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 보고 싶은 사람 (57/120)

57. 보고 싶은 사람

광장 가득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헤렌 축제를 기념해 알록달록한 수를 놓은 거리의 장식, 생기를 머금었던 번화가의 골목은 회색의 폐허로 변해버린 후였다. 무너진 건물 여기저기서 채 수습되지 못한 잔해와 시체는 거대한 무덤을 연상시켰다.

“아직도 진입하기는 힘든 것이냐.”

기사단장의 한숨 사이로 깊은 시름이 섞여들었다.

폭탄이 멎은 지 꽤 되었으나 기사단은 현장에 손도 못 댄 상태였다. 현장의 변두리에서 겨우 구조를 돕는 정도랄까. 정작 폐허 속 깊은 곳까지는 발도 못 디디는 상태였다.

“예, 마법사들이 길을 만들고는 있으나…… 애써 만든 길조차도 금방 무너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연속된 폭발에 건물들이 약해진 상태였다. 진입이 어려우니 수습도 더디게 흘러갔다.

“쯧……. 큰일이군.”

골치가 아프다는 듯 기사단장이 미간을 손으로 주물렀다. 폭탄 테러를 주도한 자는 잡히지 않았고, 폭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당장 황자님만 해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질 않았나.

거기에 황자비와 황녀까지 실종된 상태이니 옷을 벗을 각오를 해야 할는지도 몰랐다. 아니, 직함을 내려놓는 데 그친다면 오히려 안심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실지…….”

끝내 황녀를 찾지 못하면 격노한 황후가 무슨 처벌을 내리게 될지, 기사단장은 벌써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 들었다.

* * *

“카렌!”

황태자 궁의 복도 안으로 구슬픈 절규가 울려 퍼졌다.

“카렌을 돌려줘, 아아, 카렌!””

마른 나무껍질처럼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는 여인은 엘리샤였다.

평상시 고아하고 기품 넘치는 황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풀어헤친 머리칼과 흐트러진 옷매무새에서는 아이 잃은 어머니의 모습만이 묻어나왔다.

“당장…… 당장 우리 카렌을 찾아내!”

여린 주먹을 힘껏 말아쥔 엘리샤가 아인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하지만 굳건하게 닫힌 문은 그녀의 가녀린 주먹에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황태자……! 네가 시킨 짓인 거 다 알고 있어!”

엘리샤는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단번에 아인을 떠올렸다. 폭발을 피해간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 그리고 그것 외에도 아인의 본모습을 아는 그녀로선 의심할 증거가 충분했다.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우아한 황태자. 그 이면엔 복수에 미쳐 있는 악마가 있었으니까.

한때는 그녀도 아인이 악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했었다.

아인은, 잘못 들인 후궁 하나에 제 어미가 속절없이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웃음과 추억으로 가득 차야 할 유년기에 그가 본 것이라곤 폐궁에서 발악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고작이었다.

유디트가 꺾이지 않도록 돕고 싶었으나 아인은 어렸고, 갓 후궁이 된 자신은 너무 여렸다.

몇 년이 흐른 후,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았을 때 유디트는 세상을 떠난 후였고 어렸던 황태자는 예리한 칼날을 가슴에 품은 채 자라난 상태였다.

그 슬픔까지 모두 품어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자신이 생각했던 상처받은 소년은 더 이상 아인의 안에 없었다. 폭군의 길을 걷기로 한 광기 어린 사내가 있을 뿐.

아인은 트릭샤의 죽음 뒤에도 복수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제레미에게 향하던 칼날이 카렌에게로 향했을 때.

엘리샤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인의 변화에 엘리샤 또한 안락한 고치에서 탈피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샤는 소극적인 황후의 모습을 벗고 기꺼이 아인의 적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우습게도, 결국 카렌을 잃고 말았다.

목숨보다도 사랑했던 딸을. 이렇듯, 허무하게.

“넌 두 동생을 없앤 악마다. 지옥 불에서 영원히 타들어 갈 악마! 죽는 날까지 결코 편히 살게 놔두지 않을 것이야.”

엘리샤가 이를 악물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인! 저주한다. 아인!”

울부짖던 엘리샤는 결국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채 다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그녀의 뺨 위로 슬픔의 흔적을 그려냈다.

* * *

폭탄이 터진 폐허를 지나던 그 날, 레틴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코흘리개 시절 마지막으로 터뜨렸던 울음보다도 더 서럽게.

시종장 베르킨의 도움으로, 황자님의 어린 모습을 들키지 않고 황자궁에 입성할 수 있었으나. 그 후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작아진 주군을 그 어떤 치료사에게도 보일 수가 없었다.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어 초조해하던 그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자가 바로 시종장 베르킨이었다.

광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때, 레틴은 베르킨에게 꼼짝없이 들키고 말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당황한 자신과 달리 베르킨은 아주 침착하게 행동했다.

몰래 들것을 들고 와 제레미를 눕히고, 여러 겹의 천을 덮어 체형이 드러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황자궁에 올 때까지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미 황자가 작아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시종장.”

“아닙니다. 황자님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저는 치료사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아, 그건 안 됩니다.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황자님의 모습은…….”

“그건 염려치 마십시오. 딱 한 분, 비밀을 지켜주실 분이 계십니다. 일전에 황자궁에 그분께서 들리셨을 때 무슨 일이 있거든 꼭 자신을 불러 달라고 재차 당부해주고 가셨거든요. 황자님께도 내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셨으니 지금 황자님의 모습을 보시더라도 함구해주실 겁니다.”

“그게 누구……?”

레틴의 물음에 베르킨이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판 르웰켄님입니다.”

* * *

시간을 쪼개놓은 듯 더디게 흘러가는 혼란 속에서도, 어김없이 밤이 찾아들었다.

레틴은 촛불 아래 일렁이고 있는 판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베르킨의 제안이 불안하긴 했으나 부상 당한 황자님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하지만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판은 성심성의껏 제레미의 치료를 도왔다.

그 덕에 제레미는 지금 상처 하나 없이 깨끗이 회복한 상태였다. 마력이 되돌아온 건 아니라 아직 소년의 모습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제 혼수상태에 빠졌던 정신만 돌아오면 걱정이 없었다.

‘황자님, 얼른 깨어나세요.’

레틴이 듬성듬성 핏물이 든 은빛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러다 문득 레틴의 시선이 반듯하게 다물어진 제레미의 두 눈에 닿았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눈꺼풀 위로 번진 푸른 핏줄이 애처롭게 보였다.

‘그러게 왜, 왜. 그 첩자를 쫒아 가셔선 이런 변을 당하신 겁니까.’

그는 자신의 주군을 완벽히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설령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다고 해도, 검을 놓지 않을 작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제레미는 레틴의 검 아래 잠자코 보호받고 있지 않았다.

폭탄에 땅이 울리던 당시, 제레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 마냥 걸음을 옮겼다. 그의 위로 떨어지고 있는 건물의 잔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는 기둥에 깔리기 직전의 힐레인이 있었다.

[황자님!]

다급히 제 주군의 뒤를 쫓았지만 부서진 기둥이 제레미의 조그만 몸을 덮어버린 후였다.

그때의 참담함이 다시 느껴지는 것만 같아 레틴이 가늘게 손을 떨었다.

“레틴 경. 자네도 이제 좀 진정하고 눈이라도 붙이게.”

판의 염려에 레틴이 손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판에게 향한 그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황자님께서 금방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까요?”

“성인으로 돌아오는 건 제약이 풀려야 가능한 것인데…… 그게 당장 오늘이 될지, 혹은 일 년 후가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르네. 일단은 의식부터 찾으셔야지.”

“의식은 언제 돌아오실까요…….”

“언제 깨어나실지도 사실…… 잘 모르겠네.”

판의 시선이 제레미에게 닿았다. 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나왔다.

“혹시 모르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더 빨리 일어날 수도.”

판은 힐레인을 두고 한 말이었으나, 그 말에 반응한 건 엉뚱하게도 레틴이었다.

“그렇담 제가 황자님의 곁에 앉아 있겠습니다.”

레틴이 의자를 하나 가져와 꾸역꾸역 제레미가 누운 침대 옆으로 놓았다. 그러자 판이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황자님이 지금 보고 싶어하는 건 다른…… 사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판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흐르는 눈물을 막기 위한 저항이었으나,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힐레인 그 아이 때문에 늙는군, 늙어.”

판이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손이 지나간 곳마다 주름이 깊어졌다. 제레미를 치료하느라 피곤한 탓도 있었으나,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야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만드는 고약한 사고뭉치 때문이기도 했다.

“고얀 놈. 나타나기만 해봐라. 힐 마법을 산더미처럼 먹여버릴 테니.”

짐짓 화난 척 말을 잇는 판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런 판을 보는 레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무거운 정적 속에서 울음을 삼키고 있던 그때였다.

“헉!”

무언가에 깜짝 놀란 레틴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테라스로 향하자마자 검은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쿵-!

남자가 발을 디딘 곳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음의 원인은 바닥에 깊은 상처를 낸 붉은 검이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앗아갈 것만 같은 흉흉한 마검.

레틴이 검 끝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붉은 마나를 머금어 타오르는 듯이 보이는 루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평소 잘 지어 보이던 유들유들한 미소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루 대공! 이런 무례한.”

레틴이 빠르게 검을 발도했다.

‘감히 황자님의 방에 무기를 들고 나타나다니.’

이것은 명백한 침입이고 황자님에 대한 암살시도였다. 당장 즉결처분해도 시원찮다 생각하며 레틴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하지만 레틴의 검은 루에게 채 닿지도 못한 채 가루가 되어버렸다.

쿵-!

맨몸으로 덤비는 레틴을 루는 가차 없이 밀쳐냈다. 그의 손길엔 조금의 자비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으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레틴이 벽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힘겹게 들어 올린 손이 루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황자님께…… 손대지 마.”

“……나의 그녀는.”

루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마력이 깃든 선홍빛 시선이 붉은 검을 쓸어내렸다. 섬뜩할 정도로 붉은빛이, 그와 검 사이에서 공명하듯 빛이 났다.

“당신은 지금 잠이나 자고 있을 때입니까? 황자.”

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제레미에게 다가갔다. 붉은 마검이 당장이라도 제레미를 산산조각낼 듯 웅웅거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를 막은 건 판이었다.

“대공.”

“……비키십시오.”

“내 환자에게 손대지 말게. 이 판 르웰켄이 경고하는 걸세.”

“판…… 르웰켄?”

“이제야 좀 나를 알아보겠는가? 루 대공.”

하얗게 새어버린 눈썹 아래로 그의 눈동자가 차분한 빛을 머금었다. 따뜻하지만 조금은 엄격한 눈빛이었다.

“오랜만이구나, 꼬맹아.”

판은 치료사제 시절부터 루와 알던 사이였다. 일찍이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제 형을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선했다.

오랜만에 본 꼬맹이가 비록 마수보다 더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해도, 그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로만 보였다.

“판 님…….”

화염같이 타오르던 루의 눈동자가 점점 제 색을 찾아갔다.

잠시 후, 선홍색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런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루가 고갤 푹 떨구었다.

“루나가……. 힐레인이 실종됐대요.”

물기 어린 목소리가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루나라……. 그건 북부어로 루의 아내라는 뜻 아니더냐?”

북부에서는 누구누구의 아내라는 뜻으로 이름 뒤에 ‘나’를 붙였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대공이 제국의 황자비에게 부를 만한 호칭은 아니었다.

‘황자비를 아내라고 부르다니. 이 정신 나간 놈 좀 보게?’

하지만 판이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전에, 루가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제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어요, 무척이나.”

아이처럼 흐느껴 우는 그를 보며, 판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루의 흐느낌이 한층 더 격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무얼 원하는지 아니까. 황자의 곁에 둘 수밖에 없었어요.”

루가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터져버린 눈물은 쉬이 그치지 못하고, 또다시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데려갈 걸 그랬어요.”

“인석아, 그건 납치야.”

“알아요, 나쁜 짓인 거……. 그래도 그냥 제가 나쁜 놈이 됐으면, 그녀에게 이런 일은……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에요.”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서 나왔다. 북부로 향하는 길,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모른다. 부디 힐레인이 무사하기를 바랐건만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가 들은 이야기는 황자비의 실종이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이전에 해왔던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야.’

루는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쏟아냈다. 사랑 때문에 울어본 건 세기의 바람둥이였던 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힐레인이…… 잘못됐으면 어쩌죠?”

루가 고개를 들고 판을 바라보았다. 아니라는 대답을 간절히 바라는 눈빛에는 짙은 절망감이 묻어 있었다.

“힐……레인.”

그런데 그때였다. 음울한 악몽에서 이제 막 건져진 듯,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제레미의 주변으로 푸른 빛이 모여들었다. 제레미를 끌어안은 빛이 조그맣고 여린 몸을 뒤덮고, 빛이 걷힌 자리에 성인의 제레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닫혀 있던 두 눈꺼풀이 새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은빛의 속눈썹이 촘촘히 자리한 아래로 연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일어날 거다.’라는 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