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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고백 (74/120)

74. 고백

“언니이!”

폴짝폴짝 뛰어오고 있는 소녀는 카렌이었다. 내가 있는 앞까지 달려온 카렌이 두 팔을 벌려 나를 보호하듯 막아섰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카렌을 쳐다보았다. 기억 상실에 걸려 온종일 방 안에만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아버님, 황자비 언니를 풀어주세요. 언니는 저를 해친 게 아니라 구해준 사람인걸요.”

“카렌, 기억이 돌아온 것이냐?”

“네, 아버님. 저 이제 다 기억해요. 누가 저를 구해줬는지, 그리고 누가 절 해쳤는지.”

카렌의 조그마한 얼굴이 체르샤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체르샤의 얼굴은 백지장보다도 더 하얘졌다.

카렌을 따라 고갤 돌렸던 황후가 얼굴을 굳혔다. 설마. 작은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충격에 휩싸인 그녀가 카렌의 대답을 재촉했다.

“카렌, 어서 말해 보거라. 누가 감히 너를 해치려 하였는지!”

“저 사람이에요. 저기 저 빨간 머리 여자요.”

카렌의 증언에 뒤숭숭했던 재판장 안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었다. 귀족들이 크게 술렁이고, 체르샤에게 이목이 집중 되었다.

“저, 저는 아닙니다! 범인은 저, 저년입니다! 황자비 저 여자라고요!”

체르샤가 거세게 저항할수록 장내는 싸늘해졌다. 이윽고 입을 연 황제가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체르샤를, 감옥으로 데리고 가라.”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체르샤는 결국 기절한 채로 기사들에게 업혀 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나간 이후로도 귀족들의 술렁임은 잦아들지 않았다.

귀족들은 하마터면 황족시해범으로 몰릴 뻔했던 나를 동정하는 한편, 크레셰라는 사실에 선망의 눈길을 보내왔다. 나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압박감도, 베일 듯 예리한 비난의 시선도 사라진 채였다.

재판에서 이길 것을 확신하긴 했으나, 이 정도로 잘 해결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건 아마도 카렌이 기억을 찾은 덕이겠지.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녀님, 어떻게 기억을 찾게 된 거예요……?”

“히히. 비밀이야.”

비밀이라고 말하며 카렌이 내 뒤쪽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는데, 청명한 은빛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자님……?”

제레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늦어서 미안해, 신부야.”

그가 단정한 손길로 내 몸을 두른 포승줄을 풀어나갔다. 세게 한다고 다치는 것도 아닌데. 그의 손길은 내내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이윽고 몸을 결박한 줄이 다 사라지고,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몸이 가벼워졌다.

“훨훨 날아갈 것만 같네요. 감사합니다, 황자님.”

“내가 어떻게 네 감사를…… 받아.”

내 말에 제레미가 힘겹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가의 근육이 움직이며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황자님……?”

“이번엔 내가 지켜주려고 했는데.”

깜짝 놀라 눈물을 닦아주려는데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 나는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넌 내 보호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구나.”

“…….”

“네가 내 품에 숨어준다면 난 그것대로 또 기쁠 테지만…….”

제레미가 고개를 숙인 채 내 귓가에서 읊조렸다. 주변이 소란스러웠지만, 귓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너의 이런 강한 모습도 좋아.”

좋다는 그의 말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품에서 떼어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확인 도장을 찍듯, 그가 다시 한번 더 고백을 해왔다.

“사랑해, 힐레인.”

제레미의 붉어진 눈가에 말간 이슬이 맺혔다. 사랑해, 달콤한 그 한 마디에 흘러내린 눈물이 별처럼 반짝였다.

* * *

황자님이 자꾸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탕을 머금은 것처럼 달콤하게. 거부할 수 없는 애절한 눈을 하고서.

다행히 황자님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 탓에 그 이야기를 들은 건 나 혼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고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최애의 사랑 고백은 심장에 치명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킬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잘 방어할 수 있겠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욕실을 나왔다.

비척비척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내의를 챙겨입은 후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센……? 잠옷이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센이 내게 입힌 잠옷은 리본이 무지하게 많이 달린 잠옷이었다. 하나하나 손으로 리본을 엮어야 하는 탓에 시녀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맞아요, 제가 야심차게 고른 잠옷이랍니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을 위해 미리 사두었었죠, 후후.”

“응?”

“자, 오늘을 위해 향유도 새로 준비해두었어요. 조금 진하긴 한데, 요즘 귀부인들 사이에서 인기래요. 특별한 날에 쓰기 좋다고.”

“대체 특별한 날이 뭔데? 내가 실종되었다가 돌아와서?”

“네, 두 분 오랜만에 다시 만나셨잖아요.”

음, 오랜만에 만난 거랑 잠옷과 향유가 무슨 관련이 있지? 궁금했지만 센의 즐거움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질문을 삼켰다.

센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파이팅!’이라 말하며 사라졌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기합이 든 것인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황자님 얼굴을 보고 잠에 들려고 했는데, 어느덧 의식이 흐려졌다.

* * *

늦은 저녁, 제레미는 황후의 티룸에 있었다. 그는 조금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낯설고도 익숙한 공간을 눈으로 살폈다.

황후궁의 티룸은 어린 시절 유디트, 아인, 그리고 자신이 자주 머물렀던 곳이었다. 어머니 트릭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뒤엔 불안하게 손을 꼼지락거리던 곳이었고.

엘리샤가 황후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티룸의 분위기가 많이 바뀐 상태였지만, 과거의 기억이 깃든 곳이라 그런지 낯섦은 금세 사라졌다.

제레미는 단정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몸에 밴 완벽한 예법 하나하나에 엘리샤의 시선이 닿았다.

“내 앞에서는 이제 백치 연기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냐.”

“이미 다 알고 계실 테니까요.”

제레미는 엘리샤의 앞에서 굳이 연기하려 하지 않았다. 기억 소거 마법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리샤는 카렌을 고쳐준 은인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을 테니까.

“카렌의 기억상실을 고쳐준 게 자네인가.”

차를 한 모금 삼킨 엘리샤가 눈을 잔잔히 빛내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일 년 전쯤. 카렌의 독을 해독시켜준 것도 자네겠지.”

제레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차를 머금었다. 그 속에 담긴 무언의 긍정을 읽어낸 엘리샤는 고마움, 그리고 죄책감이 담긴 시선으로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내 너를 미워하였는데……. 어쩔 수 없는 트릭샤의 자식이라며, 상처받은 널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이해합니다. 저 역시 그분을 미워했으니까요.”

“제레미.”

“괜찮습니다. 친어머니의 악행을 가장 가까이서 봤던 게 바로 저입니다. 그녀에게로 가야 할 화살이 제게 왔다고 해서 원망의 감정이 들진 않습니다. 그 사람의 피를 이은 아들로서, 마땅히 감내해야 할 비난이었죠.”

엘리샤는 트릭샤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악행에 친언니처럼 여겼던 유디트는 광인이 되었고, 그녀의 아들인 아인 또한 어린 나이에 슬픔을 겪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지금의 카렌보다도 더 어렸던 제레미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보살피긴커녕 미워하고 방치했다. 죄인의 아들 역시 죄인이라며.

그런 자신을 원망할 법도 한데.

제레미는 자신의 딸을 살려주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딸을 살려주었는지도 모르지.

황후는 제레미의 곧고 맑은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앞으로 자신이 지켜야 할 자가 누구인지 가슴에 담으려는 듯.

“제레미. 못난 어미지만 앞으로 영원히, 네 편이 되어줄 것을 약속하겠다.”

엘리샤의 진심 어린 말에 제레미는 조금은 어색해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잔잔히 미소를 짓던 그는 조금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 말고…… 황자비의 편이 되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그녀가 제 심장이고, 제 목숨입니다. 저를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은 그녀를 지켜주는 것으로 대신해주셨으면 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절절해지는 고백에 엘리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심장이고, 목숨이라…….”

제레미의 말을 되뇌던 엘리샤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알겠네. 내 그리하지.”

서로를 지켜 주려 하는 부부라.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황후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힐레인. 짝사랑이 아니라 마주 보는 사랑이었구나.’

* * *

제레미는 황자궁으로 향하며 품에서 약병을 꺼내 들었다. 조그만 알약으로 들어찬 그것은 제약을 일시적으로 없애 주는 알약이었다.

“황자님, 꼭 그 약을 드셔야 합니까?”

“한 번 복용한 이상, 주기적으로 약을 먹어줘야 해. 제약이 스스로 풀릴 때까지.”

“하지만……. 흑마법상에서 사온 거라 기분이 찝찝합니다.”

레틴은 이틀 전 찾아갔던 흑마법상을 떠올렸다. 으슥한 골목에 자리 잡은 검은 가게는 구석구석 흑마법에 침식당한 듯 음기가 흘렀었다.

악의 소굴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이윽고 가게 주인이 나왔을 때, 레틴은 기겁하고 소리를 지를뻔했다.

가게 주인은 온통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안에서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소매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검은 피부는 냄새의 출처가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제레미에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애걸복걸했으나 끝내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마법의 제약은 권능을 엿본 인간에게 내리는 신의 벌. 그것을 강제로 상쇄시키는 건 오직 이 흑마법뿐이죠.]

그렇게 말하며 주인이 내민 것은 조그만 알약 병이었다.

[이 약이 일시적으로 제약을 풀어드릴 수는 있으나, 그것은 섭리를 벗어난 일입니다. 필시 부작용이 따를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흐음……. 알겠습니다. 약을 드리지요. 대신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싶으시다면 이 약을 꾸준히 드십시오. 혹여라도 약을 드시지 않게 될 경우 다시 소년의 몸으로 돌아갈 것이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고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제약이 스스로 풀리기 전까지는 절대 약의 복용을 중단하시면 안 됩니다.]

상인은 제법 매서운 경고를 달았다. 하지만 제레미의 앞에서 그것은 무용지물이었다. 약을 평생 먹어야 하는 불편함은 힐레인을 잃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부작용을 감수할 정도로 반드시 제약을 풀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유, 이유라. 먹먹한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어 대답을 삼켰었다. 언제가 되더라도 완벽한 대답을 찾지는 못하리라.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생겨난 울림과도 같은 것이니까.

상념을 깨며 제레미가 약을 한 알 입에 넣었다. 벌써 두 번째 복용하는 것이었으나 혀가 아리는 쓴맛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돌이킬 수 없다는 듯 몸 안에 싸하게 퍼지는 약 기운 또한 그랬다.

미간을 찌푸린 채 걸음을 옮겼다. 침실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내내 펴지지 않던 표정은 침대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힐레인을 본 순간 사르르 풀어졌다.

‘……이게 그 이유야.’

제레미는 저를 기다리다 잠이 든 사랑스러운 신부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난롯불에 몸을 녹인 듯한 안온한 감각이 몸을 뒤덮었다.

그녀가 있는 풍경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와 결혼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반. 길고 지루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기간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제 없어선 안 될 일상이 되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마치 오랫동안 제 곁을 맴돌았던 것 같다.

제레미는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걸음을 재촉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침대 기둥에 불편하게 몸을 기댄 힐레인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던 가운이 바닥으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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