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일촉즉발
잔뜩 흐트러진 핑크색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이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죽지 않을 만큼 찔렀더니 아프지도 않은 건가.
“웃어,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아니. 윽. 후회하고 있는데.”
“뭘? 나를 진즉에 죽이지 않은 거?”
내 말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무슨 남편에게 심한 모욕을 들은 아내처럼 놀라며 눈을 흘겼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자기? 나 상처받았어.”
“뭐, 상처? 더 입혀줘?”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자, 그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윽. 쿨럭. 아니. 그나저나 이거.”
도베르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약병 안에는 조그만 알약이 들어 있었다.
“아픈 얼굴 못 봐주겠어. 세상에서 제일 못나 보여. 이거 해독약이니까 먹어, 쿨럭.”
자긴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누구 얼굴 더러 못났다고 하는 거야?
“이제 네가 주는 거 안 먹어!”
“이거, 쿨럭. 진짜 약인데. 내 아지트를 걸고 맹세해. 집돌이에게 아지트가 무슨 의미인지 알지? 쿨럭.”
“미친놈. 이리 내놔!”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에게서 약을 뺏었다. 솔직히 영 믿음이 안 가긴 하지만…… 지금은 도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서 빨리…… 굳어버린 몸을 풀고 황녀님을 따라가야 하니까.
“미친놈이라니…….”
약을 삼키는 나를 올려다보며 도베르가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불쌍하고 처량해 보여 가슴이 콱 막혀왔다.
그는 항상 그랬다. 아인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다 도맡아서는, 결국 혼자만 저렇게 가여운 꼴이 되고 만다. 죄를 짓고, 미안해하고.
죄책감 어린 도베르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바보, 천치. 그냥 콱 뒈져버려.”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 남지도 못할 거면서.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약 기운이 도는 것인지 다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갈 거야?”
도베르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대신 검을 고쳐 쥐었다.
“나 죽이고 가려고?”
도베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두 눈 가득 장난기를 머금은 걸 보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를 무시하며 검으로 드레스 자락을 찢어냈다. 하얀 맨다리가 허벅지까지 훤히 드러나자, 도베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옥 가기 전에 좋은 구경…….”
“입 닥쳐.”
나는 찢어낸 드레스 자락을 도베르 위로 덮어 버렸다. 그러자 도베르가 얼굴만 살짝 내밀어 내게 물었다.
“이건 왜?”
“기사들이 자객인 줄 알고 죽이면 어떡해. 시커멓게 입어선. 지금 누가 봐도 악당처럼 보여, 알아?”
“나 걱정해주는 거야? 죽을까 봐? 아까는 뒈지라고 하더니…….”
도베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눈동자만 들어 내 눈치를 살살 살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속이 뒤집혔다.
“돌아왔을 때 뒈져 있으면 가만 안 둬. 그럼 내가 죽여버릴 거야!”
어쨌든 도베르가 죽는 건 싫다. 나는 뒤늦게 ‘카렌 황녀가 잘못되면, 원망할 구석은 있어야 하니까.’라며 변명거리를 붙였다.
“죽었는데 어떻게 죽여.”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도베르가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도 웃을 힘이 있다니. 온몸의 통각이 없어져 버린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도베르 저 도른 새끼.’
* * *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폭탄 소리. 무너지는 건물과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나를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건, 카렌이 지금 옆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렸던 오늘의 풍경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간 축제, 내 곁에서 웃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 나 그렇게 큰 걸 바란 것도 아니잖아?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몸이 아직 덜 회복된 상태였지만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디 계신 거예요, 황녀님!’
벌써 카렌과 헤어진 지도 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체르샤가 부상을 입은 상태이긴 해도,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임무를 수행해 내는 그림자 기사라는 걸 떠올리니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카렌을 찾기 위해 분주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 건물들 사이로 몸을 피하는 작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잔뜩 먼지가 낀 드레스. 커다란 두 눈은 생전 처음 느끼는 공포감에 젖어 있었다.
“황녀님!”
카렌은 체르샤에게 쫓기고 있었다. 카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체르샤가 따라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시퍼런 빛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검날을 세우는 걸 보니 이제 끝을 볼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건물 안으로 사라진 두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미친 듯이 다릴 움직였다.
‘제길……! 너무 늦지 말아야 할 텐데!’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카렌의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꺄악! 살려줘!”
소리가 들려온 곳은 2층이었다. 나는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계단 위로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제길, 제길, 제길!’
약 기운이 덜 풀린 다리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겨우겨우 2층에 도착한 나는 검을 높이 겨누고 있는 체르샤와 그 아래 덜덜 떨고 있는 카렌을 발견했다.
“잘 가십시오! 황녀님.”
체르샤가 높이 쳐든 검을 아래로 내렸다.
“멈춰!”
그녀의 검이 카렌을 내리그으려는 그 순간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챙강-!
다행히 단검은 제대로 체르샤의 검날을 맞혔다. 갑작스레 검에 가해진 충격에 그녀가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사이 나는 카렌의 앞으로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황녀님?”
“어, 언니!”
카렌이 뒤에서 와락 내 허리를 붙들었다.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지. 허리를 통해 느껴지는 두 팔의 떨림이 그녀가 느꼈던 공포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많이 무서웠죠.”
“흑, 흐윽.”
“지금부터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지켜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팔을 다독거리자 카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작게 웅크린 그녀를 완전히 뒤로 숨긴 나는 검을 회수하고 있는 체르샤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참 끈질기네. 골목에서 죽은 척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자비를 베풀어 살려줬을 텐데, 체르샤.”
“……!”
체르샤가 수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반쯤 내리깐 두 눈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묻어나왔다.
“넌 사사건건 내 일을 방해하지!”
격분한 체르샤가 거칠게 복면을 걷어냈다. 화염 같은 곡선을 그리는 붉은 머리카락, 경국지색이라 불리는 화사한 외모가 검은 천 밖으로 드러났다.
“내가 언제? 잊었나 본데. 사사건건 나를 방해하고 죽이려 한 건 바로 너였어.”
“넌 마냥 선량한 줄 알지? 가식 떨지 마. 너도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
죽이려 했다니, 내가 언제? 방금 전 골목에서도 살려주었지 않나.
번번이 내게 발톱을 세우는 체르샤를 부지런하게 살려 보내는 나도 참 바보 같긴 하다만. 자비에 미친 사람마냥 살려 보내고, 또 살려 보내길 반복해 왔던 사람으로서 저런 오명은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내가 언제 널 죽이려 했다고 그래?”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이야? 가식적인 년. 며칠 전 내게 독을 보냈잖아! 멍청한 시녀가 내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내가 당할 뻔했어. 킥킥.”
붉은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웃는데……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뭔 소리야, 독이라니……?”
“뭘 모르는 척이야? 내게 독을 보낸 게 너잖아. 꽤 비싼 걸 쓴 모양인데. 대체 무슨 독을 쓴 거야?”
체르샤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였다. 독이라니……? 내가 체르샤에게 독을 보냈다고?
“나 아냐.”
억울함에 고갤 저었다. 아인에게 이름 한 번 불리는 게 소원인 체르샤의 발악이 가엽긴 했어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체르샤는 내가 범인이라고 완전히 못을 박고 있었다.
“너 말고 누가 있겠어. 2주 전 네게 독을 쓴 게 나란 걸 알고 복수한 거잖아.”
2주 전 독이라면…… 시에나가 내게 먹였던 그거? 설마 하는 생각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혹시…… 그 쿠키 말하는 거야?”
“그래. 네 시녀를 통해 전달한 그 독 쿠키 말이야.”
순순한 체르샤의 인정에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2주 전 내가 먹은 쿠키에 독을 탔던 게 체르샤였다니.
나는 그게…… 황자님이 쓴 독인 줄로만 알았는데.
참담한 분노를 느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동안 그 일로 얼마나 속을 태웠던가. 제레미에게 미움받고 있을 거라 은연중에 생각은 했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내가 미운 건가 싶어서 얼마나……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었다고.
억울함에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체르샤가 목소리를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꺄하하. 지금 우니?”
“너…… 이리 와.”
“뭐?”
“이리 와, 이 삐-를 삐-해도 모자랄 삐- 삐- 같은 년! 삐- 삐-. 삐삐삐삐삐!”
살포시 황녀님의 귀를 손으로 막은 뒤 차진 욕을 퍼부어주었다. 귀족 가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그녀로서는 뜻조차도 해석할 수 없을 험한 욕들을.
“뭐?”
그래도 대강 욕이란 건 알겠는지 그녀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냐, 욕이 아깝다. 그냥 좀 맞자.”
성큼성큼 다가가 체르샤의 양 손목을 붙들었다. 이미 한 차례 부상을 입었던 체르샤는 내게 손쉽게 제압당했다.
“악! 이것 놔!”
허리가 깔린 채 바닥에 누운 그녀가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꺄악!”
때리지도 않았는데 체르샤가 비명을 질러댔다. 정신이 쏙 들게 손을 좀 봐주려고 했는데. 두려움 가득한 눈을 보자 또 어김없이 망설여졌다.
언젠가 ‘넌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다.’라고 말했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땐 ‘착한 게 죄야?’ 싶었으나 이 정도 수준이면 죄가 맞지 싶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이유 좀 알자.”
“흐윽, 흑. 너는 다 가졌잖아. 그분께 이름으로 불리고…… 총애받고…… 중요한 임무도 네가 다 가져가지…….”
체르샤가 맑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인의 총애? 이름으로 불리는 것?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난 잘 모르겠어. 내가 뭘 다 가졌다는지.
“오히려 많은 걸 손에 쥔 사람은 내가 아닌 너잖아?”
“흐윽. 뭐……?”
“멀쩡하게 살아계신 부모님, 집에 가면 반겨주는 동생들, 지치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본가. 글쎄, 나한테는 그런 게 없거든.”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가지지 못한 내게 넌 다 가졌다고 말하는 거야? 글쎄, 나는 네 말에 도통 공감할 수가 없어.
어쩐지 한참 어린 여자아이를 혼내고 있는 기분이 들어, 몇 대 때려주고 말겠다는 생각도 식어버렸다.
천천히 그녀에게서 몸을 일으킨 나는 카렌에게로 갔다.
어차피 또 제압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체르샤는 훌쩍이기만 할 뿐 다시 내게 덤비는 무모한 짓을 하진 않았다.
‘오늘도 체르샤를 살려 보내네.’
스스로도 참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카렌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 뭐. 지금은 황녀님을 챙기는 게 중요하니까. 황녀님에게만 집중하자.
“황녀님, 저한테 업히세요.”
“언니, 저 사람…….”
카렌이 조그만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부상 당한 몸을 이끌고 창문을 넘고 있는 체르샤가 보였다.
‘또 뭘 하려는 거야?’
의아함을 안고 창문가로 다가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퉁-!
창문을 통해 검고 동그란 물체가 하나 들어왔다. 그것은 구식 폭탄이었다. 심지에 불을 붙여 발동을 거는 구식 폭탄은 마나석 폭탄보다 화력이 약하긴 해도, 건물 하나 정도는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에 불이 붙은 상태잖아?’
작은 불씨가 빠른 속도로 심지를 태우고 있었다. 불씨를 죽이는 게 지금으로써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나, 지금 상태로는 폭탄에 손이 닿기도 전에 터질 것 같았다.
“화, 황녀님!”
비명처럼 소릴 높이며 카렌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쾅!
폭탄이 터졌다. 건물의 잔해가 쏟아지고. 곧 끔찍한 고통이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