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성장
다음날, 황실에 유례없는 규모의 재판이 열렸다. 수십 명의 귀족이 양옆으로 즐비한 가운데, 나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대역죄인 같네.’
귀족들의 호기심과 적대감 어린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들었다. 층계를 이루는 기단의 가장 높은 곳엔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아래엔 아인이 있었다.
아인의 맞은편은 아마도 제레미의 자리일 것이나, 백치라는 이유 때문인지 공석이었다.
‘이상하다…….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식적으로 손등을 문질렀다. 제레미가 손등에 키스했던 것이 떠올라서.
[모든 건 내가 사랑하는 여신님의 뜻대로.]
그 말이 소원을 이루는 주문처럼 느껴져서일까. 죄인의 자리에 있음에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나, 정말로 이 재판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당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판관이 재판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증인은 증거를 제출하십시오.”
의기양양한 표정의 체르샤가 앞으로 나와 판관에게 증거를 제출했다. 나를 보는 체르샤의 시선에 짙은 비웃음이 서렸다.
그리고 잠시 후. 체르샤의 증거를 토대로, 황후파는 내가 범인이라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그중 가장 열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사람은 황녀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샤를 후작, 그리고 체르샤의 든든한 뒷배인 레이몬드가였다.
“증거물엔 폭탄이 터질 날짜와 위치가 적혀 있습니다. 표적인 황녀님에 대한 정보도 적혀 있죠. 황자비님이 범인이 아니라면 왜 이런 정보를 종이에 적어놓았겠습니까?”
“증거물에 써진 내용을 보면 아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던 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거의 피를 토할 듯 나의 유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황제의 집무실에서 들었던 내용이라 그런지. 나에겐 지루하게만 들렸다.
“하흠.”
“저, 저런!”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하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딱히 황후파를 도발하고자 한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걸 보니 의도치 않게 타격을 입힌 듯 보였다.
샤를 후작은 몰라도, 체르샤를 비롯한 레이몬드가의 표정을 볼 땐 속이 후련했다.
이윽고 내가 변론할 차례가 다가왔을 때, 나는 지루한 얼굴을 지우고 심호흡을 했다.
“저는 이번 폭발 사건의 범인이 아닙니다.”
혀를 차는 소리와 탄식이 이어졌다. 반응을 보니 이미 대부분이 나를 범인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쯧쯧……. 증거가 확실한 마당에 그냥 순순히 인정하시지요…….”
“뉘우치는 모습이 보이면 감형이라도 받을 수 있을 터인데.”
내 편 하나 없는 곳에서 홀로 싸우려니 솔직히 조금 주눅이 들긴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기 위해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증거물 중 폭탄이 그려진 약도를 확대해 주시겠습니까? 모두가 볼 수 있게요.”
내 요청에 레이몬드의 진득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내 죄를 증명하는 증거를 되레 크게 보여달라고 말하는 게 바보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도 체르샤가 가장 즐거워 보였다. 흘끔 시선을 주자, 그녀가 ‘저런 허술한.’ 하고 입 모양을 만들었다.
허술한 그림자 기사. 그래 뭐, 인정한다. 전투 외의 능력에서는 다소 허술한 면모를 보여왔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회귀를 거듭하며 나도 보고 배운 것들이 있다. 제레미의 옆에서, 아인의 옆에서.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두 사람의 대립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 봐왔던 내가. 아무런 성장도 없이 허술한 채로만 머물러 있었겠는가.
나는 마법에 의해 증거물이 확대될 동안 턱을 당기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제레미가 자기 생각을 말할 때처럼 곧고 올바르게. 거기에 아인의 오만함을 더해서.
잠시 후 증거물이 마법에 의해 확대되어 나타났다.
“황자비. 네 말대로 증거물을 확대했노라.”
“감사합니다, 폐하. 저 약도는 저를 범인으로 몰아세웠지만 사실 제 죄를 벗을 수 있는 절대적인 증거이기도 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약도를 자세히 봐주십시오.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약도 위에 집중되었다. 뭐가 이상하지? 라고 중얼거리던 귀족들도 잠시 후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한 것인지,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폭탄이 표시된 위치가…… 이상하지 않소?”
“정말 그렇군요, 저대로라면 광장의 시계탑 부근이 완전히 폭파되었어야 맞는데…….”
술렁임이 잦아들자,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로 쏠렸다. 완전히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모두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크고 또렷하게.
“예, 표시된 폭탄의 위치와 실제 폭탄이 터진 장소가 다를 것입니다. 약도에 표시된 곳에서는 단 하나의 폭탄도 터지지 않았죠.”
“확실히 그렇군……. 어째서 그러한 것이지?”
황제가 턱을 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골칫덩어리처럼 쳐다보더니, 이제는 그의 눈에 미약한 기대가 깃든 게 보였다.
“제가 폭탄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폭탄을 설치한 게 아니라…… 제거를 한 것이라고?”
“예, 폐하. 약도에 표시된 스무 개의 폭탄은 전부 제가 제거한 것들입니다. 헤렌 축제에 폭탄이 터질 거란 걸 예측했었거든요.”
“폭탄이 터질 것을 예측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자비.”
황제가 팔걸이를 움켜쥔 채 몸을 앞으로 당겨왔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거짓말을 조금 섞어서 이야기해야 했기에, 조금 긴장한 채로 입을 열었다.
“제가 폭탄이 터질 걸 알게 된 건 예지몽 때문입니다.”
회귀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예지몽이라는 방법을 빌리기로 했다. 예지몽을 꾸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긴 했으나, 전혀 없는 건 또 아니니까.
예지몽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를 뜻하는 ‘크레셰’로 불렸다. 이들 대부분 역사서 또는 영웅전에나 등장할 아주 대단한 위인들이라,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일단은 살고 보는 게 우선이라 거짓말을 멈추진 않았다.
“저는 가끔 미래를 예언하는 꿈을 꾸곤 합니다. 그리고 몇 주 전 광장에서 폭탄이 터지는 꿈을 꾸었었죠. 꿈을 토대로 약도를 그렸고, 제가 본 모든 폭탄을 제거했습니다. 저 약도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내 말에 곧장 황후가 반박했다.
“예지몽이라니! 황자비는 죄를 면하기 위해 허황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구나!”
“황후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예지몽은 역사서에서나 등장할 법한 전설의 능력입니다.”
“설령 예지몽을 꾼 거라 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황자비님께서 이를 미리 내다보셨다면 어째서 황실에 미리 언질을 주지 않으신 겁니까? 직접 제거하는 것보다 황실에 이야기하는 것이 더 빨랐을 텐데요!”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반박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미리 생각했던 대로 조곤조곤 그들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그 또한 꿈속에서 미리 엿보았기 때문에 보고치 않았습니다. 꿈에서 저는 광장에 심어진 폭탄을 증거로 보여드렸으나, 되레 범인으로 몰리기만 할 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폭탄을 제거했던 것입니다.”
“……황자비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폭탄을 제거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예지몽은 꿈을 꾸는 그 시점에서 발현된 미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꿈을 꾼 이후 누군가의 의지가 변했다면 미래도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진범이 새로이 폭탄을 심어둔 것이겠지요. 송구하오나, 여기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예지몽이라니…… 황자비님께선 본인이 무슨 크레셰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체르샤가 코웃음을 쳤다.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시선이 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내 말에 동요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에 불안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벌써 부터 이러면 곤란해, 체르샤. 난 아직 준비한 거에 반도 채 안 보여줬는걸.
“죄송하지만 증거물을 조금 더 확대해 주시겠어요?”
잠시 후 작은 글씨까지 볼 수 있도록 증거물이 확대되었다.
“맨 아랫줄을 한 번 봐주십시오. ‘노란 드레스에 아칸서스 자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을 것입니다.”
“노란 드레스에 아칸서스 자수…….”
황후가 깜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그날 황녀님께서 입으셨던 드레스입니다. 예지몽이 아니라면, 제가 어찌 황녀님이 입을 드레스를 미리 알고 있었겠습니까?”
“시녀를 통해 미리 정보를 빼돌렸던 거겠죠.”
다급해진 체르샤가 내 말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황후는 그런 그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럴 리 없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 차를 쏟는 바람에, 카렌은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했다. 시녀를 통해 정보를 얻은 것이라면, 처음에 입었던 드레스가 적혀 있어야 옳다.”
“화, 황후 폐하. 속으시면 안 됩니다! 그, 그깟 드레스가 무어라고……. 증거도, 증인도 없는 황자비의 말에…….”
“증인이라면 여기 있습니다만.”
그런데 그때 치열한 공방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핑크빛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싱글싱글, 본래의 미소를 되찾은 도베르는 자신이 말할 차례가 온 것이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저는 도베르 하이만이라고 합니다. 제게 황자비님의 주장을 증언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도베르가 황제의 앞으로 나와 예를 갖췄다. 정중하고 완벽한 예법이 증인으로서의 신뢰감을 더했다.
도베르를 흥미롭게 주시하던 황제가 이번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이라는 듯,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도베르 경은 황자비의 주장을 증명해 보라.”
“약 2주 전쯤, 황자비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반신반의한 마음에 광장으로 나갔더니 황자비님의 말씀대로 정말 폭탄이 숨겨져 있더군요. 아공간 보관함에 넣는 게 좋다고 판단하여, 스무 개의 폭탄을 모두 이 반지에 보관했습니다.”
도베르가 은색의 반지를 꺼냈다. 이를 받은 시종이 황제에게 전달했고, 이후 황후에게로 전해졌다.
“이……이건 황녀를 발견했던 반지가 아닌가.”
“예, 폭탄 스무 개와 함께 황녀님이 들어 있었던, 그 반지입니다.”
반지를 살핀 황후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었다. 연한 빗금이 간 은색의 반지. 카렌이 발견되었던 아공간 보관함이었다. 카렌이 왜 그 반지 안에서 발견되었던 건지 궁금증이 풀리지 않던 차였는데…….
“그렇다는 건…….”
“황자비님께서 황녀님을 구하셨습니다. 폭발 당시 황녀님을 반지 안에 넣었다고 하시더군요. 기지가 참 뛰어나신 분이죠.”
도베르가 내 쪽을 향해 윙크를 해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비실비실해 보이더니. 오늘은 금방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활기가 넘쳐 보였다.
“정말로 네가…… 우리 카렌을 살린 것이냐?”
황후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의 도움으로 계단을 내려온 그녀가 내가 있는 앞까지 다가왔다.
“황후 폐하, 아직 용의자의 신분을 벗지 못한 황자비님에게 다가가는 것은 위험……!”
“비키거라!”
황후가 고운 손으로 기사 두 명을 밀쳐냈다.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은 그녀에게 이런 힘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황후는 내 앞으로 넘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포승줄에 묶인 내 두 손을 꼬옥 붙들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를…… 범인으로 몰아세웠는데.”
겨울의 차디찬 얼음 같던 표정이 봄눈 녹듯 녹아내렸다. 기분이 묘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사람이, 지금은 온 마음으로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아니. 많이 기뻤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반가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