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인고의 시간
“황자님!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루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제레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레틴의 만류에도 그는 지친 몸을 일으켰다.
“이것 놔. 레틴.”
“황자님 일단 진정을!”
레틴이 제레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연보랏빛 눈동자에 고여 있던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황자님 제발.”
레틴은 제레미의 눈물에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고통이 자리한 얼굴 어느 곳에도 백치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레틴이 불안한 눈으로 판과 루를 살폈다. 판은 비밀을 지켜줄 것 같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루 대공은 이를 그냥 넘길 리가 없다. 속기 마검사인 사람에게 기억 소거 마법을 시도하기도 힘들 것 같고.
“나중에 얘기해.”
하지만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레미는 여전히 괴로운 표정이었다.
“……끼어들어서 미안합니다만, 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황자님의 연기.”
“……!”
루의 말에 레틴은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루는 그가 충격을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레틴을 살짝 밀어내 제레미를 붙잡은 손을 놓게 만들었다.
“황자님께서 이리 서두르시는 걸 보니 뭔가 계획이 있으신가 본데, 제게도 말씀해주시죠. 돕겠습니다.”
힘을 보태겠다고 말하는 루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당신 탓이야. 그러니 당신이 해결해.’
그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제레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힐레인을 곁에 두는 영광을 누리고 있으면서,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지?
‘나라면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아.’
제레미는 여러모로 위험한 남자였다. 본인이 아무리 평화를 고수하고 있어 봤자,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는걸.
이번에 힐레인을 찾게 된다면, 그는 사력을 다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작정이었다.
‘그러곤 북부로 데려갈 거야. 그 누구도 해치지 못하도록 내 보호 아래 두겠어.’
이를 위해 루는 화를 누르기로 마음먹었다. 한시적이나마 황자와 손을 잡아, 힐레인을 찾는 데 보태기로 했다.
“힐레인이 있는 곳을 알아?”
“모릅니다.”
“그럼 가지.”
“어디를 말입니까. 장소를 모른다 하지 않았습니까.”
루가 무작정 나가려는 제레미를 붙잡았다. 정확한 장소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려는 건지. 루는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제레미 또한 같은 표정이었다. 늘 순수한 빛을 담고 있던 연보랏빛 눈동자는 어디로 가고. 답답하다는 듯, 차가운 빛을 머금은 두 눈이 루를 향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광장 전체를 뒤져 봐야 할 거 아냐.”
“……!”
루는 제레미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리고 왜 같이 가자고 하는지도.
제레미는 무너진 광장을 모두 파헤칠 작정이었다. 마법으로 건물의 잔해를 몽땅 들어 올려서. 그것은 사막에서 진주를 찾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마법사가 듣는다면 미친 짓이라 할 계획이었지만, 제레미에겐 그럴 힘이 있었다. 게다가 속기 마검사인 루의 힘까지 보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 * *
그 시각, 황후가 한차례 폭풍우를 몰아친 황태자 궁에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질식할 정도로 고요한 공간 속에서 아인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아인의 얼굴 위로 하얗게 스며들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
‘모든 게 다 계획대로 되었는데.’
목숨이 위중한 황자, 죽었다고 해도 무방한 황녀까지.
모든 게 유디트의 유언대로 흘러갔고,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기쁘지 않은 건가.’
이 순간이 오면 지긋지긋한 유디트의 유언을 떨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왜 가벼워지긴커녕, 심장 언저리가 더 묵직해져 오는 것인지. 왜 더 괴로워진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한 사람의 존재만큼은 선명히 자각할 수 있었다.
‘힐레인…….’
힐레인은 완성된 퍼즐에서 빠져버린 한 조각이었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했던 그 한 조각은 완성을 기다리는 나머지 조각들마저 퇴색시키고 있었다.
정말 사소한 한 조각이었는데. 그 한 조각 때문에 모든 걸 뒤엎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줄은.
차갑게 시선을 내린 그가 테이블 위로 올라온 보고서를 손으로 와락 구겼다. 수많은 정보가 적혀 있었으나 지금 아인이 원하는 정보는 그게 아니었다.
“……힐레인은.”
“아직…… 찾는 중입니다.”
쾅!
수하의 말에 아인이 책상을 내리쳤다. 단단한 나무 위로 선명한 금이 가고. 깨진 금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인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회상에 사로잡힌 채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 속 힐레인은 폭탄이 터지는 한가운데에서, 카렌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힐레인은 어째서 카렌을 지키고 있었던 거지?’
힐레인이 이번 작전을 몰랐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납득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폭발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아인은 힐레인에게 카렌을 놓고 제 쪽으로 오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맹세의 보석을 통해 전달된 명령이 힐레인에게 닿았음이 분명한데, 그녀는 끝내 카렌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명을 거역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지금까지 제 휘하에서 벗어났던 그림자 기사가 힐레인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그리 많은 수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아인은 그럴 때마다 썩은 가지를 잘라내듯 가차 없이 배신자를 솎아냈었다.
힐레인도 그렇게 하면 돼.
처음엔 그러려고 했었다. 다른 기사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배신자에게는 조금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게 그가 살아온 방식이고, 살아남은 방식이기도 했다.
아인은 배신자를 폭발 장소에 남겨두고 차디차게 돌아섰다. 하지만 이내 발목에 쇠고랑이라도 걸어둔 듯 걸음이 무거워졌다.
질척거리는 낯선 감정에 아인은 결국 힐레인이 있던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인이 폐허 속으로 직접 들어갔을 때, 이미 늦어버린 것인지 그곳엔 힐레인이 없었다. 시체가 없는 걸 보면 죽은 것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안도감을 느끼며 그는 황태자 궁으로 돌아왔다. 힐레인 또한 살아만 있다면 금방 다시 자신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하지만 해가 저물고, 다시 그 해가 지평선 사이로 고개를 내밀 때까지도 힐레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맹세의 보석을 통해 불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허락 없이 멋대로 죽어버린 건가?
감히.
아인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도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님. 체르샤를 찾았습니다.”
도베르의 말에 의하면 힐레인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체르샤라고. 하지만 이어진 도베르의 말에 체르샤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황녀와 황자비를……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죽였다. 도베르의 입에서 어렵게 나온 그 말은 아인의 머릿속에서 허무하게 스쳐 지나갔다.
죽였다? 믿지 않는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듣기 전까지는.
“……어디냐.”
“현재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직접 가보겠다.”
아인이 지체없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무기력하게 자리를 지키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황태자님, 손부터 먼저 치료를…….”
“됐어.”
아인이 대충 손을 털어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불길한 빛을 머금은 핏방울이 이어졌다.
* * *
“나는 이번 임무에서 공을 세웠다! 어째서 날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이냐!”
황태자궁의 지하 감옥 안, 체르샤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좁은 공간 안을 날카롭게 울렸다.
“뭔가 잘못됐어. 잘못됐다고! 당장 황태자님을 뵙게 해줘!”
체르샤의 절규에도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 나를 가둔 거야?’
체르샤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이번 임무에서 가장 높은 공을 세운 건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칭찬받아 마땅할 일을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인가 했는데.
결과는 감옥행이었다.
‘대체 왜?’
체르샤는 보고를 올리러 황태자 궁으로 왔으나 도베르는 곧장 체르샤를 지하 감옥에 가둬버렸다.
자신은 그저 배신자 힐레인과 황녀를 죽였다고 말했을 뿐인데.
약간의 우쭐함을 담아 전한 말에 도베르는 마치 사람을 씹어 삼킬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장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단 듯.
‘도베르…… 이 체르샤를 감히 그따위로 대접해? 이곳을 나가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체르샤가 분노에 물들어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서 그림자 기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뭐? 황태자님이라고?
체르샤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지하 감옥으로 모습을 드러낸 아인을 보던 그녀가 낯빛을 환하게 밝혔다.
‘역시, 직접 와주실 줄 알았어.’
고아한 금빛의 머리카락, 태초부터 지배자로 태어난 듯 우아한 자태. 체르샤의 마음이 술렁였다.
‘나를 이곳에서 꺼내주시고 상을 내리시겠지.’
체르샤는 태양을 한 조각 떼어온 듯 고고하게 빛나고 있는 아인의 모습에 흡족함을 느꼈다. 곧 저 수려한 얼굴 위로 미소가 번질 거라 생각하니 그간의 수고로움이 모두 보상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황태자님. 주군의 충실한 종, 체르샤 레이몬드가 인사 올립니다. 당신께서 내리신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습니다.”
아인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해 보인 체르샤가 두근거림을 누르며 아인을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따스하게 저를 맞이해줄 거라 생각했던 아인은, 어째선지 어두운 표정이었다. 순간적으로 스치듯 지나간 살기에 체르샤는 어깨를 떨었다.
“네가 수행한 임무가 무엇인지 말해.”
도베르에게 전달받지 못한 건가? 두 눈을 크게 뜬 체르샤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네? 그건…… 카렌 황녀를 죽이고…….”
“또?”
“그 과정에서 배신자 힐레인을 죽였습니다.”
체르샤의 말에 잠시간 정적을 지키고 있던 아인이 입을 열었다.
“다시.”
짧게 흘러나온 한 마디에서 채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넘실거렸다.
체르샤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자신을 친히 꺼내줄 것이라 여겼던 주군이 죽음의 신보다 더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힐레인을 죽였습니다. 구식 폭탄이었지만 직격탄으로 맞았으니 결코 살아 있을 리 없습니다.”
체르샤가 아인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아인의 두 눈 속에 스며든 헛된 기대를 단숨에 부수기 위해.
“힐레인은 죽었습니다.”
“닥쳐라.”
그런데 그 순간 아인이 맹세의 보석을 통해 체르샤에게 잔혹한 벌을 내렸다. 강도 높은 전기 자극이 체르샤의 온몸 곳곳을 누볐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체르샤의 눈에 흰자위가 드러난 순간, 도베르가 아인을 조용히 막아섰다.
“황태자님. 아직 조사할 것이 남았습니다.”
체르샤를 동정해서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었다. 힐레인의 죽음을 희열에 차 말하는 체르샤는 죽어 마땅하니까. 하지만 건물의 위치나 폭탄의 위력 등, 조사할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야. 힐레인이 돌아오면 직접 죽일 수 있게 할 거다.”
아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체르샤에게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런데 그때. 체르샤의 갈라진 목소리가 아인의 발목을 붙들었다. 아인의 스산한 눈빛이 체르샤에게로 향했다.
“제가 폭탄을 던졌다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힐레인은 제가 죽였습니다. 하하하. 이 세상에 없으니 저를 죽일 수도 없겠군요.”
“네 년이 드디어 미친 것이로구나.”
“컥, 크으윽!”
숨통을 당장 끊어놓을 듯한 고통이 체르샤의 온몸을 누볐다. 하지만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힘겹게 다시 말을 이었다.
“힐레인이…… 황태자님을 배신한 것을 아십니까.”
“…….”
아인이 우뚝 멈춰선 채, 시선만 아래로 내렸다.
체르샤를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한계점까지 찰랑거리던 분노가 금방이라도 끓어오를 것처럼.
“힐레인은 황태자님을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을 주군으로 삼았단 말입니다!”
“네 년이 지금. 내가 못 죽일 거라 생각하고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는 것이더냐?”
아인이 맹세의 보석을 통해 서서히 고통을 불어넣었다. 바닥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던 체르샤가, 핏발 서린 눈을 치켜 올렸다.
“크읍! 힐레인은 황후 폐하를 주군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황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죠.”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보이기 위해, 체르샤가 눈을 부릅떠 보였다. 흰자 위로 잔뜩 선 핏발 탓에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