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구둣발
다급히 말을 달려 장례 행렬을 멈춰 세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계속 제레미의 곁에 남을 방법은 이거 하나뿐이었다. 다시 황자비가 되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이 말도 안 되는 장례식부터 뒤엎어버려야 했다.
황후가 나를 가만두지 않겠지만, 이에 대해 생각해둔 것도 있었다. 이번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면서도 황자비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장례 행렬을 멈추십시오!”
행렬의 선두를 막아 세우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졌다. 갑작스레 행렬이 멈춰지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제국민들이 술렁였다. 소란 속을 헤치고 기사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 얼굴을 못 알아본 것인지, 기사들은 곧장 내게 창을 들이댔다. 덕분에 나는 바닥에 엎어지듯 꿇어앉게 되었다.
“누구냐!”
“황자비인데.”
누구냐고 묻기에 알려줬더니. 기사는 되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뭐, 뭣? 이런 미친 인간을 보았나. 감히 돌아가신 황자비님을 모독하다니.”
내 몸을 압박한 창에 힘을 들어갔다. 단련된 몸이라 아프진 않았지만 꿇어앉은 자세를 취한 상태라 발목에 무리가 갔다.
‘이거 확 그냥 부셔?’
반질반질한 창의 기둥을 손으로 스르륵 쓸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여봐라, 이 죄인을 당장 호송……!”
“비켜.”
조그만 손이 다가와 내 몸을 누르는 창에 손을 댔다.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었지만, 몸을 불편하게 누르던 압박감을 상쇄시키기엔 충분한 힘이었다.
나는 내게로 다가온 소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귀여운 얼굴로 고목처럼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 얀이었다.
“감히.”
자신을 막아 세운 게 꼬맹이라는 사실이 기사는 분한 모양이었다. 얀을 집어삼킬 듯한 크고 검은 그림자가 그의 위에 드리웠다. 하지만 얀은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비키라는 말, 안 들려?”
얀은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로 기사를 내리눌렀다. 조그만 체구에서 거역할 수 없는 묘한 압박감이 묻어나왔다.
“뭐, 뭣?”
“뒤로 물러서게.”
기사가 당황하고 있던 그때, 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분은 황자비님이 맞으시다.”
루가 신분패를 기사에게 보여주었다. 신분패를 확인한 기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대, 대공님? 그럼 이분이 정말…….”
기사가 미세하게 눈을 떨며 루의 뒤에 선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화, 황자비님…….”
기사가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런 대우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기사의 요란한 인사에 주변의 술렁거림이 커졌다.
“황자비님이 살아계셨어…….”
“진짜 황자비님이셔?”
호기심 어린 제국민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반은 놀라워하는 듯 보였고 반은 유령을 마주친 듯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그때. 귀를 아프게 만들 정도의 소란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황자비?”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든 그곳엔, 아인이 있었다.
시선이 허공에 마주쳤다. 순간 그의 금안에 파란 불길이 솟구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
아인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저 베일 듯 예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갑게 내리깐 금안이 쓰디쓴 배신감을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견디며 입술을 꾹 물었다. 많이 화가 났을까?
나는 내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인은 나를 배신자로밖에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인의 시선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냉랭한 시선 앞에서 작게 몸을 떠는데, 황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자비라니?”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으로 황후가 걸어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잠시간 멈칫하더니, 몹시도 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역시, 살아 있었구나.”
짙은 호선을 그리던 미소가 점차 옅어졌다. 잠시 후 서리만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기쁘게도.”
* * *
방 안을 정처 없이 걷던 제레미가 초조함에 손톱을 뜯었다.
‘힐레인…….’
황궁으로 당도하자마자 황후는 기다렸다는 듯 힐레인을 압송해갔다. 이상한 것은 황제도, 황태자도 황후의 행동을 막지 못했단 거였다.
제레미는 그 순간 깨달았다. 힐레인이 이번 사건의 죄를 뒤집어썼음을.
‘그날 황제의 집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했더니…….’
아마도 그때 힐레인을 범인으로 몰아세울 결정적인 증거가 오갔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장례식이 진행되었던 것도, 황후가 기이한 미소를 지었던 것도 이제 다 이해가 되었다.
힐레인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될 거라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도저히 그녀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인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충격이 너무 컸나? 그래서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이곳으로 걸어들어온 건가?
‘그런 거라면 내가 반드시 막을 거야, 힐레인.’
힐레인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길이 없다면 자신이 길을 만들어줄 것이다. 설령 힐레인이 발을 디딘 곳이 벼랑 끝이라 해도.
제레미 자신의 자그마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려면 우선 이 제약부터 풀어야 해.’
마법의 제약을 강제로 푸는 것. 그것은 분명 정상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힐레인을 구하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주 값싼 대가일 것이다.
뭔가를 결심한 듯 제레미가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똑-. 똑-.
나는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맣게 변한 돌 틈 사이로 검은 물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퀴퀴한 곰팡내가 맡아지는 듯했다.
‘죽은 줄 알았던 황자비가 돌아왔는데. 감옥행이라…….’
뭐,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황후가 그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데 어찌 안락한 궁에서 뜨뜻한 밥을 먹을 수 있으랴. 사실 소름 끼칠 정도로 내가 예상한 대로라, 신기할 정도였다.
황궁에 다시 발을 디뎠을 때, 황후는 곧장 내게 죄를 물을 것을 요청했다. 황후파까지 대동하여 단단히 벼른 탓에 나는 결국 재판이 있을 때까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감옥에 갇힌 지금도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허술하다지만. 계획도 없이 호랑이 소굴에 들어올 바보는 아니었다.
‘계획도 철저히 세웠고. 다 잘 될 거야.’
재판 때까지 체력을 비축해놓자는 생각에 눈을 붙였다. 어젯밤 고민을 하느라 한숨도 못 잔 탓에 절로 잠이 쏟아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 질 녘이 되어 있었다.
‘배고파…….’
음식도 음식이지만, 일단 목이 너무 말랐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어떻게 물 한 잔도 비치해두지 않았지? 감옥도 황족이 쓰기엔 너무 허름하고.
아마도 황후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었다.
“이봐요, 간수!”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자 간수 한 명이 다가왔다. 지금 보니 남자가 입은 복장은 간수들이 입는 옷이 아닌 기사복이었다.
의아함에 고갤 기울이는데 기사가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좀 가져다주겠어?”
당당하게 손을 내밀며 물을 요구했다.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곧 사형당하실 분이, 무슨 물입니까.”
“사형이라니? 나 무죄야.”
“하, 지나가는 개가 웃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황자비님.”
무죄란 말에 기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까이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우린 황후궁 소속의 기사들입니다. 그 뜻은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죠. 괜히 허튼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아, 기사복을 입고 있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황후가 자신의 사람들을 감옥에 포진시킨 거였구나.
그나저나 참 억울한 일이다.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 했고, 무죄여서 무죄라고 말하는데! 허튼수작이라니?
“허튼수작이 아니라 목이 말라서 그런 거라니까? 그러지 말고 물 한 잔만 줘. 네 말대로 사형을 당하려면 그때까지 살아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응?”
“이런, 뻔뻔한!”
“아니, 그러지 말고오!”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기사의 다리를 와락 붙들었다. 기사는 몇 번의 저항에도 꿈쩍 않는 손을 보며, 몹시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놓으십시오!”
어라? 기사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나는 내 손에 붙들려 낑낑대는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물 주면 놓아줄게.”
“절대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 놓으라니까요!”
“아아! 좀 주라!”
기사와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기사는 여자 힘이 왜 이렇게 센 거냐며 비명을 질러댔고, 이윽고 다른 기사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우와악!”
때마침 벗겨져 버린 신발에 기사가 넘어지고, 다른 기사들까지 와르르 뒤로 넘어져 버렸다.
“으윽, 내 허리.”
“아이고, 뒤통수야.”
기사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좁은 복도를 뒹굴었으니, 여기저기 안 부딪친 곳이 없을 터였다
“……?”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한데 엉킨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얼떨결에 기사의 신발을 품에 안은 채로.
‘난 정말 다리만 살짝 잡았을 뿐인데.’
잘못했다간 괜한 불똥이 튈 것 같아, 슬쩍 철창 밖으로 신발을 던져버렸다.
요즘 기사들, 참 약하단 말이지. 옷에 묻은 신발 자국을 털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소란이 일어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각, 기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철창 안의 황자비를 바라보았다.
“쿨…….”
힐레인은 태연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사형수가 될지 모를 큰 재판을 앞두고, 저렇게 태평할 수가 있다니? 셔츠 여기저기 묻은 신발 자국과 얼굴의 땟국만 아니었다면, 안방에서 누워 자는 거라 생각될 정도였다.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어찌 됐든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닌 건 틀림없어 보였다. 솔직히 너무 걱정이 없어 보여서, 무죄라는 주장이 진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쯧……. 재판 이후엔 무슨 표정을 지을지.”
기사들이 절레절레 고갤 저으며 돌아섰다. 하지만 그들은 제자리로 복귀할 수 없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한 남자 때문에.
“……!”
기사들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일제히 정신을 잃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침입자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채였다.
또각-.
잠시 후 바닥을 울리는 차가운 걸음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 드러난 머리카락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천사 같은 얼굴로 무자비하게 기사들을 기절시킨 제레미가,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윽고 힐레인이 있는 감옥 앞에 다가온 제레미는 그녀의 처참한 몰골에 아연실색했다.
“힐……레인.”
돌바닥보다 못한 간이침대에 힐레인이 누워있었다. 기절하듯 잠이 든 모습에 노곤함이 묻어나왔다.
게다가 셔츠에 묻은 저 구두 자국은 다 뭐란 말인가. 가슴팍이며, 팔이며. 누군가에게 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제레미가 힐레인에게서 시선을 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기절한 기사의 손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으윽!”
정신이 든 기사를 제레미가 벽으로 몰아세웠다. 기사는 차마 비명을 내지를 수조차 없이 놀란 상태였다.
“황자님……!”
“때렸어?”
한겨울 서리보다도 차가운 시선이 기사에게로 못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