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숨은 천사
제레미는 마력을 전달하기 위해 힐레인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손안에 헐겁게 들어온 작은 손. 생채기로 거칠어진 피부의 감촉이 안쓰러웠다.
무너지듯 눈을 감은 그가 힐레인 가까이 고갤 숙이자, 위태로운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으음……. 하…….”
힐레인이 이토록 아팠던 적은 분명 처음인데. 어째선지 그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겪어봤던 일처럼.
묘한 기시감 속에서 치료마법을 사용하던 그 순간, 조각난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어째서. 어째서 마법이 듣지 않는 거야.]
파편처럼 파고든 기억 속엔 힐레인을 끌어안은 자신이 있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힐레인에게 치료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울어요? 어째서 그렇게 슬피 울어요……? 내가 뭐라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에 힐레인은 체념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또 한 번 제레미를 절망에 빠뜨렸다.
‘왜 하필 이런 때…….’
난데없이 스민 기억에, 제레미는 힐레인의 마지막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서늘해졌다. 하필 힐레인을 치료하기 직전에 이런 허상이 떠오른 이유가 뭐지?
가슴이 술렁였다.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죽어가는 여자와, 그녀의 곁에서 절망한 남자. 네게 곧 들이닥칠 미래라고 말하는 것 같아, 제레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미래는 없어.’
제레미는 꼭 잡은 손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젖어든 은빛 속눈썹 사이로 말간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부디 힐레인이 깨어날 수 있기를. 햇살처럼 따사로운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기를.
잠시 후 제레미의 손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퍼져나간 그 빛은 차츰차츰 힐레인에게로 이동해 가장 먼저 치명상을 입은 어깨 위에 머물렀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붉은 상처 위로 하얀 새살이 차오르고. 그와 동시에 제레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쿵!
한계점 이상의 마나를 끌어 올리자 심장에 거친 파동이 일었다. 제레미는 여전히 마법을 풀지 않은 채,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신의 영역을 넘본 대가는 혹독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을 고통이었으나, 제레미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그 고통을 참아냈다.
‘아직…… 조금만 더.’
결국 제어가 걸린 힘이 순식간에 제레미를 덮쳤다.
쿵!
의식을 흐리게 만들 정도의 강한 충격이 심장을 덮쳤다. 제레미가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땐 이미 휘몰아치는 빛 속에 갇혀버린 후였다.
잠시 후. 힐레인의 곁을 지키던 젊은 청년은 온데간데없이, 10살의 조그만 소년만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았다. 솜털 같은 은발에 커다란 연보랏빛 눈을 가진, 또래보다 작은 소년.
제레미는 조그만 손을 들어 다급히 힐레인의 몸을 살폈다.
어깨의 부상, 팔에 남아 있던 검상, 그리고 곳곳에 붉게 물들어 있던 생채기까지. 대부분의 상처가 흉터 없이 아문 상태였지만 딱 한곳, 다리에 남은 검상이 손가락 한 마디 크기 정도로 남아 있는 게 보였다.
“…….”
상처를 보는 제레미의 눈이 짙은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 신의 영역을 제멋대로 넘나들던 남자가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 * *
어느 순간부터 온몸이 부서질 듯한 아픔이 가시기 시작했다. 그건 판으로부터 치료마법이란 경이로운 것을 경험한 16살 때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 지금의 감각은 16살 때 느꼈던 그 경이로움보다 더 놀라운 수준이었다.
엉망진창이 되었던 몸이 가벼워지고 고통에서 해방된 정신이 평온으로 물드는 느낌.
꼭 요람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포근한 이불에 둘러싸인 채 아무런 고통도 없는 상태. 당분간은 이 상태 그대로 주욱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난데없이 미각에 맹공이 퍼부어졌다.
‘우욱! 이거 뭐야?’
머릿속까지 쭈뼛해지는 지옥의 맛에, 나는 미약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아파 죽겠는데 누가 이런 걸 내게 먹이는 거야?’
물처럼 느껴지는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맛은 극악했다. 미끄덩거리는 감촉에 쓰고 비린 맛. 꼭 썩은 생선 대가리를 씹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그만해.’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힘없이 늘어진 몸은 주인의 의사를 끝내 수행하지 못했다.
“으으음.”
속으로 난리를 치고 있는 것에 반해 너무나도 미약한 반응이 스며 나왔다. 몸이 정상이라면 나한테 대체 왜 이러냐며 한소리 했을 텐데. 아직 정신이 덜 깬 것인지 구름 위를 부유하는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사이 내게 극악의 맛을 선사한 소년은 거의 애원하다시피 하며 나를 달래고 있었다.
“힐레인, 부탁이야. 제발 마셔줘.”
소년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아는 사람인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귀를 간질이는 미성이 꼭 제레미처럼 느껴졌지만, 그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리게 들렸다. 아직 채 변성기도 거치지 못한 듯 곱고 앳됐다.
“응, 힐레인? 약 먹자.”
지옥의 맛을 권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더 귓가에 울렸다. 하지만 제아무리 예쁘게 부탁한다고 한들 못 먹는 건 못 먹는 거다.
나는 저 정체불명의 것이 결코 내 목구멍으로 넘어갈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먹이고 싶어 하는 소년과 먹지 않겠다는 나의 완강한 대립이 이어졌다. 소년은 매우 끈질겼다.
“쉬이, 괜찮아. 조금만 더 마시자, 응?”
하지만 어떻게 된 게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미안해졌다. 저렇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한 모금도 못 먹어줘? 딱 한 모금만 삼켜주겠단 생각으로 액체를 입안에 머금었다.
‘우, 우웩.’
역시. 섣부른 판단이었다. 혀를 때리는 강한 맛에, 나는 액체를 사정없이 입술로 밀어냈다.
‘와, 이건 절대 못 마셔.’
설령 제레미가 와서 부탁한다 해도 마셔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그때였다. 그의 짧은 한숨 속에서 향기로운 레몬향이 코끝을 스쳤다.
잔잔한 숨결 속에 파고든 감미로운 그 향기는 너무도 달콤하여, 몰래 흘러들어온 약을 무의식중에 삼켜버릴 정도였다.
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신조를 잠시 내려둔 채, 조금 더 약을 받아먹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순간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약을 다 삼키고 나자 마지막엔 입술까지 얼얼해졌다.
‘윽, 써……. 상으로 사탕이라도 하나 줬으면 좋겠다.’
쓴 약을 먹은 뒤엔 사탕을 먹는 게 일반적이잖아? 아주 강한 쓴맛을 보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닷 맛을 봐야 수지가 좀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달콤한 보상이 떨어졌다.
“잘했어.”
쪽-.
이마 위에 따스한 감촉이 와 닿았다. 촉촉하고 달콤한.
이게 뭔지 채 알아채기도 전,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발끝까지 오그라드는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며, 황자님을 떠올렸다. 이렇게 달콤한 감정을 심어주는 건 이 세상에서 그밖에는 없었으니까.
‘달아.’
사탕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달콤한 보상이었다.
* * *
역시 삼킬 때 써야 몸에 좋은 걸까? 동면에 빠진 것처럼 좀체 움직이지 않던 몸이 서서히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아 눈가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문득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사람이 몸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누구지?’
흐릿한 눈을 비비는 사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침침한 시야 사이로 내가 본 것은, 천사의 날개처럼 밝은 은빛의 잔광이었다.
‘황자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꿈을 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 내 곁을 지키고, 간호해준 사람이 제레미일지도 모른다는.
‘에이, 그럴 리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황자님이라니, 천사가 다녀간 게 더 현실적이겠다.
망상을 물리치며 천천히 몸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멀쩡한, 아니 평상시와 똑같다 해도 무방한 몸 상태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불을 걷어 살펴본 몸은 놀랍도록 깨끗했다. 딱 한군데, 다리에 검상 하나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리 크게 문제 될 상처로는 보이지 않았다.
폭탄에 휩쓸리고, 건물 틈에 갇히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을 겪었는데. 이게 말이 되나?
‘뭐지? 진짜 천사라도 왔다 갔나?’
말끔히 사라진 상처를 보니, 정말 천사가 다녀간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멍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천국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너진 건물 틈에 있는 것도, 황궁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은 평범하고 아담한 별장.
격자창을 통해 쏟아진 볕이 가운데 자리한 쇼파를, 책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을, 그리고 내가 있는 침대를 포근하게 비추었다.
편안한 우드 톤의 내부는 불이 지펴진 벽난로 때문인지 무척이나 아늑하게 느껴졌다. 창문에 걸린 녹음이 주는 싱그러움은 덤이었다.
황궁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은 없었으나 곳곳에 우아한 미감이 묻어 나왔다. 든든한 품 안에 갇힌 것처럼 안락하고 포근했다. 마치 인간 세상에 허락된 천국처럼.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내 마음 상태는 천국에 머무를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황자님은 무사하실까?’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오자, 꾹꾹 눌러왔던 걱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레틴이 황자님은 무사히 대피했다고 했으니 괜찮으실 거야. 1000번은 더 넘게 중얼거렸던 말을 다시금 되뇌었다. 그러자 혼란 속에 빠졌던 머릿속에 조금은 여유가 찾아들었다.
‘황녀님은 어떻게 되었지?’
몸을 바로 세운 나는 반지를 꼈던 손을 살펴보았다. 갑작스레 움직인 근육이 삐걱거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반지! 반지가…… 어디 갔지?’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반지가 없었다. 헐렁하게 겉돌던 반지가 기어이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거긴 황녀님이 계시는데……?’
폭탄이 터지기 직전 나는 황녀님을 아공간 보관함에 넣어버렸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므로.
폭탄이 터진 후 황녀님을 다시 꺼내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기절. 몇 시간이, 아니 며칠이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미친! 우리 황녀님 굶어 죽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지금이라도 황녀님을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누워 있다가 갑자기 몸에 힘을 준 탓인지 혹은 채 낫지 못한 다리의 검상 때문인지. 침대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일으켰을 때였다. 문밖으로 두런두런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분하군요, 어떻게 꼬박 하루가 지난 후에 저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 제가 그동안 얼마나!”
“……그래도 이렇게 데려와 준 게 어딥니까?”
따박따박 따져 묻는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 루였다. 반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레틴의 것처럼 들렸다.
그런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는지, 잠시 후 열린 문을 통해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와 레틴이었다.
두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두 사람이라면 황자님과 황녀님의 안위를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 루의 외침이 한발 먼저 공간을 메웠다.
“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