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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밤의 여우 (77/120)

77. 밤의 여우

가만두지 않겠다. 센!

안 그래도 내 이미지는 이미 바닥에 처박힌 상태인데. 이번엔 소원한 부부 관계라니. 제레미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음란 마귀가 잔뜩 낀 신부로 보지 않을까?

찰박-!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욕물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에투퉤.”

그래 봐야 내 입에 다 튀어버렸지만.

나는 지금 제레미와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목욕을 하겠다며 욕실로 도망을 친 상태였다.

그것도 벌써 두 시간째. 어느덧 목욕물이 다 식어가고 있었다. 점점 몸에 한기가 퍼지기 시작했지만, 손도 까딱하기 싫었다.

여기서 나가면 다시 방으로 가야 할 텐데. 아직은 제레미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어쩌지?’

똑똑-.

하지만 어차피 네 운명은 수치사라고 말하듯 욕실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신부야?”

“……네, 넵!”

깜짝 놀라, 욕조 속에서 몸을 똑바로 세웠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벌써 두 시간 째인데. 그러다 감기 걸려…….”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나를 걱정해주는 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자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분명 귀여운 표정일 거야. 깨물어 주고 싶을…….’

이런 나쁜 음란 마귀 녀석!

센에게서 옮겨오기라도 한 걸까. 정신 차리자는 의미로 양 볼을 두 손으로 찰싹 때렸다.

“신부야?”

“네, 네! 지금 나갈게요.”

분명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감기 걸릴지 모른다며 살뜰히 챙겨주는 모습에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그럼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가운으로 대강 몸을 가린 후, 머리에 수건을 덮어 썼다. 나머지는 파우더룸으로 가서 어떻게 해보려 하는데…….

“으앗!”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하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우우. 허리야, 내 엉덩이야.’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다. 욕실 밖에서는 다시 다가온 제레미가 다급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신부야! 괜찮아?”

“으으…… 네에? 으으.”

괜찮다고 대답해줘야 하는데, 너무 아파서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넘어진 거지? 나 잠깐만 들어갈게.”

엇, 지금 들어오면……!

다급히 내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타월로 된 가운을 걸치곤 있었지만, 넘어지는 바람에 앞섶이 많이 벌어져 있었다.

부랴부랴 앞섶을 여미던 그때 제레미가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넘어진 나를 발견한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금 넘어졌을 뿐이에요, 이 정도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발목에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쉬이, 가만히.”

제레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발목을 살폈다. 물기 때문에 옷이 더럽혀질 텐데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황자님…….”

“발목을 접질린 것 같아. 잠시만 실례할게.”

제레미가 한 손은 내 무릎 아래로 넣고, 한 손은 어깨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느새 나는 그의 품에 모로 안긴 자세가 되었다.

“…….”

이상하다.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한데, 가슴은 몽글몽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제레미는 나를 안고서 드레스룸까지 왔다. 가까이 있는 소파로 다가간 그가 조심스럽고 다정한 동작으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많이 아파?”

“조금…….”

소파에 앉은 채로 오른쪽 발목에 힘을 줘보았다. 근육이 놀란 것인지 저릿 하는 고통이 찾아들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제레미가 조용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발등을 감싸 쥐는 손이 시원했다. 잠시 후 그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통이 잦아들었다.

‘마법을 쓰신 건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발목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백치란 걸 숨기지 않더니, 이제는 마법까지 서슴없이 공개해버리는 건가. 그러다 내가 마음을 바꿔 아인에게 이르면 어쩌려고?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못 본 척해야지 뭐 어쩌겠어.

“으음?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요.”

“살짝 삐었던 건가 봐.”

“그런가 봐요, 헤헤. 아니면 황자님 손이 약손이라 그런가.”

헤벌쭉 웃자 제레미가 내 미소를 따라 소리 내 웃었다. 웃음이 멈추고 나자 약간의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머리를 수건으로 대강 감아놓은 채, 겨우 가운 하나를 걸치고 있는데. 제레미는 단정한 외출복 차림이잖아?

어쩐지 부끄러움이 밀려와 나는 부랴부랴 머릿수건을 풀었다. 머리카락으로 가운을 좀 가려보자는 생각에.

머릿수건을 풀자 물기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가슴께로 쏟아져 내렸다.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기는데 문득 제레미가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님?”

그의 표정을 가까이 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괜히 그랬다 싶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매혹적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속눈썹, 그 안에 자리한 몽롱한 눈동자. 도톰한 입술은 색기를 가득 머금은 채 살짝 벌어져 있었다.

“힐레인.”

제레미의 목소리에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네, 황자님!”

“우린 어찌 되었든, 지금은 부부잖아.”

그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만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연한 보랏빛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네. 그렇죠.”

“네가…… 우리 관계에 대해 소원함을 느낀다면.”

그가 내 뺨 가까이 손을 가져다 댔다. 느릿느릿, 닿을 듯 말 듯 지나가는 손길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나는 네게 더 다가갈 수 있어.”

이윽고 입술에 닿은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가만히 쓸었다.

“네가 허락해준다면.”

관능적인 눈빛, 애가 탈 정도로 느린 손길에 나는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

아까 전 센이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건가? 내가 부부 관계에 소원함을 느낀다는 그 말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입술을 움찔했다. 그러자 그가 손끝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느릿느릿 침범한 엄지손가락이 입술 안의 여린 살을 쓸었다.

입술로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가 스르륵 올라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색기 어린 밤의 여우는 내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키스해도 돼?”

짐승 같은 표정과 달리 정중한 물음이 그의 입술 사이로 스며 나왔다. 그 순간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연분홍빛의 탐스러운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개고 싶다는 욕심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 버렸다. 무릎을 꿇은 채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그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부드럽고 촉촉한 감각이 이어졌다. 너무도 아찔하여 순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기분 좋은 감각이. 첫 키스 때의 설렘과 같이 주체할 수 없는 고양감이 몸을 휘감았다.

키스가 계속되는 동안 뺨에서 시작된 그의 손길이 내 어깨를, 그리고 등줄기를 따라가다 허리의 움푹한 곳에 닿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곳이 간지러웠다. 눈을 감자 촉감은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두 팔로 꼬옥 끌어안았다. 내 행동에 힘입은 그가 조금 더 깊고 농밀하게 키스했다. 나는 그의 키스에 허덕이면서도 목덜미에 두른 팔을 놓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흘러가는 물결처럼 그에게 모든 걸 맡겼다.

어쩌면 그건 제레미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상냥하다가도, 정신없이 스며들며 넋을 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속도에 허덕이는 내가 있었다.

“……하.”

내가 숨쉬기를 어려워하자 제레미가 살짝 입을 뗐다. 잠깐의 여유를 둬 내게 숨 쉴 기회를 주려는 듯.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 조금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그가 다시 입술을 마주쳐왔다. 백치 연기를 벗어버린 그는 맹렬하면서도 동시에 위험했다.

잠시 후 그가 내 머리를 손으로 받쳐 소파 위로 눕혔다. 그사이에도 키스는 이어지고 있었다.

제레미는 한참을 굶주린 사람처럼, 점점 더 깊고 농밀하게 나를 탐했다.

스르르 눈을 뜨자 열감에 번진 연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어여뻤다. 물기 어린 제비꽃처럼.

‘……심장이 두근거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레미의 가슴 위에 얹은 내 손바닥으로 규칙적인 고동이 느껴졌다.

‘……!’

그런데 그때, 제레미의 손가락 끝이 내 명치 쪽에 닿았다. 정확히는 맹세의 보석이 자리한 그곳에. 가운 위로 닿은 건데도,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간지럽다는 느낌과 함께,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미묘한 감각이 깨어났다. 발끝이 오그라들고, 솜털이 곤두서는 그런 감각.

“화, 황자님……!”

급한 마음에 그를 불렀다.

제레미가 천천히 상체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탁하게 물든 눈동자. 열감 탓인지 눈가가 붉어 보였다.

“왜?”

나는 그의 물음에 금방 대답할 수가 없었다. 키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육체적 본능은 분명히 그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미적지근한 물음 하나가, 그에게 더는 다가갈 수 없게 벽을 만들었다.

나는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채 그를 죽이려 했던 첫 번째 생을 떠올렸다.

황자비가 된 지 겨우 세 달이 넘어가던 시점, 아인이 제레미를 죽이라 명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제레미에게 목표물 그 이상의 감정을 품지 못했었기에 아인의 명령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도중에 명이 거둬지지 않았더라면 끝내 제레미의 가슴에 단도를 박아넣었겠지.

그때의 일은 짙은 죄책감으로 남아 종종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다.

‘황자비 임무를 처음 맡았던 3개월 차에 벌어진 일이야. 제레미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한 행동이라고. 1년째가 되던 날, 또다시 그런 명령이 내려졌을 땐 목숨을 내놓고 불복했잖아.’

훗날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내가 편한 대로 생각한 것일 뿐, 제레미를 죽이려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거듭된 회귀의 굴레 속에서도 나만큼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그러니 이건 사랑이 아니다. 감히, 그런 감정이어서는 안 된다.

결코 바뀌지 않을 명제처럼 결론을 내렸다. 아까보다는 한결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나를 차분히 기다려주고 있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황자님. 더 이상은 제가…… 못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제레미가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잠시간 몽롱하게 나를 내려다 보던 제레미가 팔을 서서히 풀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자신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미안해, 놀랐지.”

차분한 미성이 낮게 울렸다.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진심으로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다 미안할 정도로.

“아니에요! 사과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시작했으니까요.”

고개를 푹 숙이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이자, 머리 위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싫은데 억지로 한 건……?”

제레미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잘못을 저질러 버려질 것을 염려한 강아지처럼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싫다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너에게 졸랐으니까……. 키스해달라고.”

“아니에요! 저도 좋았어요.”

좋았다는 내 말에 맞잡은 제레미의 손끝이 뜨거워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키스의 여운으로 아련하게 젖어드는 게 보였다.

‘위, 위험해.’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 남자……. 참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건지. 계속해서 유혹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도. 나도 좋았어……. 힐레인한테서 나는 향기, 사탕 같은 단맛. 그 모든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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