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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유예된 배신감 (60/120)

60. 유예된 배신감

어느덧 해가 기울고,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오늘 밤을 넘기기 전에 힐레인을 찾아내자는 심정으로 덤볐으나, 제레미는 강도 높은 마법 사용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먼저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겠다던 루 또한 잠잠했다.

그 와중에 제레미를 더욱 지치게 하는 것은 생존자의 부재였다. 벌써 몇 시간 째 폐허 속을 뒤지고 있었으나 간간이 발견되는 건 끔찍한 상처를 입은 시체뿐이었다.

스무 살 즈음의 여성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정리하던 제레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계에 다다른 듯 거친 숨을 내쉬던 제레미는 어느 순간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레틴의 부축을 거절하고 다시 허리를 세운 그가 지친 눈으로 폐허가 된 광장을 훑었다.

“누구 마음대로…….”

피폐해진 그의 눈빛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사라져도 좋다고 했어.”

창백하리만치 하얗게 질린 뺨 위로 말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심중에 가득 차다 못해 넘쳐 흘러버린 절망처럼, 눈물이 끊임없이 차올랐다.

자욱한 모래 먼지가 피어오르고. 제레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에겐 지금 마음껏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은 고작 건물 몇 채에 고갈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얼른 나타나 줘. 힐레인.”

입 밖으로 나온 절박한 애원이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과 함께 공기 중에 흩어졌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제레미는 홀린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곳엔 지금껏 봐왔던 현장보다 배로 참혹해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불어온 바람 속에서 화약 냄새와 함께 미약한 레몬 향이 느껴졌다. 자신의 향이 힐레인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힐레인……?”

투시 마법으로 확인한 그곳엔 여인으로 추정되는 자그만 사람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제레미는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섬세한 조종 아래 건물의 잔해가 하나씩 걷어졌다. 쉽게 깨어지는 유리잔을 다루듯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제레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갈 때쯤, 잔해 속으로 애타게 찾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힐레인…….”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여린 살결 위에 새겨진 상처들이 시야에 박혔다. 다리에 길게 그어진 검상, 아직도 피에 번들거리고 있는 어깨의 상처, 깨끗한 피부 위를 어지럽히는 생채기.

숨이 턱턱 막혔다. 온 세상으로부터 내팽개쳐진 듯 가여운 모습에.

툭-.

은빛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이 힐레인의 창백한 뺨 위로 떨어졌다.

“조금만 참아, 힐레인…….”

제레미의 손바닥 아래로 푸른색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 순간 자신이 마법사인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설령 이 자리에서 모든 마나를 소진해, 영영 아무것도 못하는 꼬맹이가 되어버린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힐레인, 그녀를 위해서라면.

제레미가 막 치료마법을 시전하려는 찰나였다. 푸른 마나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던 그때, 찰나의 평온을 깨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황자님! 위험합니다!”

주변에서 망을 보고 있던 레틴이 다급히 제레미에게로 다가와 건물의 잔해 속에 숨게 했다. 잔뜩 숨을 죽인 목소리에서 진득한 긴장감이 스며 나왔다.

“황태자가 근처에 나타났습니다……!”

아인, 아인이라. 지금 상태에서 그의 등장은 최악이었다. 마나의 흔적이 짙게 깔린 폐허, 그리고 그 속에서 힐레인을 끌어안고 있는 자신. 들켜서 좋을 장면이 단 하나도 없었다.

설마 황태자를 이곳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이 만든 폐허 속으로 굳이 걸어들어올 이유가 무어가 있단 말인가.

제레미는 기절하듯 잠이 든 힐레인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힐레인을 찾으러?’

우스웠다. 동시에 분했다. 도구처럼 사용할 땐 언제고. 직접 걸음해 힐레인을 찾으러 왔다고? 모순적이고 제멋대로인 아인의 행동에, 제레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지금도 아인의 표정은 목줄을 풀어둔 충견을 찾듯 평온했다. 냉혹한 남자가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는 건 딱 그 정도. 선심 쓰듯 사냥터 안으로 걸어오는 게 그 감정에 대해 보일 수 있는 예우의 전부일 것이다.

제레미는 의식적으로 힐레인을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어둡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가 매섭게 일렁였다.

‘넘겨줄 수 없어.’

힐레인 리야. 아니, 힐레인 엘키시에스. 라스트 이름이 이어진 그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사람이고, 자신의 아내였다.

제멋대로 내팽개쳤다가 언제든 다시 회수할 수 있는 도구처럼,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내 신부야.’

생각에 잠겨 있던 그사이, 멀리서 들려오던 걸음 소리가 어느덧 지척에서 들려왔다.

* * *

시야를 반쯤 가린 건물의 잔해 앞에서 아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던 마나의 잔재는 이곳에서 가장 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마나석으로 된 폭탄을 썼다는 걸 감안해도, 이건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어디 그뿐인가.

일부 건물들은 조각난 덩어리가 아닌 고운 가루로 변해 있었는데, 그게 꼭 누군가가 일부러 길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마법사의 손이라도 닿은 것처럼 인위적이었다.

폐허 속을 거닐며 느꼈던 의문은 길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실마리가 잡혔다.

“누군가 있어.”

“예?”

아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현재 이곳에서 가장 강한 마나가 묻어나오고 있는 뒤편이었다.

일부러 그곳만 파헤쳐놓은 듯한 느낌이 아인의 의심을 더 짙게 만들었다.

“저곳에 마법사가 숨어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아인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고고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일년 전 카렌의 독을 고쳐놓았던 그 의문의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여섯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멈춘 아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건물의 잔해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

건물 더미가 사라진 그곳에 텅 빈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의 예상과 달리 인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팅-.

그런데 그때 금속이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텅 빈 폐허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그것은 은반지였다.

아인의 앞까지 굴러온 반지는 그의 구두에 부딪히자, 마치 항의하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지러이 원을 그리던 반지는 아인을 올려다보듯 바닥에 등을 맞댔다.

반지를 내려다보는 아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범한 반지. 너무 흔해서 고급 보석상에서는 취급할 것 같지도 않은 반지인데.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반지를 손안에 쥔 아인은 예리한 시선으로 반지의 몸체를 살폈다. 아무런 무늬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반지엔 아주 가느다란 빗금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며칠 내내 힐레인의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와 같은 장식이었다.

차라리 여느 황실의 물건들처럼 보석 하나라도 박혀 있었다면 아인의 기억에 남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반지는 투박하고 단조로웠다.

남자들이나 쓸 법한. 자신이 올려다 놓은 황자비란 자리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반지.

그마저도 손가락에 맞지 않아 헐겁게 끼고 있던 게 떠올랐다. 손에 쥔 반지 또한 딱 그 정도의 치수였다.

힐레인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잠시간 더 반지를 살피던 아인은 평범한 겉보기와 다른, 반지의 특별한 능력을 읽어냈다.

‘아공간 보관 마법이 걸려 있어.’

의아함을 품은 것도 잠시, 아인의 입술 사이로 시동어가 새어 나왔다.

“나와.”

그와 함께 반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인의 앞에 뱉어냈다. 대략 20개 정도로 보이는 마나석 폭탄, 그리고 그 사이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한 소녀.

아인은 여기저기 애처로운 생채기로 가득한 소녀를 굳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색과 똑같은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 제 어미를 닮아 투명하리만치 하얗게 빛나고 있는 피부.

다신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제 동생, 카렌이었다.

아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반지와 카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번 계획에서 제거되었어야 할 아이가 버젓이 살아 있다. 그것도 힐레인의 반지 속에 숨겨져서.’

아인의 금안에 담긴 그것은 불태웠던 체르샤의 종이보다도 더 참혹한, 배신의 증거였다.

[힐레인은 황후와 손을 잡았습니다.]

아인의 머릿속에 체르샤가 했던 말이 가시처럼 박혔다.

역시나. 유예된 배신감은 더한 폭풍이 되어 돌아와 그의 마음을 휩쓸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아인은 저를 쥐죽은 듯 고요히 바라보고 있는 도베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베르.”

“예.”

“일전에 내게 폭탄을 심는 데 차질을 빚고 있다고…… 말했었지.”

도베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인과 술을 기울였던 그날, 도베르는 폭탄을 두 번 심는 수고로움을 은연중에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이런 힌트를 주기 위해 했던 말은 아니었는데.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도베르를 보며 아인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힐레인이 자신의 계획에 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쿵-.

심장 언저리에 돌덩이가 박히는 기분을 느끼며, 아인은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잠시간 가라앉았던 충격은 소리 없이 머릿속을 파고든 생각에 다시금 몸집을 부풀렸다.

‘힐레인이 황후와 손잡고 카렌을 보호하려 했다.’

쿵-.

‘나를 배신했다.’

쿵.

심장 위로 못이 박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아인은 지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느 때보다도 어둡고 차가워진 금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아인을 바라보고 있던 도베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도 말해 아인의 분노를 가라앉혀야겠다 생각하던 그때, 아인의 핏빛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림자 기사들을 전부 철수한다.”

“예……?”

아인의 말에 도베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직 힐레인을 구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림자 기사들을 철수한다니. 도베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인의 명에 토를 달았다.

“힐레인 수색은 제가 남아서 지휘…….”

“아니. 수색을 중단한다.”

차갑게 명을 내린 아인이 불현듯 낮은 실소를 흘렸다. 우스웠다. 힐레인에게서 다른 대답이 나올 거라 기대한 자신이. 명백한 증거 앞에서 이제야 겨우 머리가 맑아졌다.

자신은 대체 뭘 바랐던가. 왜 그토록 그 아이의 배신을 믿지 못해 여기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고작 주인을 문 사냥개 하나 찾자고. 미친놈처럼.

* * *

제레미와 힐레인, 그리고 레틴이 발을 디딘 그 공간은 숲속에 자리한 별채였다. 별채는 제레미의 소유로, 순간이동 시 게이트로 자주 활용하는 곳이었다.

아인을 피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떠올린 곳이었지만, 지친 몸을 숨기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힐레인을 단단히 품에 안은 제레미는 침대 위로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힐레인에게 묻어 있던 피가 하얀 시트 위로 붉게 번져 들었다.

레틴은 제레미가 힐레인에게 치료마법을 걸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빨리 치료가 필요해 보일 정도로 그녀는 심각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제레미는 곧장 치료마법을 걸지 않고, 주먹을 쥐었다 펴며 미간을 좁혔다. 지쳐 보이는 얼굴은 긴장감이 역력해 보였다.

그 표정의 의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레틴이 다급히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황자님, 혹시 마나가 얼마 남지 않은 건가요?”

제레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양으로…… 힐레인을 완전히 치료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황자님, 그것보다는 제약에 걸리실 걸 걱정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또 제약에 걸리게 되면…… 다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평생 어린아이로 머무르셔야 할지도……!”

“알아, 알아. 레틴.”

제레미의 눈빛은 고요했다. 그 모든 걸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는 듯이.

레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눈을 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말린단 말인가. 레틴은 그저 힐레인을 치료하다 그가 제약에 걸리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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