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작은 여우
체르샤를 놓쳤다는 이유로 두 기사가 죽었다.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아인은 망설임 없이 죽음을 내렸다. 아무런 가책 없이 무감정하게.
그렇다면 힐레인은? 힐레인은 기사들보다 더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나. 배신이라는.
‘황태자님이 힐레인을 이미 죽이신 건 아닐까?’
도베르는 불안해질 때마다 카야의 돌을 포기했던 아인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것을 포기할 정도로 아꼈던 부하이니, 그리 쉽게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분명히 기회를 줬을 거다.
하지만 힐레인을 완전히 지워내 버린 듯, 일상으로 돌아온 아인을 보며 도베르는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약한 의심은 하루아침에 주검이 되어 돌아온 후배, 켄과 헤리 앞에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켄과 헤리처럼 아무렇지 않게, 무감정하게……. 그렇게 힐레인을 죽이신 겁니까?”
“그 아이의 이름을 내 앞에서 거론하지 마라.”
“아직도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폭발에 휘말려 죽은 건 아니겠지요.”
“그 입. 다물어라.”
“귀소본능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끈질기게 황태자님 곁으로 돌아오던 아이인데.”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죽이겠다.”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듯 아인의 표정은 살벌했다. 하지만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경고에도, 도베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벌써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겠죠? 주인에게 버림받은 게 아니라면…….”
“도베르 하이만!”
“크윽!”
항상 차갑다고 느껴졌던 아인의 금안이 뜨겁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도베르의 몸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압박이 가해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도베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명치 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딱 죽기 직전의 고통이 그를 누르고 있었으나, 의외로 도베르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힐레인을 버리신 건 아니군.’
내내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에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힐레인을 켄과 헤리처럼, 한낱 미물을 처리하듯 없애 버렸을까 봐.
‘하지만 저렇게 화내시는 걸 보니, 힐레인이 어지간히도 황태자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모양이야.’
차마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게 말이다.
‘무지 아프지만…… 도발해보길…… 잘했네.’
* * *
“나 이제 황궁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평화로운 아침을 뒤흔든 폭탄 발언에 루가 들고 있던 짐을 떨어뜨렸다. 종이봉투에서 나온 약재들이 처량한 모양새로 바닥을 뒹굴었다.
“아, 안돼요!”
항상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하던 루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발목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여기 있기로 해놓고, 갑자기 왜?’
루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제레미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고요히 힐레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황자님? 왜 그렇게 잠잠하게 서 계신 겁니까?’
힐레인의 말에 넋이라도 나간 걸까. 황자만 믿고 있을 수 없단 생각에 루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루나를 설득할 수 있을까.’
루가 눈을 반짝 빛내며 힐레인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사람을 홀려왔던 화술. 설득력을 배가시키는 외양. 적절한 이득을 떠올릴 줄 아는 좋은 머리.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으니, 설득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루나…… 일단 내 말을 들어봐요.”
하지만 10여 분이 흐른 후.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 힐레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봐야겠어. 신경 써준 건 고맙지만, 미안해, 루 대공.”
“…….”
루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제 황태자 궁에서 기사 둘이 갑작스레 죽어 나갔다. 황태자가 루나에게도 이번 일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실종 처리된 김에 두 눈 딱 감고 함께 떠나자. 신분, 명예, 부. 모든 걸 뒷받침해 주겠다.
그녀를 설득시킬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얘기해보았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힐레인은 굉장히 완고했다. 반드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목표가 있는 사람처럼.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있는 루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황자님 곁에 있고 싶은 걸까.’
확 그냥 다 말해버려? 옆에 있는 이 소년이 바로 황자님이라고?
힐레인의 앞에서 다 불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던 그때였다. 뭔가를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힌 제레미가 힐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뭘 하려는 거지?’
이미 설득할 수 있는 말은 다 해본 상태인데. 뭐가 더 남았지? 루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때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안 가면 안 돼……?”
제레미가 힐레인의 손끝을 살짝 잡고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볕이 스민 그의 눈동자가 이슬 어린 장미처럼 말간 빛을 머금었다.
“가지마, 누나.”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곧장 버려질 강아지처럼.
“……다리의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한 마디 한 마디에 힐레인을 향한 걱정이 진득하게 베어 나왔다. 간절함이 담긴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힐레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누나가 아픈 거 싫어.”
제레미가 힐레인의 말을 잘랐다. 부드럽게 애원하다가도 이럴 땐 또 단호한 표정이었다. 고집스럽게 꾹 다문 도톰한 입술이 몹시도 앙증맞고 귀여웠다.
힐레인은 자신의 손을 꼭 붙든 제레미의 손을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리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야?”
루가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자신이 설득할 때는 그렇게나 완고하더니!
‘작은 여우가 승리했어…….’
루가 발그레한 미소를 머금은 제레미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작은 여우는 자신의 속도 모르고 ‘다행이다, 그치?’ 하면서 저를 올려다보았다.
루는 제레미의 머리에 여우 귀가 달린 듯한 착각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서.’
제 연적은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자신보다 위였다. 인위적인 느낌이 없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호소력 짙은 매력은, 그냥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본인이 능력을 숨기고 살아서 그렇지, 저 능력을 본격적으로 휘두르고 살았다면 제국 여성들을 모두 홀렸을 거야.’
한때 세기의 바람둥이였던 루가 확신하는 바였다.
어찌 됐든 제레미 덕에 시간을 번 건 사실이었다. 이대로라면 일주일 정도는 더 그녀를 붙잡아둘 수 있을 테고, 그만큼 설득할 기회도 많아지겠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루가 씁쓸한 패배감과 함께 안도감을 느끼고 있던 그때였다.
곤란함이 묻어난 작은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새어 나왔다.
“황자님이 무사한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긴 한데.”
조그맣게 흘러나온 힐레인의 말에 제레미가 몸을 움찔했다. 잠시간 힐레인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물음을 건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응?”
“혹시 황……태자를 말한 거야?”
황태자가 아니라 황자라고 고쳐 말하려고 하던 힐레인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의 뒤편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레틴을 본 후 내린 결정이었다.
“응. 맞아. 황태자님이…… 조금 걱정돼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제레미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맑고 곧은 감정 앞에서 제레미는 가슴 한쪽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 이유가…… 아인이 보고 싶어서였던 거야?’
제레미가 힐레인을 붙든 손에 힘을 풀었다. 어쩐지 그 순간 자신의 손이 그녀를 옭아매는 족쇄처럼 느껴져서.
‘힐레인은 아인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문득 힐레인이 읽던 이야기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은 여자주인공이 상처 가득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사랑이 이뤄지기까지 여자의 앞에 아득히 긴 가시밭길이 펼쳐졌지만, 여느 해피엔딩의 소설들처럼 두 주인공은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악역이 빠진. 둘만의 낙원에서.
‘이게 만약 책 속의 이야기라면.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방해꾼일까.’
아인을 사랑하는 힐레인, 그리고 아직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아인. 슬프게도 답은 꽤 명백하게 나왔다. 힐레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악역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때가 되면 물러나는 게 악역의 엔딩. 그렇담 뜻하지 않게 악역으로 배정된 자는, 정해진 대로 얌전히 사라져야 옳은 일일까?
‘싫어.’
제레미가 힘없이 풀어지는 힐레인의 손을 다시 단단히 붙들었다.
설령 힐레인과 아인, 두 사람이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신이 정한 운명에 놀아날 생각은 없으니까.
기꺼이. 운명을 갈라놓는 악역이 되리라.
마음을 굳힌 제레미가 힐레인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깊어진 두 눈동자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이 걱정되면 다녀올래? 황궁에.”
힐레인이 상처받지 않길 바랐기에 자신의 품에 숨겼다. 갑갑한 새장처럼 느낄지라도 그편이 그녀를 위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서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힐레인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담 보내주어야지. 지금, 그 누구보다도 횡포한 모습을 하고 있을 아인에게로.
‘그의 민낯을 보고 와, 힐레인.’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아인이 황궁에서 무슨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제 수발이 되어준 부하를 죽이고도 어떤 모습인지.
‘직접 확인해.’
제레미는 힐레인도 아인의 본모습을 알게 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힐레인에게 아득한 가시밭길이 된다고 해도.
저를 한낱 도구로 생각하는 황태자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 힐레인은 아인에 대한 존경심이든, 충성심이든 혹은 사랑이든.
다 버리고 제게 도망쳐오지 않을까.
“많이 걱정되면 다녀와.”
제레미는 힐레인을 잠시간 놓아주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 펼쳐진 가시밭길을 볼 수 있게. 뾰족한 가시에 찔려 사랑을 단념할 수 있게.
“다녀오라고? 정말?”
“대신 비밀리에 다녀오는 거야. 알겠지.”
제레미가 루의 폴리모프 반지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모습을 바꿔주면 아인에게 발각될 위험도 없겠지.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
“뭔데?”
“루 대공이 한 이야기들, 한 번 더 고민해봐 줘.”
“황자비 자리만 포기하면 뭐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한 그거?”
“응. 황궁으로 가서 상황을 다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제레미는 진심으로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줄 생각이었다. 높은 신분을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작위를, 부를 원한다면 평생 쓰고도 남을 금화를, 안락한 쉼터를 원한다면 아름다운 성채를.
그게 무엇이 됐든 그녀가 버리고 온 낙원보다 더 큰 낙원을.
악역을 선택한 그녀에게 그 정도 보상은 해야지 않겠어.
사랑 앞에서 기꺼이 악역이 되기로 한 제레미는, 힐레인의 앞에서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 * *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힐레인이 제 모습을 요목조목 살펴보았다. 말끔한 시종 복과 연갈색의 칼 단발. 이대로 황궁에 들어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차림새였다.
더 신기한 건 달라진 얼굴 생김새였다. 붉은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전체적인 인상이 확 달라져 있었다. 이 정도면 아무도 그녀를 황자비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폴리모프를 해주는 반지라니…….”
힐레인이 루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붉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는 그 특이한 능력만큼이나 묘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모습은 마음에 들어요?”
루는 착잡한 심정으로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황궁에 보내도 될지. 일단은 황자를 믿고 보내는 거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마음에 들다마다. 으음, 그런데 어째 낯이 익단 말이지.”
그래도 이 모습을 알아보는 힐레인을 보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루나가 시종으로 변장했을 때의 모습을 참고한 거예요. 저한텐 의미 있는 모습이니까요.”
루가 물끄러미 힐레인의 모습을 응시했다.
묘약을 삼켰을 때, 그러니까 힐레인에게 첫눈에 반한 그날. 그녀는 오늘처럼 연갈색의 칼 단발에 시종 복장이었다. 루는 감상에 젖은 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얼굴 생김새를 바꿔준 상태였지만,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때문인지 루의 눈엔 여전히 자신의 루나로 보였다.
“미래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는 네 엄마의 이런 모습에 반했다고 말을…… 아얏!”
발등에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루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시선을 내리자 제 발등을 온 힘으로 짓밟은 제레미가 보였다.
귀여운 얼굴 위로 사악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반쯤 시선을 내리깐 그가 루에게 낮은 경고를 읊조렸다.
“대공의 미래는 독거노인이야. 짝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오호라? 이런 도발도 할 줄 아시고?
예상 못 한 공격에 루가 눈을 깜빡이던 사이, 제레미가 표정을 싹 바꾸고선 힐레인 쪽으로 다가갔다. 소 악마를 연상시키던 미소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천사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황당할 정도로 귀여운 제 연적을 보며 루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누나, 다리는 괜찮은 거 맞지?”
“응. 진통제도 잔뜩 먹었으니 걱정 없어. 걱정하지 말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황궁 쪽으로 돌아서는 힐레인을 제레미가 다시 붙잡았다. 얼떨결에 뒤를 돌아선 힐레인은 조금은 슬픈 표정이 된 제레미를 발견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석양을 닮은 붉은 눈동자가 그윽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때, 힐레인의 볼 위로 보드라운 감촉이 닿았다.
쪽-.
“조심히 돌아와.”
제레미가 커다란 두 눈을 스르르 접으며 웃어 보였다. 예쁘게 웃어 보였지만 채 지우지 못한 불안감 탓인지 눈가에 말간 눈물이 맺혀 있었다.
‘꼭. 내게 다시 돌아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