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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엇갈림 (72/120)

72. 엇갈림

때렸느냐는 질문에 기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대답을 내어놓지 않자, 구두에 밟힌 손등 위로 무자비한 힘이 가해졌다.

“윽!”

“그녀를 때렸냐고.”

배시시 웃기만 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제레미는 백치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가혹한 표정이 되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 아닙니다!”

기사가 미친 듯이 도리질을 쳤다. 때리지도 않았지만, 여기서 때렸다고 말하면 그대로 황천길을 걸을 것만 같았다.

“오히려 다친 건 저흽니다. 여, 여기 보십시오! 머리에 혹이며…… 다리에 멍까지. 저희는 황자비님께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기사가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연신 해명했다.

진실을 가늠하듯 연보랏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기사는 백치인 줄로만 알고 있던 황자의 또 다른 모습에 눈을 껌뻑였다.

“으음…….”

그런데 그때 감옥 안으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큰 소리에 힐레인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제레미는 기사에게 기억 소거 마법을 건 후, 곧바로 힐레인에게 다가갔다.

“응? 황자님……?”

“응, 나야.”

제레미가 잠에서 깬 힐레인을 끌어안았다.

맞댄 몸을 통해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많이 추웠던 걸까. 제레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힐레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자님?”

힐레인은 자신의 등장에 몹시도 당황한 듯 보였다.

토끼처럼 커진 눈이 귀여웠다.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담아낸 붉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워, 제레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간지러운지 힐레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랑 떠나자, 힐레인.”

“……네?”

“힘들게 이곳에서 버틸 필요 없어. 황궁도, 황태자도 다 뒤로한 채 떠나자.”

“…….”

제레미의 말에 힐레인의 몸이 굳었다. 힐레인은 제레미가 감옥에 와 있는 것도, 백치 연기를 그만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입 밖으로 나온 물음은 몹시도 짧았다. 하지만 제레미는 다 알아들은 것처럼 깊은 눈동자로 힐레인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해서.”

“네?”

“사랑해, 힐레인. 내가, 너를. 목숨보다도.”

끊어질 듯 말 듯, 간지럽고도 애절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방금…… 사랑한다고?’

제레미의 고백에 힐레인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붉은 눈동자가 제레미 너머로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형편없는 모양새로 뜯겨나간 창살을, 마지막으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제레미를 스쳐 지나갔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힐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당겼다. 제레미의 마음에 응할 자신이 없었다.

‘제레미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똑같이 사랑한다고 대답해 줄 수 있어?’

아니, 그럴 수 없다. 맑고 드높은 하늘 같은 이 남자와 달리, 자신은 시궁창을 뒹굴다 온 첩자에 불과했다. 참 많은 사람의 피로 손을 더럽힌.

이런 더러운 손으로, 자신이 무슨 염치로 제레미의 손을 맞잡을 수 있을까. 깨끗한 그의 손에 되레 피만 묻히게 될 게 분명했다.

더 길게 생각지 않은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죄송하지만, 못 들은 거로 할게요.”

제레미의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거절당할 걸 예상한 듯 큰 동요가 없었다.

“힐레인.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건 괜찮지만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할 거야. 일단은 이곳을 떠나자.”

“죄송해요, 황자님. 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내일 재판에서, 죄를 짓지도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일 자신도 있어요.”

“만약 잘못되면?”

“절대 그럴 리 없어요. 그러니 황자님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감옥을 습격했단 사실이 발각되면 황자님께도 좋지 않아요.”

“……나를 걱정하는 거야?”

제레미의 직선적인 물음에 힐레인이 몸을 움찔했다.

‘어제 다 눈치채셨겠지? 내가 황자님을 돕고 있는 걸.’

힐레인이 입을 꼬물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더는 숨기지도 못할 사실이었다.

“……정말?”

제레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조금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의 안에서 충돌했다.

잠시간 말이 없던 제레미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말간 눈물이 방울방울 아래로 흘러내렸다.

“……!”

그 모습에 놀란 힐레인이 허둥지둥하며 제레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이럼 안 돼.’

제레미의 눈동자가 어떠한 기대감으로 물드는 걸 본 그녀가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레미가 힐레인의 손을 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촉촉해진 손끝을 보며 제레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이러면 나는……. 억지로라도 너를 데려 나가고 싶어져.”

제레미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발언에 힐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안 되죠!”

힐레인의 말에 제레미가 시무룩하게 고갤 숙였다. 연분홍빛 입술이 삐죽이는 게 보였다. 그 순간 힐레인은 가슴이 울렁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마터면 귀엽다고 말할 뻔한 그녀는 다급히 숨을 삼켰다. 다행히 제레미는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나도 알아. 어차피 나는 네 말을 거역하지 못해.”

“……!”

“대신…… 너를 도와줄게. 재판에서 이기는 거든 뭐든.”

제레미가 힐레인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힐레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 위로 처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모든 건 내가 사랑하는 여신님의 뜻대로.”

* * *

‘황자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진짜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제레미가 가고 혼자 남게 되자, 그 사실이 이렇게 간지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뜨거워진 뺨을 꾹꾹 누르며 감옥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꿈인가 싶어 팔을 세차게 꼬집어 봤으나, 너무도 생생한 현실 속이었다.

‘날? 왜? 언제부터?’

회귀 전에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놓고 제레미를 도왔던 두 번째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그는 내게 무척이나 상냥하고 다정했지만,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럴진대 세 번째 생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이 시점에, 그가 날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감정의 이유도, 시작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황자님? 아무리 제가 매력이 넘쳐도 그렇지. 첩자를 사랑하면 어떡해요?’

매력이 넘치긴 해도, 알고 보면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데. 제레미가 몰라서 그렇지. 나는 회귀 전, 그를 죽일뻔한 적도 있다고?

받아줄 수 없다. 몇 번이고 속으로 읊조렸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게.

이럴 땐 자는 게 최고라 생각하며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홀로 감옥 안을 분주히 맴돌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제레미가 마음을 바꾸고 다시 온 걸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복도의 모서리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아인이었다.

‘황태자님이 왜 이런 곳까지?’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카렌을 죽이는 계획에서 카렌을 살리고, 장례식은 무효로 만들어버렸다. 아인이 하는 일마다 딴지를 걸었으니 그가 어떤 포악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이윽고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멎고, 철창의 문이 열렸다.

‘안까지 들어오시려나?’

간이침대에서 돌처럼 누운 채 불안에 떨었다. 이러고 있으니 꼭 도마 위의 생선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인이 무어라 말을 꺼낼지, 무슨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

두 눈을 꾹 감고 아인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였다. 목 부근으로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나를 죽이려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의 손엔 전혀 힘이 가해지지 않았다. 마치 유리잔을 다루듯 손안에 가볍게 쥐기만 할 뿐이었다.

“죽이려고 했는데.”

이윽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떻게 해야 너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나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니. 그건 아인에게 숨 쉬듯 쉬운 일이 아닌가. 손만 까딱해도. 아니, 맹세의 보석에 짧게 명령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죽일 수 있을 텐데. 왜?

어쩐지 아인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니,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충동을 참지 못하고 스르륵 눈을 떴다.

“…….”

“…….”

고작 시선을 마주쳤을 뿐인데. 아인의 금안이 잘게 흔들렸다. 그 순간 그에게 강한 타격이라도 준 것마냥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 모습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여,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아인이 서늘한 표정으로 내 손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짓이냐.”

그러니까.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퍼뜩 손을 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렀다.

“왜 죽일 수 없다는 겁니까?”

“죽고 싶었던 것이냐.”

“그게 아니라…… 배신자를 살려둔 적이 없지 않습니까.”

“배신이라. 참 쉽게도 인정하는구나.”

아인의 눈빛이 일순간 서늘해졌다. 지은 죄가 많았던 탓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황태자의 여동생을 살린 은인이 아닌가.

생각해 보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억울했다.

카렌을 살렸는데 오라버니란 놈은 내 목을 휘어잡지를 않나. 어머니 되는 사람은 나를 범인으로 바락바락 몰아세우지를 않나.

울컥한 마음에 미세하게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사실 배신은 아니죠.”

“뭐?”

아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황태자님의 예쁜 동생을 구해준 게 누굽니까? 바로 저 아닙니까?”

“내가 카렌을 죽이려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몰랐…….”

“거짓말이 늘었구나, 힐.”

한층 더 서늘해진 아인의 말투에 나는 곧장 말을 고쳤다.

“몰랐던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랬느냐. 나를 배신하기로 작정한 것이더냐.”

“아닙니다. 저는 그저 황녀님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황태자님과 관련이 있다면 황녀님이 황태자님의 동생이라는 것, 그뿐. 딱히 황태자님을 배신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

“지금이야 젊어서 모르시겠지만, 먼 훗날 호호 할아버지가 되면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실 겁니다. 그땐 제가 얼마나 옳은 결단을 내렸는지 이해하실 거고요.”

아인은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곤 지독히 고요한 적막뿐이었다.

“고로 배신이 아닌, 황태자님을 위한 일이 되겠네요.”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는 그에게 탄력을 받아, 주절주절 몇 마디를 더 읊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내리깐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

“죽이는 건 보류하지, 하지만 힐. 네가 이번 일로 나를 배신했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

“황자비 임무를 그만둘 준비를 하거라. 내 더는 너를 쓰지 않을 것이니.”

아인이 차갑게 뒤를 돌아섰다. 뒤늦게 그러지 말라고 외쳐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멀어지는 아인의 걸음 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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