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황자비가 범인이다
“오랜만이야, 형?”
제레미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르르 접은 눈웃음이 투명하리만치 맑았다.
아인은 그런 그의 미소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미세한 오점이라도 잡으려는 사람처럼 예리하고 빈틈이 없었다.
‘……괜찮을까.’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이 더러 있긴 했으나, 오늘처럼 긴장된 적은 없었다. 제레미를 주시하는 아인의 모습이 평상시와는 다른 탓도 있었다.
“나 보러 온 거야?”
“다쳤다기에.”
제레미가 다쳤다는 이야기에 병문안을 온 것이라고? 아인이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올 리 없었다.
분명 황자궁까지 걸음한 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자릴 비운 상태더군. 시종장은 황자의 부재를 숨기느라 정신이 없고.”
이런. 속으로 낭패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황자님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셨던 것 같은데…… 베르킨이 이를 숨기려다 오히려 아인에게 의심만 심어준 모양이었다.
아인은 제레미의 부재에 무엇을 생각했을까. 최악의 경우, 그는 제레미가 백치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다 추측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담 이건 엄청난 위기야…….’
제레미가 백치인 척하며 모두를 속였다는 게 밝혀지면 실각은 물론 황제를 속인 반역죄에 처할지도 몰랐다.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제레미도 그걸 아는 걸까. 아인의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하지, 어쩌면 좋을까. 아인이 진실에 다가가는 걸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품에 숨겼던 얀을 살짝 놓아주었다. 그러곤 입 모양으로 ‘잠깐만 여기 있어.’라고 말했다.
얀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나는 걸음을 뗀 후였다. 제레미와 아인이 있는 곳으로 발을 딛자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와 박혔다.
나는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양 무릎을 두 손으로 잡아 허릴 숙였다.
“헉, 헉! 황자님!”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주 오랫동안 뛰어다니느라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목소리를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찾았습니다, 지금까지 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제레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 시종이 아는 척을 하니 그로서는 많이 이상해 보일 터.
나는 그가 너무 티내지 않기 바라며 자연스레 아인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곤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역시도, 일부러.
“화,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다급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나 아인의 시선이 너무 따끔해서 꼭 눈을 마주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냐.”
다행이야. 나를 못 알아봤어.
누구냔 물음에 속으로 깊이 안도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 하나를 댔다.
“황자궁 소속 시종인 얀이라고 합니다.”
황자궁 소속 시종의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는 건 아닐 테니 그러려니 넘어갈 듯싶었다. 내 예상대로 아인은 내 이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황자를 찾으러 나온 것이냐?”
“예, 폭발 사건 이후 황자님께서 충격을 받으셨는지 최근 자주 주무시다 사라지셔서요. 아……! 시종장님이 비밀로 하라 하셨는데…….”
말실수를 한 척, 울상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첩자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실력이 는 것인지 제법 자연스러운 연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인의 앞에서 벌벌 떨며 실수한 연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인이 비스듬히 눈썹을 올렸다.
“비밀?”
아인의 물음에 나는 일종의 몽유병 같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그렇게 말하면 지금 이 상황이 다 설명될 것 같았다.
폭발의 충격으로 몽유병이 생긴 제레미가 낮잠을 자는 도중에 사라졌고, 베르킨은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에 이를 숨겼다. 황자궁 내에 궁인의 수가 적은 이유도, 제레미를 찾으러 갔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최선인 거짓말을 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 남자에게 참 많은 거짓말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감정은 옅어져 있었다.
아인이 하고 있는 일은 그릇된 일이니까.
아인에게 무슨 아픔이 있는지, 왜 동생들을 죽이려 하는지 아주 세세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동생을 죽인다고 아픔이 줄어들까? 아니. 그건 양날의 검이었다. 황태자, 당신에게도 상처로 남을 게 분명한.
언젠가 아인도 이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짓말로 당신의 동생들을 지켜주는 것.
자기 합리화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인까지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내가 아인의 앞에서 당당한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는 이유였다.
속으로는 참 많은 생각을 했지만, 현실에선 아직 아인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이었다. 혹여나 내 거짓말에 허점이 있진 않았을까. 떨리는 시선을 올리던 그때, 아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진실이 어찌 되었든 어차피 이젠 상관없으니…….”
수긍 혹은 부정. 둘 중 하나로 대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이라니.
‘상관이 없다니? 뭐가?’
아인의 살기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으나 뒷말이 마음에 걸렸다. 제레미가 백치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말이 이미 제레미를 내치기로 결심한 것처럼 들렸다. 불안하게.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그때, 아인의 시선이 정확히 내 얼굴로 내리꽂혔다.
얼굴을 샅샅이 훑는 시선이 매섭고 예리했다. 껍데기. 그 안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슬쩍 시선을 비켰다. 그러자 아인이 손끝으로 내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직선으로 파고드는 금안에, 나는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낯이 익단 말이지.”
낯이 익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목이 움찔거리는 걸 본 아인이 느른하게 시선을 내렸다. 목에 닿은 시선이 따끔하다고 생각되던 그때였다.
“그 손 놔.”
갑자기 몸이 뒤로 확 끌어당겨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레미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하자 사뭇 날카롭게 미소짓고 있는 제레미가 보였다.
“내 거야, 이 아이.”
깜짝 놀라며 제레미를 쳐다보자 그가 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백치 같은 웃음이었으나……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낯설다고 생각되는 건 단순히 미소만이 아니었다. 나는 현재 그의 품에 갇혔다 봐도 좋을 정도로 그와 가까이 있었다. 원래라면 이 정도 거리에선 제레미의 향이 맡아져야 하는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다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제레미의 향이라고 보기엔 조금 더 짙고 화려한 향. 그래, 꼭 루에게서 나는 향기 같았다.
의아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 어디선가 시종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꽤 급하게 달려온 듯 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님을 급히 찾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중앙궁으로 오라 하십니다.”
자신을 찾을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아인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이 시점에서 황제의 부름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좀 한시름 돌리나 싶던 그때, 아인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게 손짓을 해 보였다.
“너도 가자꾸나.”
나?
멍하니 아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그가 나를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가 부르는데 날 데리고 가서 뭐 어쩌려고? 하지만 말수가 적은 아인답게, 설명은 생략된 채였다. 불안감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걸 느끼며, 할 수 없이 걸음을 뗐다.
황자궁 소속 시종이라 밝혔지만, 엄연히 황태자는 황자의 윗사람이었다. 이곳에서 반기를 들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안…….”
하지만 제레미의 생각은 좀 달라보였다. 그는 나를 못 가게 하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러면 안 돼요.’
나는 제레미를 지긋이 누르며 작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황자님.”
* * *
아인은 황제가 급히 찾는다는 전언에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황자궁으로 향했다. 나는 도베르와 함께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저번에 그 상처는 좀 아물었을까?’
도베르의 옆구리 쪽을 한 번 흘끔 쳐다보았다. 폭탄이 터지던 그 날 그의 옆구리를 찔렀던 게 기억나서.
곧게 세운 허리와 가벼운 발걸음을 보니 다행히 잘 치료를 받은 것 같았다.
양심의 가책을 조금 덜어내고 있던 그때, 바닥을 끄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 발 아래에서.
조용한 복도, 기척 없이 걷는 사람들 속에서 그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이런…… 발목이 또 말썽이네.’
발목이 찌릿한 걸 보니 상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못 참을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발에 힘을 줘 걷는데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발목 쪽을 한 번, 그리고 내 눈을 또 한 번. 짧은 순간에 잿빛 눈동자가 참 바삐도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도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뭘 봐요?’라고 입 모양으로 묻자, 그가 ‘먼저 본 게 누군데.’라고 말하며 양팔로 제 몸을 감쌌다.
슬쩍 중지를 들어 올려 보이자 도베르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겨우 이 정도로 나라는 걸 알아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그렇게 은밀한 대화를 마무리 짓던 그 무렵, 우리는 중앙궁,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황제의 시종이 엄중한 목소리로 황태자의 도착을 알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나는 그 안에서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체르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릴 뻔 하다 다시 표정을 고쳤다. 이젠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만 봐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조금은 피곤한 모습인 황후가 있었다. 그녀는 아인을 보자마자 서슴없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폐하, 황태자가 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이토록 증거가 뚜렷한 것을요. 어서 결정을 내리시지요.”
“황후, 이런 중차대한 일을 어찌 그리 쉬이 결정할 수 있겠소. 게다가 황태자와 관련된 일인데, 의견을 들어 봐야지.”
황제의 말에 주먹을 바르르 떨던 엘리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인을 쏘아보았다. 잘 기른 화초처럼 여린 얼굴과 달리 표정이 매서웠다.
황제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 황후의 분노에 난감한 눈치였다. 어서 이 난관을 수습해보려는 듯 조급한 기색도 보였다.
“아인. 너를 이리 급하게 부른 이유는 이번 폭발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밝혀졌기 때문이다.”
“누구입니까?”
“힐레인 리야, 황자비다.”
아인이 꽤 놀랐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황제는 체르샤 쪽을 흘끗 쳐다본 후, 아인에게 종이 몇 장을 건넸다.
“체르샤 양이 우연히 습득했다는 황자비의 쪽지다. 최초 발견자는 한때 레이몬드 가에서 일했던 황자궁의 시녀로, 내용이 심상치 않아 옛주인이었던 체르샤에게 증거물을 건넸다는군.”
“……!”
황제의 말에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황제가 아인에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내 글씨가 적힌 종이였다. 폭탄이 숨겨져 있는 약도까지, 전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