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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타락한 연적 (63/120)

63. 타락한 연적

체르샤가 도망쳤다.

무슨 수를 써서 도망친 건지는 모르겠으나 감옥 안은 비어 있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림자 기사들이 도베르에게 보고를 온 상황이었다.

힐레인 수색도 중단된 상태인데 여기서 체르샤까지 탈출하다니.

체르샤가 지은 죄는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류도 아니었기에, 만약 그녀가 본가로 향한 상태라면 체포하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을 터였다.

도베르는 복잡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대로 체르샤를 보내주어도 괜찮을까. 다른 걸 다 떠나서 힐레인에 관련된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 걸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꽤 치밀하게 힐레인의 몰락을 준비해왔던 것 같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죽이는 건데.’

제 실수다. 체르샤를 놓친 것도. 미리 죽이지 못한 것도. 도베르는 착잡한 눈으로 아인을 바라보았다.

아인이라면 지금 당장에 체르샤의 목숨을 끊어 놓을 힘이 있지 않나. 체르샤가 엉뚱한 일을 벌이기 전에 맹세의 보석으로 옭아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도베르는 아인이 혜안을 내려줄 것을 바라며 보고를 올렸지만, 그는 지나치리만치 고요했다.

다시 한번 더 보고를 올릴까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차, 아인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죄인이 사라지면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르는 건가, 도베르?”

“…….”

“일일이 보고하지마. 사라진 죄수는 추적하고.”

아인의 시선이 체르샤의 감옥을 지키고 있었던 두 그림자 기사에게 닿았다.

“실수를 저지른 자는 죽이면 그만이다.”

냉혹하게 빛나는 금안에는 조금의 자비도 들어 있지 않았다.

* * *

나는 침대 옆에 다소곳이 앉은 소년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얀 얼굴과 대비된 까만 머리카락, 스며든 햇볕 아래 선명한 붉은 빛을 내는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흑발 적안의 이미지 때문인지, 소년은 전체적으로 소 악마 같은 인상을 주었다.

‘루와 친분이 있는 치료 사제라고…….’

루는 폐허 속을 뒤지다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의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처음엔 황궁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그곳이 어딘가. 정신 나간 대사제가 아니고서야 순간 이동은 엄두도 못 내는 곳이 아닌가.

루는 황궁으로 갔다간 입구에 발도 못 딛고 내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며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황궁으로 가길 포기한 루가 택한 곳이 바로 이 별장이었다. 솜씨 좋은 치료 사제가 살고 있다는.

‘그 치료 사제가 이 소년이라니. 너무 어린 거 아냐?’

치료 사제들은 어린 나이에 신성력을 부여받는 경우가 많다고 듣긴 했으나, 이렇게 조그만 소년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어찌 됐든. 그 몹쓸 상처를 싹 사라지게 해 준 은인이니 일단은 감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았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는 인사에 소년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다리 쪽으로 향한 시선에 왠지 모를 미안함이 묻어나왔다.

아무래도 채 낫지 못한 다리의 상처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진짜 대단한 건데. 소년의 시무룩한 기분을 달래주고자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안 물어봤네. 나는 힐레인인데. 너는 이름이 뭐야?”

내 물음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이름 하나 물어봤을 뿐인데. 세 사람 다 왜 저렇게 뻣뻣해졌지?

이상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레틴이 기침이 터져 나오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게…… 야……얀! 얀이요.”

이름은 얀. 놀랍게도 또 얀이었다.

소후작과 똑같은 이름에 복잡한 생각들로 덮여 있던 머릿속으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레틴 경. 내가 경황이 없어서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그때 소후작님은 어떻게 됐어요? 기둥에 부딪히셨잖아요.”

이런…… 내가 왜 그걸 이제 떠올린 거지? 황녀님을 구하고 나면 곧장 소후작의 안위도 살펴보려고 했는데. 당황하여 부랴부랴 몸을 일으키는데, 누군가 내 손을 지그시 눌렀다.

옆에서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얀이었다.

“무사해.”

얀이 조그만 손으로 내 손등을 다독였다.

“다들 괜찮아. 이제 너만 괜찮아지면 돼.”

내 손등을 덮기에 턱없이 모자란 손인데도, 꽤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다른 건 잠시 놓아두고, 건강해지는 데만 집중해. 힐레인.”

얀의 붉은색 눈동자가 그윽한 빛을 머금었다. 무한한 이해를 머금은 시선에서는 더 이상 10살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색한 기분에 휩싸인 채 손등으로 볼을 눌렀다. 하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목소리를 사라지게 하기엔 부족한 저항이었다.

[힐레인.]

힐레인이라니. 이름에 담겨 있는 기억 때문일까. 얀의 다정한 목소리에 이상하게도 제레미가 떠올랐다.

마치…… 저 소년의 몸 안에 제레미가 있는 듯한, 그런 기분.

‘말도 안 되지.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저어 잡념을 지워냈다.

나이도, 외모도 완전히 다른 소년인데. 제레미일 리가 없잖아. 이게 다 저 아이가 나를 힐레인이라고 불러서 그래.

나는 내 손등을 덮고 있는 얀의 하얀 손등을 찰싹 때렸다. 제 쪽으로 손을 끌어당긴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얀이 멍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당황하여 붉어진 두 뺨이 무척이나 귀여웠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조금 엄격하게 얀을 바라보았다.

“이 귀엽고 쪼끄만 게……. 누나라고 해야지. 자, 따라 해 봐. 힐레인 누나.”

“……!”

내 말에 얀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푸핫. 큭크큭. 쪼, 쪼끄만. 푸하하!”

그나저나 루는 또 왜 저런데? 그는 뒤에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배꼽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얀은 그런 루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웃음이 멎지를 않자 루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뗀 얀이 나를 쳐다보았다. 의외로 순순히 나를 누나라 칭하면서.

“힐레인 누나……. 루 대공이 저럴 때마다 얀은 조금 슬퍼져.”

잔잔한 물기 어린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보석 같은 눈동자, 애처롭게 처진 눈이 꼭 상처받은 아기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루 대공, 얀이 슬프다잖아. 적당히 웃어.”

따끔한 타이름에 한 남자가 웃고 한 남자가 울상을 지었다. 멀찍이 지켜보던 또 다른 남자는 혀를 끌끌 찼다.

평화로운 방 안 풍경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고됐던 지난 일상을 떠올리자 목 안이 울컥하고 아리기도 했다.

‘근데 이러고 있어도 되나?’

루는 다리의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일주일 정도 더 쉬어가길 권했지만, 그래도 되나 싶었다. 일단은 황자비이니, 실종된 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수도 있고.

게다가 황태자님이 나를 찾고 있을 수도 있고.

‘그건 아니려나?’

손을 명치 부근으로 내려 맹세의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부하가 실종됐는데 궁금하지도 않나? 맹세의 보석을 통해 신호를 보낼 법도 한데, 잠잠해도 너무 잠잠했다.

너무 조용해서 불안한 기분도 들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기에 더 그랬다. 폭발 사건 당일 아인이 카렌의 손을 놓으라고 명령했을 때, 나는 그의 명을 대놓고 무시했으니까.

배신했다고 생각하셨을까?

아니지. 황태자님이 나를 배신자라 여겼다면, 맹세의 보석이 나를 가만 놔뒀을 리 없었다. 당장에 배신의 죗값을 물으려 했겠지. 아인은 배신한 자에게 가차 없이 죽음을 내리는 사람이니까.

이것저것 다 따져봐도 역시 맹세의 보석이 잠잠한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명치를 손으로 감쌌다.

‘루에겐 미안하지만, 내일이라도 황궁에 가봐야겠어.’

* * *

“황자님께서 제게 부탁하신 것, 방금 막 황궁에서 알아보고 오는 길이에요.”

루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황태자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폐허 속을 헤집으며 힐레인을 찾아다닐 때는 언제고.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인은 부하들을 전원을 철수시켰다.

더 이상한 건 그날 갑작스레 순직한 황태자 궁의 기사였다.

“폭발에 휘말린 것도 아니고…… 사건이 일어나고 한참 뒤에 순직이라니. 무슨 의미일까요?”

루가 제 허리 높이 밖에 오지 않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작고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유약함을 찾을 수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깔린 그사이, 루는 자신의 연적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달빛이 비친 소년의 모습은 몽환적이었다. 까만 머리카락은 헝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보드라워 보였고, 붉은 눈동자와 대비된 하얀 얼굴은 맑고 시린 빛을 품었다. 한 점의 그림 같은 외양에 루는 눈을 찌푸렸다.

‘괜히 검은 머리에 붉은 눈으로 바꿔준 것 같아.’

생각 없이 제일 좋아하는 조합으로 폴리모프 시켜줬더니, 배은망덕하게도 제 연적은 너무 예뻤다.

‘잘못 생각했어. 이 기회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추남으로 변신시켜놓는 거였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사이, 제레미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폭발 사건을 일으킨 주도자는 황태자고, 궁극적인 목표는 카렌이었던 것 같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그 책임을 제 부하에게 물은 거겠지.”

“목표가 황녀님이었다고요? 황녀님은 자기 여동생이 아닙니까, 그런 분을 왜…….”

루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인, 그자가 벌인 일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루는 일전에 샨 크로비체에서 아인의 민낯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때 자신이 봤던 아인은 냉혹한 이성을 가진 폭군이었다. 흥청망청 노는 폭군보다 이성적인 폭군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머리 굴리는 데는 도가 텄고 손속엔 자비가 없다. 적수로 두기엔 최악 아닌가.

“그럼 순직 처리된 기사들은……?”

“임무에 실패해 아인에게 살해당한 거겠지.”

제레미의 눈동자에 서늘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임무에 실패한 부하를 가차 없이 죽일 인물이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유난을 떨 정도로 특이한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 안에 힐레인이 포함된다면 다른 문제였다.

“힐레인도 그렇게 될지 몰라. 내내 카렌을 지키려 했으니까.”

“네? 황녀님을 지키려 했다니……, 그럼 황자비께서 황태자의 명을 거역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레미가 고갤 끄덕였다. 루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겪어본 바에 의하면 아인은 굉장히 무서운 자였다.

힐레인이 그런 자의 명을 거역했다는 건…… 그녀가 몹시 위험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힐레인을 당분간 이곳에 숨겨두는 게 좋겠어요.”

“아니.”

“네……?”

“당분간이 아니고 영원히.”

놀란 루가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잔잔하고 고요했다. 어떤 동요도 없는 차분한 표정에서, 루는 제레미가 이 문제를 오랫동안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영원히 그녀를 숨기겠다는 건…….”

“황자비를 그만두게 할 거야.”

황자비 자리라고 해봐야 아인에 의해 흔들리는 외줄 위. 제레미는 그런 위험한 자리에 있는 힐레인을 더는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요?”

“다른 신분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영지를 갖고 싶다면 귀족이 되게 해 줄 거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거라면 내가 가진 상단을 내어줄 거야. 대공의 반지가 있다면 신분을 숨기는 데 큰 도움이 될 테지.”

제레미가 루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켰다.

루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폴리모프 반지가 오묘한 색으로 빛났다.

이런 것쯤 힐레인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바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내어주겠다고 말하는 눈앞의 남자처럼.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힐레인의 마음이겠지. 최악의 주군을 스스럼없이 섬기고 있는 그녀가 과연 황태자를 떠나려고 할까?

“힐레인이 떠나려고 할까요?”

“설득해야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해도 반드시.”

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어쩌면 그녀는 설득에 넘어와 줄지도 몰랐다.

루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황태자의 손에서 벗어난 힐레인이라니.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 아니던가.

“언제 말할 거예요?”

“다리 상처가 거의 다 회복될 때쯤.”

“좋아요. 그때 힐레인에게 여러 선택지를 제시해보도록 해요. 음…… 대공 부인은 어떨까요?”

기분이 상기된 겸 장난삼아 꺼내본 말이었다. 정색하는 꼬맹이의 모습이 주는 재미도 있을 테고.

하지만 제레미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눈동자 끝에 잔잔한 슬픔이 내려앉은 것이 보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포기한다는 건가요? 힐레인을?”

루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최강의 연적이 스스로 물러나 준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겠냐만…… 제레미는 순순히 물러나 줄 남자가 아니었다.

그건 지금 짓고 있는 표정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아니. 다시 나를 선택하게 만들어야지. 힐레인의 숨겨둔 애인으로 전락하게 되더라도.”

짓궂게 미소짓는 제레미를 보며 루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쁜 장난에 재미가 들린 소 악마처럼 붉은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진지한 빛을 띤 눈동자를 보니 마냥 장난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루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타락한 연적이라……. 이것 참, 골 아픈 연적을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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