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둥지
제레미가 수줍게 웃어 보였다. 키스한 직후여서 그런지 눈빛이 농염했다. 위험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관능적인 모습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대체 어쩌고 싶은 걸까.’
제레미와의 키스가 좋았다.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좋았다.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데, 제레미의 손이 허리 쪽에 닿았다.
“잠깐만.”
그가 조심스레 내 허리띠를 여미었다. 응? 갑자기 허리띠는 왜……?
“헉.”
이럴 수가. 지금 보니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허벅지 아래까지 가운이 올라가 있고, 그가 가운을 여며주기 전까진 앞섶도 조금 벌어져 있던 상태였다.
‘미쳤어, 미쳤어! 꼴이 이런 줄도 모르고.’
하지만 나만 부끄럽다고 느낀 것인지 제레미는 내내 차분한 모습으로 내 옷을 정리해주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부끄럽지 않나? 나는 발끝이 오그라들고 가슴이 간지러운데. 제레미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나?
“잠시만.”
내 모습을 보며 골똘하던 그가 어딘가로 가서 커다란 수건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곤 그것을 내 몸 위로 칭칭 둘렀다. 피부란 피부는 모두 감춰버리려는 듯이.
“뭐 해요, 황자님?”
“나한테서 지키는 중.”
나를 거대한 선물 포장으로 만들어버린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좀 너무했잖아. 나는 지금 수건의 산에 갇혀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툭 치면 데굴데굴 굴러갈지도.
“이러면 제가 못 움직이는데요…….”
“내가 있잖아.”
응? 무얼 하려나 했더니. 제레미가 수건째로 나를 안아 들었다. 그는 마치 조그만 곰 인형을 품에 안은 아이처럼 사뿐하게 걸으며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나를 살포시 침대 위로 눕혀준 그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화, 황자님……!”
“이건 거부하지 말아줘.”
당황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제레미가 눈을 좁히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내 삶의 유일한 낙이니.”
어느덧 옆자리에 누운 그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거부하지 말라더니, 언제든 품을 빠져나갈 수 있게 팔을 느슨히 두른 상태였다.
“잘자……. 힐레인.”
제레미가 스르륵 눈을 접어 웃었다. 아래로 내리깔린 풍성한 속눈썹이 별빛처럼 잔잔한 빛을 머금었다.
문득 온몸을 두른 수건처럼 포근한 감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살얼음 같은 황궁 속에서 나만의 둥지를 튼 기분이 들었다.
* * *
다음 날, 나는 패닉에 빠진 채 중앙궁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황제의 부름. 그것은 황자비가 된 한 달 반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회귀 전에도 이런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황제는 내게 완전히 무관심했으니까. 아들인 제레미도 투명인간 취급하는 마당에, 백치 황자의 신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내게 만나자는 요청을 보내올 줄이야.’
무슨 일인지 궁금해지는 한편,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몄다.
‘혹시 재판장에서 내가 크레셰라고 밝힌 것 때문에 그러나?’
크레셰는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탓에,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그는 크레셰라고 밝힌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무엇이 제게 이익을 줄 것인지 저울질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미래에 대해 물어 보려고 그러는 거라면…… 몇 가지 알려줄 수 있긴 한데.’
혹시 몰라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미리 머릿속으로 정리해두었다.
어느 지방에서 몇 월에 홍수가 나게 될 거라던가, 접경지역에 소규모의 기습이 있을 거라는 등의. 대강 황제가 알아서 좋을 내용들만 간추려 기억을 해두었다.
잠시 후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왔는가, 황자비. 이리 앉게.”
“알현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감사는. 허허. 일단 차를 한 잔 들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세. 한 사람이 더 와야 하거든.”
한 사람이 더 와야 한다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황제는 정무를 다룰 때나 무언가 의논을 해야 할 때 집착적으로 아인에게 의지를 했었기에.
‘만약 진짜로 황태자님을 부른 거면 어쩌지? 난 아직 그를 볼 준비가 안 됐는데!’
찻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울을 볼 수 있다면 아마 눈동자에 지진이 났을 게 분명했다. 제발 아인은 아니여라 생각하던 그때,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왔느냐, 아인.”
황제가 친근하게 황태자를 불렀다. 작게 고개를 숙였다 든 그는 느릿하게 시선을 옮겨 내 쪽을 쳐다보았다.
“황자비도 함께였군요.”
아인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건 오직 입뿐이었다. 반쯤 내리깐 시선에선 지울 수 없는 냉기가 흘렀다.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잠시 후 의자에 착석한 아인이 찻잔을 손에 들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기품이 우아하고도 자연스러웠다.
“큰 고초를 겪었음에도, 표정이 밝아 보여 다행이군. 황자비.”
나는 기계적으로 만들어낸 미소를 곧장 내려놓았다. 내 귀에는 꼭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태평하구나. 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살 떨리게.
“그에 관해서는 미안하군, 황자비. 겪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었으니.”
“아닙니다, 폐하.”
“그러게 왜 처음부터 크레셰라 밝히지 않았나. 그랬더라면 내 진즉에 황자비에 대한 대우를 달리 해주었을 텐데…….”
“아닙니다…….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황자비가 욕심이 없군, 껄껄. 그런 모습도 겸손하고 보기 좋기는 하다만…… 이곳은 황실이 아닌가. 내비쳐야 할 이점은 드러내는 것이 맞지. 황자비가 크레셰라는 게 알려지면 황실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달 중으로 자네가 크레셰라는 걸 제국민들의 앞에서 공표하는 게 어떤가.”
“……!”
아니, 미래를 물어보려고 나를 부른 게 아니었어?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을 느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에겐 제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미래의 정보를 얻는 것보다도, 황실의 일원이 크레셰라고 자랑하는 게 더 우선인 듯 보였다.
‘그나저나 어쩌지? 제국민들에게 공표하는 건 재판장에서 귀족들에게 진술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를 거야. 제국민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짓말이, 어떠한 파문을 낳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황자비는 왜 그런 표정인가. 제국민들의 앞에서 폐하의 인정을 받는 것인데. 기쁘지 않은 것인가.”
아인의 시선이 내 얼굴 위에 닿았다. 어쩐지 나를 떠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당황하면 그는 내가 크레셰가 아님을 단번에 알게 되겠지? 뭐…… 이미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아인에게 그런 확신을 줄 수는 없었다.
“그리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국 나는 뭔가에 홀린 듯 황제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린 아인이 그럼 이건 어떠냐는 듯 또 다른 제안을 꺼냈다.
“폐하. 황자비가 크레셰라는 것을 공표하기 전, 신성제국의 대사제에게 먼저 보여보심이 어떠하십니까.”
“으흠,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군. 신성제국의 공인도 받을 수 있고. 황자비의 의견은 어떠한가.”
뭐……?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폐하…… 재판장에서 이미 제 능력을 확인하셨지 않습니까.”
“아아, 자네를 의심하는 게 아닐세. 신성제국의 인정을 받아야 황자비가 크레셰라는 사실에 힘이 실릴 게 아닌가.”
이를 어쩌지……? 진짜 크레셰가 아니니 거짓말이 들통 나게 될 텐데. 나는 낭패감을 삼키며 아인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인을 대적하는 건 정말…… 살얼음판 위를 걷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금이 갈 것 같아 다른 쪽으로 발을 피하면 또다시 발아래로 쫙쫙 금이 가고 만다. 자칫 잘못 발을 디뎠다간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을 게 분명했다.
“황자비는 생각이 다른가?”
아인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여기서 사실을 털어놓던, 혹은 대사제의 앞에서 거짓이 들통나 벌을 받던. 둘 중 하나를 어서 골라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더는 고민하지 못하고 대답을 내어놓아야 했다.
“……예. 대사제님의 확인을 받겠습니다.”
아인의 수에 넘어간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렇게 하겠다는 것밖엔 없었다.
‘대사제를 황실로 부르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우선 시간을 좀 벌어 놓자. 그동안 대책을 세워야겠어.’
상념에 젖어 있던 그때, 황제가 적막감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껏 황자비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더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크레셰라는 능력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인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내 상상도 하지 못했네. 남작가 출신치고는 인맥이 대단하지 않나. 도베르 경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놀랐는데, 대공과도 친한 모양이더군. 언제부터 그리 세력을 모아두었나.”
황제의 시선에 묘한 흥미가 감돌기 시작했다.
“……세력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그저 약간의 친분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 아니. 내 황자비를 나무라는 것이 아닐세. 황실에서 인맥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 아닌가.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칭찬을 하고 싶었던 걸세.”
“과찬이십니다…… 폐하.”
“껄껄, 내 황자비의 능력을 뒤늦게 알아본 것이 요즘 참으로 아쉬워.”
황제의 시선이 내게서 아인에게로 향했다. 잠시간 나와 아인을 번갈아 보던 그가 한숨과 함께 차를 머금었다. 그의 시선엔 진득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황자의 짝으로 있기엔 참으로 아까운 재목이 아닌가.”
“……!”
황제의 속마음을 눈치챈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차를 엎을 뻔했다.
제레미를 백치라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제레미 또한 아인과 다름없는 황제의 자식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제레미를 홀대한다는 말인가. 정말 자기가 낳은 자식이 맞긴 한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황제에게 퍼부어주며 입술을 꾹 물었다. 생각 같아선 한마디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인의 앞이니 감정을 티 내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속이 너무 아플 것 같아, 나름의 소심한 복수를 펼쳤다. 이만 나가봐도 좋다는 황제의 말에, 나는 일어나는 척하며 고개를 세게, 아주 세게 돌렸다.
그 탓에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이 허공을 가르며 팩! 하고 황제의 얼굴을 때렸다.
얼떨결에 머리카락 따귀를 맞은 황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 황자비?”
“어머, 죄송합니다. 폐하.”
슬쩍 시선을 내리며 황제에게 사과했다. 숯이 많고 모질이 탄탄한 덕에 황제의 한쪽 얼굴은 벌써 부터 색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사랑스러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는 황제의 얼굴이 꽤, 기분을 즐겁게 만들었다.
‘아우, 통쾌하다.’
하지만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인과 함께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차갑게 돌아서는 아인의 뒤를 쫓았다. 중앙궁의 후원에 다다르도록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뒤를 밟았다.
이윽고 아인이 걸음을 멈추고,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따라오느냐.”
“황태자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말해.”
“정말 대사제를 부르실 겁니까? 적어도 저랑 상의는 해주셔야죠…….”
아인은 뭐 이렇게 뻔뻔한 부하가 다 있냐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나도 진실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아인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서늘한 금안이 내 얼굴 곳곳을 누볐다.
“너는 요즘 내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니.”
“그건…….”
“나는 네가 크레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만약 네가 미래를 볼 줄 알았다면, 스스로 피했어야 할 일들이 많지 않느냐.”
미간을 찌푸리자 아인이 느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웃던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3년 전 헤렌 축제가 그중 하나가 아니냐. 네가 폭탄 스위치를 눌렀던.”
나를 오랫동안 곁에서 봐왔던 아인이다. 내 과오, 그리고 내가 가장 힘들어했던 순간을 가장 잘 아는 이도 그였다. 그런 그의 앞에서 당당히 미래를 안다고 말하는 건…… 역시 무리려나.
“……크레셰가 맞다면 얌전히 대사제의 확인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
아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내게서 시선을 뗐다. 몇 걸음 멀어지던 그가 걸음을 멈추며 다시 나를 뒤돌아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내일 밤, 내 방으로 오려무나. 신호를 보낼 테니.”
“…….”
“내일까지 잘 생각해 보거라. 이대로 크레셰가 아님이 들통 나 황제의 진노를 살지. 아니면 내일 밤, 내게 진실을 털어놓을지를.”
기울인 얼굴 위로 비뚜름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 미소는 나비를 손안에 움켜쥔 어린 소년처럼 비틀리고, 왜곡되어 보였다.
손바닥 안에서 여린 날개가 스치고 찢어져도 그는 결코 나비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손안에서 끝내 짓이겨버릴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