔다.
“윽…….”
맹세의 보석을 통해 미약한 전기 신호가 전해졌다. 나는 명치가 찌르르 울리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반짝 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제레미 쪽을 바라보았다. 얌전한 잠버릇을 가진 그답지 않게 오늘은 나를 거의 휘감다시피 하며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을 보며 난감해했다.
‘황자님이 깨지 않게 몰래 다녀와야 하는데.’
잠시간 궁리를 하다 몸부림을 치는 척하며 슬쩍 몸을 옆으로 틀어보았다.
“으음…….”
“……!”
그러자 제레미가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등 뒤로 맞붙은 그의 가슴이 단단하고 뜨거웠다. 그의 품에 감싸이듯 안긴 나는 그대로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어서 가야 하는데…….’
숨을 죽인 채 그의 팔을 살짝 밀어냈다. 조심스러운 동작이었지만 제레미는 이미 잠에서 깬 상태였다.
“힐레인…….”
“…….”
그의 부름에 몸을 움찔하자 허리를 두른 제레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가 내 양옆으로 손을 둔 채 상체를 세웠다.
어느덧 나는 누워서 제레미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단단한 두 팔에 갇힌 채.
“……가지 마.”
제레미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통을 인내하듯 미간이 찌푸려진 채였다.
가지 말라니……. 그는 뭔가를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래도 우선은 숨겨보자는 마음에 거짓말을 얼버무렸다.
“저 아무 데도 안 가요.”
“거짓말. 아인에게 가려는 걸 다 알고 있어.”
촘촘히 박힌 은빛의 속눈썹 아래로,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평소의 제레미답지 않게 눈빛이 서늘했다.
“이 밤에, 혼자서……. 무슨 이유로 그에게 가는 거야?”
“……!”
제레미는 내가 아인에게 갈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무어라 둘러대야 좋을지 몰라 입술을 꾹 물었다.
제레미의 시선이 깨물린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내가 입술을 깨물지 못하도록 아랫입술을 눌렀다.
입술이 벌어지는 걸 바라보던 그가 그대로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뭔가를 갈망하는 굶주린 짐승처럼, 눈빛이 거칠었다.
”아인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러 가는 거지. ‘황자는 백치가 확실하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
내가 거짓 보고를 올리고 있다는 걸…… 제레미가 알고 있어? 놀란 나머지 멍하니 제레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제레미가 피식, 아픈 웃음을 흘렸다.
“네가 아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려 한다는 걸 알고 있어. 카렌을 지켰듯이. 나도 아인의 동생이니까. 그래서 나를 지켜주려는 거겠지…….”
제레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아인이 초래할 비극을 막기 위해…… 아인을 위해.”
“…….”
제레미가 말을 끝맺고, 서늘한 정적이 그와 나 사이에 감돌았다. 그는 내 대답을 고요히 기다렸고, 나는 혼란에 빠진 채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 도와줬던 걸 들킨 것으로, 거짓 보고까지 알게 되었을 줄이야.’
하지만 제레미의 마지막 말은 틀렸다. 아인의 동생을 지키고 싶은 건 맞지만, 꼭 아인의 동생이라서만은 아니었다. 아인과는 별개로, 나는 그들이 살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제레미가 너무 많은 걸 알게 되면 내 바람이 무너지게 된다. 내겐 두 번째 생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이 있지 않나. 결코 제레미와 짐을 나눠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건 오롯이 나만이 짊어질 수 있는 짐이었다.
“황자님, 그냥 못 본 척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 수 없어. 나는 네가 또 다치게 될까 봐 두려워, 폭발 사건 때처럼……. 그런 일이 또 일어나면 나는…… 못 살아. 힐레인.”
제레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속기 마법사면서. 이 순간만큼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이젠 내가 지키고 싶어.”
나를 지켜 준다고?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껏 기사로 살며 누군가를 지키는 데 익숙했던 내가, 지켜주겠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정도로 어찌 장차 주군을 지킬 수 있겠느냐!]
어릴 적, 아버지는 나를 기사로 만들기 위해 매번 벼랑 끝까지 몰고 갔고. 훈련에서 입을 상처는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나약한 기사는 주군을 지키지 못할 거라며.
그런 대우는 기사가 된 이후에도 똑같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도,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내몰릴 때도, 누군가 나를 지켜준 적은 없었다. 기사는 지키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 보호받는 위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레미의 곁에 있으면 보호받고 싶다는 기분을 느끼고 만다. 그의 보호 아래 안주하고 싶고, 안온한 감각에 취하고 싶어진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마도 시작점은 두 번째 생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인에게 가지 마. 이제부턴 내가 널 지켜줄게.]
두 번째 생의 끝 무렵에서, 아인에게 가는 내게 제레미가 한 말이었다.
전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흘러나온 말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연대를 맺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그때와.
뭔가가 잘못됐다. 이건 실패했던 길을 똑같이 답습하는 거였다.
“황자님. 이러시면 저도 황자님도 위험해져요.”
“……?”
“우리의 연대는 위험합니다.”
“왜?”
“작은 틈이 보이는 순간 백치가 아니라는 게 발각되고 말 거예요.”
이대론 설득력이 부족할 것 같아 말을 더 보탰다. 거짓과 진실이 묘하게 뒤섞인 말을.
“황자님, 아시다시피 저는 가끔 예지몽을 꿔요. 저와 황자님의 미래를 본 적도 있어요. 정확히는 연대를 맺다가 황태자님께 들통 나고 마는 미래를 보았죠.”
“하지만…… 그건 꿈일 뿐이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네가 그랬잖아.”
“아뇨, 그 부분에 한해선 쉽게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하는 일을 모른 척해주세요. 저를 지키겠다는 말도 마시고요.”
말을 끝맺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완강하게 고갤 젓는 걸 보니, 이대로는 아무래도 설득이 무리일 듯싶었다.
역시…… 억지로라도 잠을 재우는 수밖에 없나.
“……읏!”
그와 동시에 제레미의 목덜미를 손으로 가격했다. 순식간에 급습을 당한 제레미가, 기절하지 않으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내 몸 위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미안해요, 황자님.”
기절해 잠이 든 제레미의 등을 가만가만 다독여주었다.
“저를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황자님을 위해서니까…….”
* * *
늦은 밤, 아인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방해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려고 했는데, 나를 발견한 그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묘한 이채가 서린 금안이 내게로 향했다. 몹시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했던 것에 반해, 나를 향한 눈은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크레셰께서 이리 행차해주시다니.”
영광이라는 듯 아인이 한 손을 펼쳐 보였다. 아래로 내리깐 시선이 서늘했다. 배신자를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이 묻어나왔다.
“요즘 난 네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구나. 내가 알던 그 힐이 맞는 것인지.”
“…….”
“예지몽에 대한 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자주 발현되는 능력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때도 많고요.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게로 시선을 내리깐 그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받쳐 들었다.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을 가늠하려는 것인지 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진짜 같아서 거짓말 같구나.”
“…….”
“허술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이리 변한 것이냐?”
“허술한 모습이 사라졌다면 저 나름대로 성장을 한 것이니,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성장한 네 모습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는 확실해졌다.”
“……?”
“내 너를 더는 황자비로 둘 수 없다는 것.”
조금 혼란스러웠다. 허술한 모습이 사라졌다면 오히려 황자비 임무에 제격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황자비로 더는 둘 수가 없다니.
“……왜입니까?”
턱이 들린 채 아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떨지 않기 위해 꼿꼿이 고개를 세우며.
내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고요히 바라보던 아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끝이 귓가를 스치고, 뜻밖의 행동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미세한 떨림을 지켜보던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달았다.
“이제야 좀 너답군.”
“……장난치지 마시고, 말씀을 해주세요.”
“너를 황자비에 둔 이유는, 지금과 같은 첩자답지 않은 모습 때문이었다. 표정을 못 숨기고, 거짓말은 티가 났지. 언제나 내게 진실만을 들고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넌 변해가고 있어. 곧 그 자리에 있기 적절치 않은 사람이 될 거다. 진짜 표정을 끌어내기 위해 지금도 이리 공을 들여야 하는데. 내 무엇하러.”
아인이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잠시 후 그가 내게 건넨 그것은 주머니에 담긴 약초였다.
“가사상태에 빠지게 하는 약초다. 독이 아니니, 독살 의심도 없을 것이다. 아주 안전하고 무해하게, 그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지. 적절한 시기에 명령을 내릴 테니 그것으로 황자비 임무를 끝마치고 오너라.”
“……!”
“그리하면 크레셰가 아니란 걸 들킬 염려도 없겠지.”
“이러기 위해 대사제를 불러 확인하잔 이야기를 꺼냈던 겁니까? 이대로 가다간 거짓말을 들킬 게 분명하니, 저 스스로 황자비를 그만두게 하려고요.”
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속에서,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약초를 내려다보았다. 아인의 함정에 걸려들었으니 이대로 가다간 크레셰란 거짓말이 들켜 황자비 자리에서 내쫓기게 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 약초를 삼키라고?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다시 돌아왔는데.
뭐라고, 뭐라고 대답해야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