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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배신자를 데려와 (67/120)

67. 배신자를 데려와

아인은 황자궁에 제레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황후가 스치듯 읊조린 이야기에 의심을 품었고, 비어 있는 황자궁을 보며 확신했다.

잠시 산책하러 간 것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리 말하면 될 터. 베르킨이 침대 위에 인형까지 올려놓을 정도면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충직한 시종장은 주인의 오랜 부재를 숨기려 한 것이겠지.

“그, 그것이…….”

아인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베르킨을 스쳐 지나왔다. 무슨 변명을 더 듣겠는가? 제레미의 부재를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황자궁의 주인이 자릴 비웠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는데.

황자궁의 주인이 자릴 비웠다는 짤막한 사실이 알려주는 바는 꽤 많았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 아이가 백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제레미를 살려준 단 하나의 이유가 사라진다. 분명 은연중에 바랐던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 아인에게 그다지 큰 기쁨이 되지 못했다.

그 사실을 제게 알려 줬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보고하는 내용은 항상 같았다. 제레미는 백치다.

힐레인은 제레미가 백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로 몰랐을까?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제레미와 함께 했다. 힐레인은 그의 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고 제게 그런 보고를 올렸을까. 그 보고가 사실이긴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그의 기분을 바닥으로 치닫게 했다. 배신에 또 배신.

‘대체 넌 어디까지 나를 참혹하게 만들 생각이냐.’

제레미의 방에서 나와 얼마간 광기에 휩싸였던 것 같았다. 우두커니 서서, 힐레인을 생각했다. 자신을 이렇게 휘저어놓을 줄 알았다면 진즉에.

진즉에 그 아일 없애버릴 걸 그랬다.

* * *

황궁으로 잠입한 나는 곧장 황자궁으로 향했다. 시종으로 변장한 덕에 잠입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자궁의 정원으로 들어섰을 무렵,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황자궁이 너무 조용해.’

황궁 경비병이 드문드문 보이긴 했으나 그 수가 너무 적었다. 정말 필요한 인력만을 배치해 놓은 느낌이랄까.

‘무슨 일이 있었나?’

평상시와 다른 황자궁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혹여 내가 자릴 비운 사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불안감이 커지던 그때였다. 건물 끝에서 뜻밖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

역광을 받고도 환한 빛을 내는 금발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황자궁 내에서는 절대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 아인이었다.

‘황태자님이 여긴 왜 오신 거지?’

나는 곧장 나무 둥치로 몸을 숨겼다. 황자궁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걷던 아인은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어느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섰다.

고지에 선 포식자처럼 느른하던 금안은 어디로 가고. 여유가 사라진 눈빛이 광포한 분노로 번들거렸다.

평상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사람인데, 뭐에 저렇게 화가 난 거지?

하필이면 그가 서 있는 이곳이 황자궁이라는 점에서 몹시 두려워졌다. 설마 황자님에 대해 뭐라도 알게 된 걸까?

불안에 휩싸여 있던 그때 명치 부근이 찌르르 울리며 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힐.]

분노에 찬 음성이 맹세의 보석을 통해 울려 퍼졌다. 아인은 한계에 다다른 듯한 얼굴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저런 표정으로 날 부르고 있는 걸까.

나무 뒤로 몸을 웅크린 채 아인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이쪽을 보지 않는 걸 보면, 내가 가까이 있단 사실을 눈치챈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숨자. 아인의 표정을 봤을 때 좋은 일로 부른 건 아닐 터. 지금은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를 배신한 것이냐?]

이어진 아인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맹세의 보석으로 압박을 가해온 것도 아닌데. 그의 입에서 스민 짤막한 단어가 마치 온몸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배신, 배신이라.

당장 맨 처음 든 생각은 카렌이었다. 아인은 내가 카렌을 구하는 장면을 직접 보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내 쪽에서도 생각해 놓은 변론이 있었다.

아인이 저렇게 화 난 상태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그의 앞에 나아가 변명 섞인 진심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인의 주변을 둘러싼 분노는 다가가기만 해도 찔릴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은 아주 오래 전, 아인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보기만 해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그와 가까워질 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던 그때를.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몸을 굳혔다. 긴장감에 손에 땀이 흥건하게 뱄다.

나서지도 그렇다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우뚝 멈춰서 있던 그때였다. 이번엔 아인의 음성이 머릿속이 아닌 귓가에 울렸다.

“도베르.”

“예, 황자님.”

“배신자를 내 앞으로 데려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말거라. 힐레인이 아니면 누가 있겠느냐.”

아인의 말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 나를 데리고 오라고? 왜? 나를 정말 배신자로 생각했다면 맹세의 보석으로 죽이면 그만인 일을…….

왜 눈앞에 데려다 놓으라고 말하는 걸까. 나를 직접 고신하려고 저러시나? 아니면 손수 죽이려고 그러나. 아직 아인에게 잡혀줄 수는 없는데…….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데려오면…… 어쩌시게요?”

그런데 그때, 도베르가 나를 대신해 물음을 건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미련이 많은 탓인지 헛된 기대가 커졌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알 것 같은 아인의 모습을 보고도, 아니길.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길.

“내 친히 그 아이를…….”

별안간 아인의 음성이 뚝 끊겼다. 아인이 말을 하다 만 게 아닌, 누군가 내 귀를 막은 탓이었다.

나는 까치발을 든 채 내 귀를 막은 소년을 응시했다. 이슬을 머금은 장미 같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얀, 얀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울고 있었다. 이슬처럼 맑은 눈물이 후두둑,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아인의 말을 듣는 것도 잊고 멍하니 얀의 눈물을 응시했다.

어쩐지 그 순간 제레미가 떠올랐다.

* * *

약 30분 전, 힐레인의 뒤를 밟은 제레미는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초조해짐을 느꼈다. 황궁 안으로 들어온 뒤부터 긴장감은 더 커졌다.

제레미는 지금이라도 힐레인을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갈까 고민했다. 아인의 본모습이고 뭐고 다 치우고, 그녀를 데리고 훌쩍 떠나고 싶었다. 싫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제레미는 자신의 추잡한 생각에 치를 떨었다. 비뚤어진 소유욕이 힐레인에게 닿을까 두려웠다.

혹여라도 그녀를 붙잡고 말까 봐 제레미는 의식적으로 양손을 붙들었다. 힐레인을 구속하긴 싫었다. 자신의 품에 가둔 채 아인을 갈망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건 이승에 구현된 지옥일 테니까.

제레미는 힐레인이 자신의 의지로 도망쳐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더디다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다가온 그 순간은, 전혀 생각지도 방식으로 닥쳐왔다.

곧장 황태자궁으로 향할 것이라 생각했던 힐레인은 황자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아인이 황자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었다.

아인의 민낯을 보여주려던 자신의 계획에 맞장구라도 쳐주듯, 아인은 그 특유의 가면을 벗어던진 채였다. 여과 없이 드러난 민낯이 횡포한 분노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제레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힐레인 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래진 두 눈.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공포에 지배당한 힐레인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자신이 바라고, 또 바라던 순간이었음에도 기쁨 대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배신자를 내 앞에 데려와.”

잠시 후 아인이 힐레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제레미는 자신도 모르게 힐레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내 친히 그 아이를…….”

멍하니 아인 쪽을 주시하고 있는 힐레인의 귀를 막고, 저를 바라보게 했다.

“죽이겠다.”

힐레인이 아인의 민낯을 보길 바랐으나 그 순간이 닥쳐오자 힐레인이 몰랐으면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겠다는데. 힐레인이 어찌 그 슬픔을 다 감당할 수 있겠어. 제 이기심으로 힐레인을 다치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너무 늦게 깨달은 사실에 눈물이 차올랐다. 방울방울 흘러내린 눈물 위로 힐레인의 시선이 닿았다.

힐레인의 마음도, 사랑도 전부 아인이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선 하나는 뺏어올 수 있었단 사실에 바보처럼 또. 기뻤다.

* * *

나는 멍하니 얀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얀이 귀를 막은 탓일까. 청각이 둔해지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녹음이 드리운 숲속. 조각난 햇볕 아래, 물기 어린 말간 얼굴이 보였다.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이며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엇이 그리 슬픈 것인지, 붉은 눈동자 위로 유리알처럼 맑은 눈물이 다시금 스며들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울고 있는 건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제레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꼭, 제레미가 울고 있는 것처럼.

스치듯 지나간 생각은 머릿속에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의문들을 건드리며 점점 더 증폭되었다.

얀의 말투, 움직이는 방식, 분위기. 무엇보다도 힐레인, 하고 부를 때의 그 부드럽고도 안온한 느낌.

외모만 제하면 두 사람은 너무도 흡사했다. 동일인물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황자님?’

입술을 움직여 그에게 물었다. 내 입모양을 알아들은 것인지 얀의 두 눈이 커다래지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때, 얀이 몸을 움찔했다. 시선을 돌리자 우리 쪽을 응시하고 있는 아인이 보였다.

“거기 누구냐.”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나는 얀을 품에 꼭 안았다. 여차하면 얀을 안고 뛸 생각으로.

얀을 아인에게 보여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얀은…… 얀은 제레미일지도 모르니까.

“도베르.”

아인의 부름에 도베르로 추정되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도주로를 살폈다. 상처 입은 발목이 어디까지 견뎌줄지. 걱정에 휩싸인 채, 다리에 힘을 주던 그때였다.

“형?”

맑은 목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르고 들어왔다. 소릴 내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황자궁의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커다란 키,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체격, 무엇보다도 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은빛의 머리칼.

아인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그는 특유의 청아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헤헤,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천둥 벼락이 치는 하늘을 부유하는 민들레 홀씨처럼, 기이한 걸 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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