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아침부터 낯 뜨거운
“……!”
연보랏빛 눈동자에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힐레인은 평소와는 다른 잠옷을 입고 있었다. 꽃잎 같은 리본이 얇은 옷감을 여미고 있었고, 그 사이로 하얀 피부가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노출이 많은 건 아니었으나…… 충분히 야하고, 과도하게 매혹적이었다.
‘힐레인……. 내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이야……?’
제레미는 하얀 잠옷 위로 넝쿨처럼 흐드러진 검은 머리카락에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힐레인을 침대 위로 반듯하게 눕혀주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인제 그만 몸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힐레인이 제레미의 목덜미를 두 팔로 감았다.
“……!”
그 탓에 제레미의 상체가 힐레인에게로 가까이 당겨졌다. 이마가 맞붙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관능적일 정도로 진한 향유의 향이 제레미의 코끝을 간질였다.
“으음…….”
잠꼬대였다. 고약하고도 귀여운 잠꼬대.
제레미는 자신의 속도 모르고 곤히 잠든 힐레인을 보며 가늘게 눈을 좁혔다. 곤히 잠든 모습이 야속하긴 해도, 좋았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제레미는 오래도록 힐레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침대에 곤히 잠든 힐레인의 모습은 언제나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가끔은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랑해.”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고백을 읊조려보았다.
사랑해, 사랑해.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말해보았으나 여전히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죽을 때까지 매일 매일 사랑을 고백하면…… 그제야 겨우 만족할 수 있으려나.
“으음……. 제레미…….”
그런데 그때 조그만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제레미는 동작을 멈춘 채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얀이 아들이었다니…… 으으으.”
얀? 아들? 그녀는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제레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제레미. 다시 한번 더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달콤한 잠에 빠진 채 부른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는 게 기꺼웠다.
그토록 싫어했던 이름이…… 좋아질 정도로.
* * *
[제레미.]
꿈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힐레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제레미가 무의식중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젠 잊어버렸다 생각했던 목소리. 어머니, 트릭샤의 것이었다.
[네 이름의 뜻은 지배자란다.]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엔 감정이라곤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도구를 대하는 것처럼.
어깨를 내리누르는 힘에 제레미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고개를 들자, 순은의 머리카락. 청초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쳐진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간 손에 머물던 연보랏빛 시선이 다시 제레미를 향했다.
[제레미, 어미를 보렴.]
트릭샤가 허릴 숙여 제레미의 어깨를 붙들었다. 제레미는 그녀의 손길을 피해 보려 했지만, 꿈속의 자신은 너무도 작았다. 마치 그녀에게 휘둘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이렇게 조그마해서. 언제쯤 어른이 될까. 어서 자라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주렴.]
트릭샤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천사를 연상시키는 상냥한 미소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틀려 있었다.
[이것 놔!]
제레미가 힘껏 트릭샤를 밀어냈다. 하지만 바닥으로 넘어진 건 트릭샤가 아닌 유디트였다. 장면이 바뀌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유디트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트릭샤의 황후 임명식이 있기 일주일 전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유디트가 폐비가 되어 탑에 갇혔던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기도 한 그날을.
[죽어! 너도 죽어! 트릭샤 그 년과 함께 죽어버려!]
유디트가 제레미에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의 온화하고 어질었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황후가 아닌 광인 같았다.
트릭샤가 평소 버릇처럼 입에 올리던 계획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내 너를 아들처럼 품었던 지난 날들이 후회스럽구나. 악마의 자식은 악마인 것을!]
저주 섞인 날카로운 말들이 이어졌다. 어린 마음에 내리꽂혔던 비수는 조금도 줄지도 늘지도 않은 채, 제레미의 가슴을 갈랐다.
[어, 어머니…….]
꿈속의 자신은 눈물을 흘리며 유디트에게 다가갔다. 울고 있는 자신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은 채.
[내가 왜…… 네 어머니냐.]
하지만 어머니라 부르라 했던 상냥한 유디트는, 야차보다 더한 얼굴로 제레미를 거부했다.
친어머니보다도 더 정을 주었던 사람으로부터의 거절. 어린 제레미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겨우 얻은 가족이었다. 하지만 트릭샤에 의해 모든 게 달라졌다. 망가지고, 부서져 버렸다.
[소름 끼치니 그리 부르지 말거라!]
한이 서린 목소리에 제레미가 움찔했다.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시선을 비킨 그곳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아인이었다.
[형…….]
[……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제레미를 향한 아인의 눈동자에 살의가 넘실거리기 시작한 게.
“…….”
그 후 제레미의 어린 시절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 단 둘뿐이었는데, 한 분은 죽고 한 사람은 완전히 돌아섰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르고. 홀로 남은 세상 속에서 어린 제레미가 선택한 길은 백치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지배자의 이름을 가진 백치.
이름의 무게가 버거웠던 10살의 소년이 벼랑 끝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 * *
햇살이 스미기 시작한 아침. 나는 숨을 죽인 채 옆을 바라보았다. 같은 침대 위.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천사가 잠들어 있었다.
‘은혜롭다.’
백옥같은 피부에 갸름한 턱선, 별처럼 촘촘히 박힌 속눈썹이 예쁜 곡선을 이루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계속 봤다간 코피를 보게 될 게 분명했다.
이만 자제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제레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는 게 보였다.
‘악몽을 꾸고 있나?’
깨울까 말까 잠깐 동안 고민하다 그를 흔들었다. 은빛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잠시 후 맑은 눈물이 고인 연보랏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눈물에 넋이 나간 것도 잠시, 제레미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신부야…….”
나는 얼떨결에 제레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맞닿은 뺨을 통해 조금은 빠른 듯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님?”
살짝 고개를 올려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잠시간 나를 안고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네?”
“제레미라고 불러줘.”
“……!”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몽롱한 걸 보면 잠이 덜 깬 게 분명한데. 입을 꾹 다물고 고집스레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선 또렷한 의지가 보였다.
“그…… 갑자기 이름을 부르라고 하시면.”
당황한 나머지 빨리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자 그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꿈을 꿨는데…….”
“악몽을 꾸신 거예요?”
“응. 너무 싫은 사람이 꿈에 나타났어. 내 이름을 부르더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싫은 사람인가?
“누구요……?”
하지만 제레미는 대답 대신 나를 꼭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
“……네?”
어머니라고? 당황한 채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레미라고 불러 줘, 그렇게 내 이름을 정화 시켜줘……. 깨끗하고, 무구하게.”
사랑에 빠진 달콤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멋대로 그의 이름을 불러도 되나?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제레미가 고갤 저으며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혹시 곤란한 거라면…….”
곤란한 건 아닌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다만 조금 간질간질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부탁하는데 못 해줄 것도 없지.
“제레미.”
“…….”
제레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슬쩍 고갤 돌렸다. 그러자 그가 내 두 뺨에 손을 올리며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다시……. 한 번만 더 해줘.”
“……제, 제레……미.”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누르며 다시 한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쿡쿡…….”
제레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들었다. 그것은 거짓으로 만들어낸 백치 미소도, 슬픔을 가리기 위한 억지 미소도 아니었다.
21살. 평범한 청년이 지을 법한 싱그럽고도 아름다운 미소.
처음 마주한 제레미 본연의 미소였다.
* * *
늦은 아침, 황자궁은 다소 북적거리는 아침을 맞았다. 시녀들은 저마다 내게로 다가와 무사하셔서 다행이라며 눈물을 쏟았다. 미래를 내다보는 크레셰라며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시녀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 중 빠진 인물을 떠올렸다. 갈색 머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할 일만 하던 조그만 키의 시녀. 소피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체르샤에게 증거를 건넨 간자였다.
소피는 황자비의 물건을 함부로 빼돌린 죄를 물어 어젯밤, 황궁에서 쫓겨났다.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이 참작되어 중죄를 받는 것은 면했다고.
반면 체르샤는 카렌을 죽인 범인으로 몰려 곧장 지하 감옥에 갇혔다. 전날 내가 갇혀 있던 바로 그 감옥이었다.
내가 있던 그날은 뜻밖에도 황자님, 황태자님 등 꽤 많은 사람이 드나들긴 했었으나, 사실 중죄인을 가두는 곳인 만큼 지하 감옥은 경계가 삼엄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어제 새벽 체르샤가 사라졌다고. 찜찜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황자비님?”
생각에 잠겨 있던 차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는 센이 보였다.
“어? 왜?”
“잠옷 갈아입으시는 것 도와드리려고요. 그런데…… 말이죠.”
그녀가 내 잠옷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곤 잠옷 리본이 왜 이렇게 꼭꼭 여며져 있는 것이냐며 속상해했다.
“응? 그게 왜?”
“어제 저희가 잔뜩 힘을 주고 갔는데. 아무 일 없으셨어요?”
“무슨 일?”
“거사요, 거사!”
거사?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센이 답답하다는 듯 야시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선 속눈썹을 파닥파닥.
“뭐……?! 그, 그런 건 없었어!”
얼굴을 화르륵 붉히며 소릴 높였다. 그러자 드레스룸에서 옷을 고르던 시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없었다고요? 두 분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신혼인데?”
“제 친구도 이번에 결혼했는데요, 걔들은 장난 아니에요. 밤마다-.”
“아아! 그, 그만!”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내용을 듣게 될 것만 같아 다급히 시녀를 말렸다. 그러자 시녀들이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얘네들…… 왜 이렇게 이런 데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네…….
곤란해하고 있던 그때, 센이 흑기사처럼 상황을 정리했다.
“얘들아. 다 나가줄래? 황자비님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황자비님, 그래도 되죠?”
“으, 응.”
잠시 후 시녀들이 나가고 드레스룸 안에 센과 나 둘만이 남았다. 뭔가를 단단히 벼른 표정인데. 무슨 폭탄 발언을 할지 몰라 좀 떨렸다.
“그럼 두 분…… 전혀 그런 기류가 없는 거예요? 단 한 번도?”
“……!”
센의 돌직구 같은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첩자로 왔는데 그런 걸 할 리가 있나.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혼하고도 초야를 보내지 않는 건 황실에서 전례가 없다시피 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하……하, 하긴 했어.”
“안 하셨네요.”
“……!”
난 했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센은 안 했다는 데 확신하는 눈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뭐, 뭐가?”
“이쪽에서 조처를 해야죠! 황자비님께선 저같이 유능한 시녀를 두셔서 다행인 줄 아세요!”
센이 콧김을 뿜었다. 결혼도 이혼도 재혼도 다 해봤다면서 자기만 믿으라고 말했다.
센이 이토록 열정을 보이는 건 단언컨대 오늘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