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우리가 부부인 거 잊었어?
황후궁 앞까지 무사히 도착한 체르샤는 잔잔히 눈을 빛내며 자신의 조력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
레소드 데일만. 그는 고모가 낳은 걸작이자 후작가의 자랑이었다.
레이몬드가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을 이어받은 그는 능력 또한 무능한 후작이 아닌 어머니를 빼닮아 있었다. 젊은 나이에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꿰찬 그는 체르샤에게 있어 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오늘도 봐. 레소드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을 터.
마침 황태자궁으로 끌려가던 자신을 발견한 게 레소드였다. 분노한 레소드가 아인이 없는 틈을 타 감옥을 습격했고, 체르샤는 무사히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운으로 시작된 결과였으나, 체르샤는 행운의 여신이 저와 함께하고 있다고 여겼다.
체르샤는 제게 행운의 여신을 데려온 레소드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도 기품 있는 인사를 건네는 사촌 동생의 모습에 레소드가 고갤 끄덕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자태였다.
“더는 실수하지 마라.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이 없게. 알겠느냐?”
“예, 오라버니.”
체르샤는 레소드를 뒤로한 채 황후의 방에 노크했다. 레소드가 벌어준 기회로 겨우 얻게 된 알현의 기회였다.
들어오라는 허락에 체르샤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손엔 힐레인의 글씨가 쓰인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아인에게 넘겼던 것과 다른 내용이 적힌 종이는 힐레인에게 새로운 적을 만들어 줄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배신의 증거가 되는 종이. 그리고 운이 좋게도 기억을 잃은 황녀까지.
체르샤는 행운의 여신이 자신의 곁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어……. 레틴.”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레틴과 눈이 마주쳤다. 너 또 왔냐? 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한 채 삼켰다.
‘쟨 왜 황궁으로 안 가고 자꾸 여기로 오는 거지? 나보다 더 심한 황자님 덕후인데…….’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차, 레틴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봉투를 열자, 편한 원피스가 보였다.
“응? 옷은 왜…….”
“황…… 아니, 그 옷은 이제 그만 입고 맞는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나는 지금 헐렁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기가 좀 그래서 장롱에 있는 옷을 대충 껴입은 거였는데, 셔츠는 어떻게 참아본다 해도 바지가 헐렁해서 불편하던 차였다.
“으음. 고마워요, 레틴 경.”
어색한 내 인사에 레틴이 삐걱삐걱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으르렁대며 싸우던 우리가 도움을 주고, 감사를 받는 사이가 된 게 그도 여간 어색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밖에 나가 있을게요.”
레틴이 문을 연 채 얀에게 나가자는 제스쳐를 해 보였다. 그런데 얀은 레틴을 보고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누나.”
“응?”
“아직 다리 상처가 덜 나았어. 혼자 갈아입기 힘들 테니 도와줄게.”
옷 입는 걸 도와 준다라. 옷을 갈아입으려면 필연적으로 짧은 탑과 속 반바지를 보여야 하는데. 괜찮을까?
속으로 잠깐 고민했다. 다리를 부상 당한 상태에서 혼자 옷을 갈아입는 게 얼마나 힘이 들던지. 짧은 고민을 끝낸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얀은 아직 어리니까.
“응, 부탁할게. 고마워, 얀.”
허락이 떨어지자 얀이 나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미 나간 줄 알았던 레틴이 도로 돌아와 얀을 다급히 붙들었다.
“안 됩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틴은 볼과 귀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레틴 경……? 이것 놔. 혼자서 갈아입기 힘들 거야.”
“제가 괜히 원피스를 사 왔겠어요? 저거 그냥 머리만 끼워 넣으면 된다고요.”
“그래도 내가 돕는 게 더 나아.”
얀이 레틴을 올려다보며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누르던 레틴이 얀을 달랑 들어서 어깨에 들쳐멨다.
“레틴!”
얀이 레틴의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때렸지만, 그는 전혀 내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해도 안 되면 그때 부르십시오. 알겠습니까?! 흠흠, 얀님은 제가 데려가지요.”
“레틴, 정말 이럴 거야?”
얀의 항의에 레틴은 ‘호색한 꼬맹이.’라고 중얼거렸다. 작은 체구의 얀은 기사의 다부진 팔뚝에 붙잡혀, 결국 오두막 밖으로 나가야 했다.
* * *
별채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뛰쳐나온 레틴은 그제야 제레미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얀의 조막만 한 얼굴에 숨기지 못한 짜증이 들어차 있었다.
“호색한이라니. 불순한 의도로 그런 거 아니야.”
“……그, 그래도.”
“레틴. 내가 힐레인과 부부인 걸 잊었어?”
“진짜 부부는 아니시잖습니까…….”
“꼭 그런 이유는 아니잖아, 레틴?”
팔짱을 낀 채 고요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주군을 보며 레틴은 머뭇머뭇 진심을 실토했다.
“……황자님이랑 황자비께서 오순도순한 모습을 보이면 배알이 뒤틀리는 걸 어찌합니까.”
“레틴…… 내일부터라도 좋은 상대를 만나 연애해. 내 간절한 바람이야.”
제레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레틴은 가슴을 때리는 듯한 제레미의 한숨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연애하라니. 다시 고개를 든 레틴의 얼굴에 미처 지우지 못한 서운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가끔 사교계의 연회에 참석하면, 잘 키워놓은 아들을 다른 여자에게 홀랑 뺏겨버렸다는 귀부인들의 대화를 종종 듣고는 하는데. 레틴은 그녀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쳇,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네요.”
“뭐……?”
연애를 독려하는 제레미와 시무룩해진 레틴의 말소리가 오가던 그때였다. 갑작스레 오두막 안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어어어!”
* * *
별채에 다다른 루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인지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맞고도 두 뺨이 달아올랐다.
잠이 많은 루가 아침에 어딘가에 다녀온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그의 얼굴엔 피곤함이 아닌 뿌듯함만이 가득했다.
‘꽤 좋은 약을 구했단 말이지. 얼른 루나에게 먹여야겠다.’
약을 먹고 팔팔해질 그녀를 상상하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제 기분에 취해 있던 루는 평상시라면 했을 노크도 생략한 채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어어!”
“……!”
하필이면 힐레인은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허리 아래론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그 위로는 아직 덜 내려온 원피스 탓에 배의 상당 부분이 노출된 상태였다.
힐레인이 다급히 옷자락을 끌어 내리고 있었으나 오히려 하얗고 가느다란 허리만 더 부각되어 보였다.
‘헉.’
루는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렸다. 안 그래도 열에 달아올라 있던 얼굴은 이제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무, 문을 닫아야 하는데.’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너무 당황한 탓인지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겨우겨우 문에 팔을 뻗던 그 순간, 채 손에 닿기도 전 문이 닫혔다. 꽝-! 하는 천둥을 닮은 소리와 함께.
“루 하버마스.”
제레미가 루와 문 사이를 수문장처럼 막아섰다. 루를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분노에 찬 음성이 뚝뚝 끊어져서 흘러나왔다. 화염 같은 눈동자가 분노에 일렁이는 것을 보며, 루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나는…… 아무것도 못 봤.”
“거짓말.”
제레미가 루의 말을 잘랐다. 분명 어린 소년의 목소리인데 그 안에 실린 감정은 한겨울 서리보다도 더 차가웠다.
“힘을 되찾으면 네 기억부터 날려 줄게.”
“시, 싫어!”
루가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절대로 지우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본 사람처럼. 이를 본 제레미의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
“호오. 뭔가 좋은 거라도 봤나 봐?”
제레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러곤 상당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레틴을 쳐다보았다.
“레틴. 내가 호색한 꼬맹이면 대공은 뭘까.”
“변태……?”
레틴은 지금 이 상황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으나 그건 루를 황천길로 안내하는 말이었다.
“변태라…….”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라면 분명 지금쯤 일을 내고도 남았을 눈빛이었다.
“변태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약재, 약재를……!”
루의 표정이 사색으로 물들어갈 때였다. 다행히도 오두막 안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옷 다 갈아입었어. 다들 들어와도 돼.”
루는 역시 저를 살려주는 건 여신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다리를 굴렸다.
* * *
뭔가에 쫓기듯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푹 떨구었다. 뭇 여성들을 홀리던 바람둥이의 여유는 다 어디로 가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보는 나까지 창피해질 정도로.
‘왜 저렇게 부끄러워해? 봤어도 배 정도밖에 못 봤을 텐데.’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느꼈는지 루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루나. 정말로 잘못했어요.”
하필 옷을 갈아입을 때 문이 열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실수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임무 수행 중엔, 부득이하게 동료와 함께 옷을 갈아입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다 고개를 잘못 돌리면 배도 보고, 등도 보고 그러는 거지, 뭐.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나와 달리 얀이 정색을 하며 말끝을 물었다.
“실수라고는 해도…… 그렇게 쉽게 용서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얀의 단호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약간의 타박이 담긴 말투에서 엄격한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커다란 눈망울과 잔뜩 심통이 난 볼 때문인지 그런 이미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그저 너무 깜찍하고 귀여울 뿐.
작게 웃음을 흘리자 얀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웃었어……?”
“아니, 킥킥. 그럼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데? ……공평하게 네 것도 보여달라고 해?”
“그건……!”
얀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곤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볼을 부풀렸다.
어쩜 저렇게 하는 행동마다 귀엽지?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있던 차, 루가 슬며시 곁으로 다가왔다.
“가능합니다, 루나.”
“응? 가능이라니……?”
고개를 기울이자 루가 자신감에 충만한 얼굴로 크라바트를 끌렀다. 바람둥이 특유의 느긋함을 찾은 루는 여우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어디를 보여드릴까요.”
장난기가 묻어난 얼굴이었지만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기에 이젠 알 수 있었다. 저 남자의 말은 99%가 진심이라는 걸.
“야……. 셔츠 단추는 왜 끌러? 얼른 안 잠가?”
단추를 끄르는 손을 찰싹찰싹 때리자 루가 짓궂게 웃으며 다시 셔츠를 여몄다.
티격태격하긴 해도, 나름 웃음으로 가득한 이곳에 있으니 몸도 마음도 힐링되는 기분이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평화를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궁에 혼자 있을 제레미도 걱정되고, 너무 잠잠한 황태자도 걱정되고.
어쩌면 지금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나 이제 황궁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내 말에 방 안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가 단번에 멈췄다. 무겁게 깔린 정적 속에서 세 사람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 * *
아인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처리하고 이번 사건의 뒷수습을 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가끔은 사람이 아닌 기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베르는 그런 아인의 모습을 초조하게 응시했다.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는 마른 얼굴을 보며 도베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힌 그가 아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아인의 책상 위로 맹세의 보석 두 개를 가지런히 놓았다.
서류에서 시선을 뗀 아인이 보석을 쳐다보았다. 이내 무심히 시선을 거두는 그를 보며 도베르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석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켄과 헤리. 지하 감옥에 배정되어 심심하다고, 일을 변경해 달라고 조르던 자신의 후배들이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한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가 남기고 간 것임에도, 이를 보는 아인의 표정은 무감정했다. 그 어떤 것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너무도 아인다운, 그래서 더 화가 나는 얼굴이었다.
“죽일 필요까진 없었잖습니까.”
“치워.”
아인의 말에도 도베르는 꿈쩍하지 않았다. 보란 듯이 버텼다.
그것은 항의였다. 함께 뛰고 뒹굴던 제 후배들의 목숨을 취한 주군에 대한 항의.
“죽일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나더러 무능한 것들을 데리고 있으란 말이냐.”
“황태자님께 충성을 다했던 자들입니다. 한 번의 실수는 용서해주셨어야지요.”
“충성? 글쎄. 난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구나.”
아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피곤한 기색을 제외하면, 그의 얼굴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메마른 표정.
도베르는 그의 무표정을 보며 덜컥 겁이 났다.
“혹시 힐레인도 저리 죽이신 건 아니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