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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남매의 손편지 같은 어색함 (62/120)

62. 남매의 손편지 같은 어색함

“루나!”

내 앞으로 다가온 루가 나를 부축해주었다. 넘어진 나를 달랑 들어 침대에 올린 그는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하지만 이내 그 특유의 미소가 풀어지고 입술 끝이 아래로 축 처졌다. 붉은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인 채였다.

“당신은 정말.”

찰랑거리던 눈물이 아래로 툭- 흘러내렸다.

진짜 울어……? 처음 보는 루의 눈물에 나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가 되었다.

“대공? 우, 울지마?! 나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하는데 루의 볼을 적시는 눈물은 오히려 더 굵어졌다.

허리를 세운 그는, 눈물을 보여주기 싫은 것인지 잠시 나가 있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사라졌다. 다부진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훌쩍임이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들렸다.

어쩌다 레틴과 덩그러니 남게 된 나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레틴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루 대공도 취향이 참 특이하십니다.”

“……묘약 부작용 때문이에요.”

“묘, 묘약요? 설마 그때 날 잡아먹으려 했던 것처럼……!”

“아니, 아니!”

레틴의 오해를 일축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오히려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해명 끝에 결국 대화는 레틴과 나의 씨근덕거림으로 끝이 났다.

이런, 레틴과의 대화는 왜 항상 이런 식이지? 사실 하려고 했던 말은 이런 게 아닌데.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나는 처음부터 하려고 했던 질문을 어렵사리 꺼냈다.

“황자님은 무사하신가요?”

내 물음에 레틴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그건 왜 묻냐는 듯. 잠시 뜸을 들인 레틴은 그래도 순순히 내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예. 현재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다.”

다행이다. 요동치던 맥박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이번엔 카렌의 안부를 물었다.

“황녀님은요?”

“……황녀님께서도 무사하십니다. 충격으로 일시적인 기억상실에 걸린 상태지만요.”

기억상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으나, 어찌 되었든 두 사람 다 무사하다.

‘이번 작전은 성공했다고 봐도…… 괜찮겠지?’

침대에 누운 채 실실 웃음을 흘렸다. 무슨 수를 써도 살릴 수 없었던 황녀님을 이번 생에서는 살려냈다. 이건 내게 있어 아주 큰 의미였다. 미래를, 운명을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니까.

“흐하하.”

길게 웃음을 터뜨리자 레틴이 두 팔을 감싼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표정을 보니 ‘미쳤어요?’라고 묻고 싶은 듯 보였다.

“나 안 미쳤어요, 레틴 경. 헤헤.”

“제가 미칠 것 같으니 그 웃음은 그만두시죠.”

마침 바라던 바라서 조금 더 소리를 높여 웃어주었다. 레틴의 눈썹이 어디까지 올라가나 지켜보던 그때, 그가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픈 데는요. 있어요?”

응? 지금 나 걱정해, 레틴 경? 어쩐지 팔에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앙숙이었던 오빠로부터 손편지라도 받은 것 같아서.

“없, 없는데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짤막이 대답했다. 레틴 또한 이 상황을 몹시도 어색해하는 듯 보였다. 자꾸만 루가 나갔던 문 쪽을 뒤돌아보는 걸 보니.

잠시간 불편한 정적이 방 안을 가득 맴돌았다. 이런 기류를 견디고 있기 힘들어, 나는 머릿속으로 질문을 짜냈다.

“여긴 어디죠?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레틴 경은 알아요?”

“……치료해주려고 데려왔습니다만.”

레틴이 인상을 찡그리며 볼을 긁었다. 어디가 가렵기라도 한 것처럼.

치료해주려고 데려왔다? 나는 요상하게 들리는 그의 대답에 팔을 벅벅 문질렀다.

“왜요?”

“……그게 그러니까.”

뭐지, 저 쭈뼛거리는 태도는? 평소답지 않은 레틴의 태도에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레틴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봉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약초, 붕대가 가득 담긴.

“그거 저 치료해 주려고…… 가져온 거예요?”

“……!? 네…….”

아니라고 도리질을 치려던 레틴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레틴이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거라고.

애들 소꿉장난하듯 사람 신경을 툭툭 건드릴 때부터 이상하단 걸 느꼈어야 했다.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장난을 거는 7살짜리 아이처럼 굴던 게 다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랬었나?

하, 이거 참. 곤란하구먼.

“나 좋아해요?”

돌직구 같은 내 물음에 레틴이 입을 쩌억 벌렸다. 떨리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미쳤습니까?”

가까스로 목소리를 낸 레틴이 흉흉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럼 왜 저를 여기까지 데려와서 손수 치료할 물품까지 가져오신 거예요?”

“그냥 좋은 일인가 보다, 선의를 베푸나 보다 하면 되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으십니까.”

“아니, 숨기니까 더 이상하잖아요. 말해 봐요, 레틴. 이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해버리게.”

멀쩡한 다리로 뻥 차주는 시늉을 보이자 레틴이 눈을 부라렸다. 나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슬금슬금 발을 내렸다.

저 정도로 혐오하는 반응일 줄이야. 덕분에 오해는 풀렸다만.

“그럼 누가 절 여기에…….”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에, 입을 연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며 청아한 풍경 소리가 울려퍼졌다. 신비로울 정도로 붉게 빛나고 있는 두 눈동자, 오목조목 자리한 그림 같은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남자, 아니 소년이었다. 내 나이의 반절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

“나야. 내가 그랬어.”

곱게 접은 루비빛 눈동자 위로 귀여운 눈웃음이 떠올랐다.

* * *

힐레인의 의식이 돌아올 것 같다 생각한 순간 제레미는 몸을 일으켰다. 정신은 여전히 힐레인의 곁에 머물고 있었지만 조그만 몸은 이미 밖으로 빠져나온 후였다.

‘지금의 모습을 또 보일 수는 없어.’

저번엔 운 좋게 황족이라 둘러대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변명이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레틴은 아직인가…….’

제레미는 푸른 녹음이 피어난 별채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레틴에게 루 대공을 데려와 줄 것을 부탁했다.

연적에게 힐레인을 부탁해야 하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힐레인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루 대공밖엔 없었다.

그 남자는 힐레인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하게.

순간 기분이 저조하게 가라앉았다.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연분홍빛의 여린 입술이 금세 붉게 물들었지만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좀처럼 식지 않는 머리 탓인지.

자신의 낯선 모습에 한숨을 내쉬던 차, 기다리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어깨와 큰 키, 사람을 빨아들이는 재주가 있는 잘생긴 외모.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연적, 루 하버마스였다.

힐레인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혹은 제레미가 작아진 탓인지. 루는 제레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채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안도감과 함께 감도는 씁쓸함이 제레미의 기분을 어지럽혔다.

한쪽 발을 세운 채 앞코로 땅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데 문득 조그만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앙증맞은 붉은 야생화 곁에 나비와 벌이 날아들었다.

까만 콩처럼 보이는 벌이 윙윙 위협적인 소리를 내자, 은은한 빛을 내는 흰 나비가 팔랑팔랑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제레미는 충동적으로 꽃에 손을 뻗었다.

조그만 두 손을 모아 벌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나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새어 나온 한숨만큼. 딱 그정도의 무게감이 마음에서 덜어졌다.

제레미는 붉은 꽃 위로 안착한 하얀 나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제레미의 눈빛이 잔잔해지던 그 무렵, 뜻밖의 사람이 별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루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눈물이 별처럼 보였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와중에도 그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

저를 쳐다보고 있단 걸 느낀 것인지 루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제레미를 발견한 루가 눈을 비볐다. 작아진 제레미의 모습을 처음 본 그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제레미 앞에 다가왔다.

“꼬마야……?”

제레미는 대답 대신 루의 발을 꾸욱 눌러 밟았다.

“……!”

미간을 찌푸리며 한발 물러선 루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자님이세요?”

제레미가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시선을 반쯤 내리깔고도 커다랗게 빛나는 눈망울은 주인의 기분을 배반한 채 귀여움을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던 루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어려지셨어요? 평생 그런 거예요?”

평생 그런 거냐고 물을 때 루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드러났다. 제레미는 그런 루의 기대감을 단칼에 잘라냈다.

“아니. 일시적인 제약.”

“마법의 제약이요? 흠, 황자님의 제약은 어려지는 거였구나.”

뭔가를 생각하던 루가 의아한 눈으로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힐레인은 몰라요?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기 있는 거예요?”

제레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루는 그의 처연한 표정에 대답을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절 부르셨구나.”

루가 스르르 웃어 보였다.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순간 빛이 나고 있는 것 같단 착각이 들 정도로 화사한 얼굴. 약간의 백치미가 깃든 미소에, 제레미가 눈을 찌푸렸다.

‘힐레인은 백치 미소에 약한데.’

지금껏 봐온 결과, 힐레인은 백치 미소에 많이 약한 편이었다. 실제로 백치미에 약하다고 말한 적이 있기도 했고. 종종 자신의 백치 웃음에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던 걸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힐레인이 루 대공의 백치미에 빠져들면 어쩌지?’

제레미는 백치미를 풍기다 못해 순한 대형견의 모습까지 장착한 루를 보며 고민했다. 여길 보나 저길 보나 완벽한 힐레인의 취향 아닌가.

무력한 어린애가 되어버린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펼쳐진다 한들 제레미는 받아들일 수밖엔 없었다. 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제레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깊은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조그만 두 손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다니.

“황자님?”

말이 없는 제레미를 보며 루가 고개를 기울였다. 루의 물음에 고개를 든 제레미는 그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루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맞잡았다.

“당분간 힐레인을 잘 부탁해. 아주 당분간만.”

예상치 못한 제레미의 말에 루가 눈을 깜빡였다. 연적에게 좋아하는 여인을 부탁하는 제레미를 이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조금 안쓰러웠다.

‘안쓰럽다니.’

모처럼 온 기회를 옳다구나 낚아채지 못하는 걸 보니, 자신 또한 눈앞의 남자처럼 사랑싸움엔 영 재주가 없는 것 같았다.

잠깐 동안 고민한 루는 자신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는 언젠가 이시스가 주었던 선물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사람의 모습을 바꿔주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그 능력을 자신이 직접 경험했을 때 어찌나 경이롭던지.

나이를 바꿔주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완전한 타인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시켜준다면, 이 가여운 황자님도 힐레인의 곁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결심한 루가 제레미의 모습을 바꿔주겠다고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불현듯 제레미가 루를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루가 눈을 찌푸린 채 앙큼하게 저를 쏘아보고 있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조그만 게 악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개는 주인과 연인 사이가 될 수 없어.”

날카로워진 연보랏빛 눈이 루에게로 닿았다.

“그러니까 지금 개는 저고, 주인은 힐레인이라는 말입니까?”

루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른의 모습이었다면 제법 날카롭게 느껴졌을 테지만, 어린 소년의 몸으로. 그것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귀여운 모습으로 협박하는 제레미를 보고 있자 화가 나긴커녕 되레 웃음이 나왔다.

‘연적인데 미워할 수가 없네.’

피식 웃음을 흘린 루가 제레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한 자신의 연적에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다.

“모습을 바꿔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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