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날 죽일 거예요?
‘저게 왜 저기서 나와……?’
카렌을 구하기 위한 대강의 계획을 적어두었던 종이. 해석에 따라 내가 카렌의 시해범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에 철저히 관리를 해왔었다.
그런데 왜 저 종이가 저기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시녀들이 손대지 않는 곳에 숨겨두었고 위치도 자주 바꿔 관리를 해왔었다. 최근엔 전부 불살라버리기까지 했는데…… 저게 어떻게…….
‘내가 태웠던 게 원본이 아니었던 건가?’
아마도 내가 태운 것은 필적을 베낀 가짜였던 모양이다. 저렇게 원본이 버젓이 남아 있는 걸 보니.
‘하……. 철저하게도 준비했네, 체르샤.’
나는 엘리샤의 뒤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체르샤를 쳐다보았다.
증거를 우연히 습득했다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녀는 꽤 오랫동안, 그리고 철저히 내 약점을 찾았을 것이다. 첩자를 내 곁에 숨겨두는 과감한 짓까지 벌이면서.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시에나가 내게 독을 먹였단 걸 알았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다.
한 명일 때도 미칠 것 같았는데, 시에나 외에도 또 첩자가 있었다니. 누구지? 센? 아니면 다른 시녀? 의심을 시작하니 모두가 다 의심스러웠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제국의 죄인으로 추락하게 될 텐데.
그렇다고 직접 나서서 결백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찬찬히 주변의 사람을 살폈다.
이 중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와 연대를 맺은 황후는 체르샤의 꾐에 넘어갔으니 날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아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를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도와줄 리가……. 일찌감치 체념하며 아인에게서 시선을 거두던 그때였다.
“황자비에겐 죄를 물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의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내게 죄를 물을 수 없다니, 나를 도와주려는 건가?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나를?
“죄를 물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황태자.”
“황족들은 ‘사후특별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사후특별법’이란 황족의 경우, 사망 후에는 그 어떤 죄도 물을 수 없게 한 법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죄명의 공포조차도 불가했다. 이런 법이 나오게 된 건 황족의 죄로 황권이 실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 법을 여기서 갑자기 왜…….
“사후특별법이라? 황자비가 죽기라도 하였느냐?”
“예, 폐하. 조금 전 황자비의 죽음을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뭐……? 아인의 입에서 나온 전혀 뜻밖의 말에 어깨를 움찔했다. 여기서 놀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황후는 몹시 놀라고 분노한 얼굴로 아인을 몰아쳤다.
“황자비가 죽었다니? 황태자는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인은 대답 대신 시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를 지시받은 시종이 집무실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폐하, 황자비가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황제가 나무 상자를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무 상자에 집중되고, 영원 같은 적막이 감돌았다.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아인이었다.
“황자비가 폭발 당시 입고 있던 드레스입니다.”
상자에 든 물건을 꺼내자, 피로 범벅된 드레스 자락과 검은 머리카락 한 줌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은 어디서 구해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드레스의 출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건…… 내가 도베르에게 던져줬던 드레스잖아?’
도베르의 옆구리를 찔렀던 그때, 나는 그가 자객인 것이 발각당하지 않도록 드레스 자락을 찢어 던져주었었다.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나는 여기저기 피가 묻은 드레스 자락을 멍하니 응시했다. 죽음의 증거로 탈바꿈한 천 조각은, 그 쓰임에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드레스에 묻은 피의 대부분은 도베르의 것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드레스의 주인이 치명상을 입었거나 죽었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드레스가 찢길 정도의 폭발을 겪은 것이라면…… 이미 황자비는 죽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당치 않습니다, 폐하. 시신도 아니고, 고작 머리카락과 드레스로 황자비의 죽음을 증명한다니요?”
“황후 폐하, 시신은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곳에서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이게 전부였습니다.”
아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엘리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황제는 어느 정도 아인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이것이 황자비가 입었던 드레스가 확실한가?”
“예, 폐하. 시녀를 통해 미리 확인해두었습니다. 자수의 일부분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으니, 황자비의 드레스를 제작한 재단사를 불러 확인한다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황제에게 마저 보고한 아인이 이번엔 황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러서 확인해드리오리까.”
고아한 빛을 머금은 금안이 엘리샤의 얼굴을 훑었다. 분노에 찬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황태자의 말대로 황자비가 죽었다고 치죠. 하지만 이리 죄를 덮으실 수는 없습니다. 배후를 샅샅이 밝혀서!”
“황후 폐하. 황족의 경우, 사후에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이는 국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역대 단 한 번도 어겨진 적이 없습니다.”
황족의 죄명 공포. 그것은 황실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황권이 실추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시 제국민들의 신뢰를 쌓기까지는 무시 못 할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이러한 부작용을 감안해, 선대의 황제는 황권 수호를 위해 죽은 황족의 죄를 물을 수 없도록 법제화하였고 그것이 바로 사후특별법이었다.
“……!”
제정 후 단 한 번도 예외를 두지 않았던 강력한 법 앞에 엘리샤의 얼굴이 굳어졌다. 꼭 깨문 핏빛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인, 이럴 생각으로 이따위 놀음판을 벌인 것이로구나.”
그녀의 분노를 온몸으로 맞고 있던 아인이 슬쩍 체르샤의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제가 뭐랬습니까. 쥐고 계신 패가 힘이 못 될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인이 엘리샤에게 고개를 가까이하며 낮게 읊조렸다. 우아하게 접은 금안에 진득한 비웃음이 서렸다.
“폐하, 지금은 헤렌 축제 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증거로 황족의 죄를 들추는 것보다는, 이번 일을 조속히 마무리 지어 제국민이 황실을 신뢰할 수 있게 하심이 옳습니다.”
“이 일을 덮으시면 아니 됩니다. 폐하! 황태자는 지금 자신이 배후로 지목될까 봐 사후특별법을 들먹이는 것뿐입니다.”
“황태자가 배후라니? 섣부른 추측을 지양하게!”
“그것은……!”
말문이 막힌 듯 황제가 말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에서 미약한 의심이 피어오르던 그때, 아인이 선수 쳐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실종된 카렌을 데려온 건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배후로 지목될 줄은…… 몰랐군요.”
“……!”
아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말에 집무실 안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었다. 황후에게 또다시 무고한 황태자를 음해한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아인은 느른한 미소를 지은 채 황후에게 다가갔다.
“이성을 찾으십시오. 황후 폐하께서 하시려는 일엔 잃을 게 더 많을 것입니다.”
아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엘리샤를 내리눌렀다. 마치 더 이상 이번 사건을 파헤쳤다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엘리샤에게 가장 소중한, 딸. 카렌을.
“뜻을 꺾지 않으시면, 반드시 잃을 것입니다.”
“……감히.”
“부디 어리석은 길을 택하지 않으시기를.”
“…….”
엘리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기력이 쇠한 노파처럼 보이기도 했다.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잠잠해진 엘리샤를 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자비가 고인이 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표명하노라.”
* * *
내가 죽었다고……?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아인의 뒤를 따랐다.
아인은 체르샤의 증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후특별법을 꺼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찾아보면 내가 카렌을 지키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외에도 무고함을 밝히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제시할 증거가 있었다. 아인은 똑똑한 사람이니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아인은 그러지 않았다.
[황자비는 죽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왜? 내가 더는 황자비로서의 쓰임이 없어서? 나를 버리기 위한 준비인가?
한참을 아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걸었다. 그런데 그때 아인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얀이라고 했던가.”
“……예.”
아인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숙인 탓에, 그가 무슨 표정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늘 제멋대로에, 주변 사람 생각은 요만큼도…… 응?’
하지만 아인이 손으로 내 고개를 받친 탓에 더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눈을 깜빡였다.
아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이윽고 손으로 내 눈꺼풀 위를 덮어버렸다.
“너도 붉은 눈을 가졌구나.”
“……?”
너도……라니. 잠시간 정적이 이어졌다.
불편한 자세로 그에게 고개를 맞긴 나는 미약하게 고개를 틀어보았다. 하지만 아인은 쉽게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사람이긴 해도, 처음 본 시종에게 이렇듯 관심을 둘 사람이 아닌데.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 아인의 말이 이어졌다.
“네 주인에게 가서 전해.”
“…….”
“황자비가 죽었다고. 내일 장례식이 치러질 거라고.”
눈앞을 어둡게 만들었던 아인의 손이 떨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멀어져가는 아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 * *
아인과 헤어진 후 나는 몇 번을 서다 가다를 반복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황제가 이미 황자비의 죽음을 공표했으니, 나는 이제 황자비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복귀는커녕 앞으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게 될 거야. 아인이 도베르에게 날 데려오라고 말했으니까.’
나는 아인이 도베르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중간에 얀이 등장하는 바람에 끝까지 듣진 못했지만, 그의 성정에 뭐라고 말했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나를 데려와 죽이겠다는 내용이었겠지, 뭐.’
쿨하게 생각하기로 했지만 역시 입안에 쓴맛이 감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상 못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래, 힐레인? 일단 도베르한테 잡히지 않는 것부터 생각하자고…….’
도베르는 유능한 기사인 만큼, 그를 피해 다니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루가 내 모습을 바꿔줬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도베르라도,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 나를 찾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근데 바뀐 모습으로도 황자님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주먹에 힘을 줬다가 다시 풀었다. 그 짧은 순간 수십 개의 방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 상황에서 내가 제레미의 곁에 남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던 그때 어디선가 기척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핑크빛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담겼다.
‘도베르?’
도베르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바로……. 낭패감에 얼굴을 구겼다. 표정을 보니 내가 힐레인이란 걸 다 알고 온 것 같았다.
“힐레인.”
역시. 물음이 아니었다. 그는 내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젠장, 나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중지 손가락 한 번 들었다고 날 알아본 거야?
나는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그에게 겨누었다.
도베르는 아인의 명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어코 나를 아인의 앞으로 대령해 놓을 것이다.
나는 한때 임무지를 함께 누볐던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는 전쟁터의 전우처럼 믿음직스러웠는데. 오늘은 왜 이다지도 그의 등장에 긴장되는지.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건지.
“날 죽일 거예요?”
이런 질문을 꺼내야 하는 건지.
그저 서글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