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의문의 소년(2)
제레미는 약 열흘 전, 힐레인이 광장에서 폭탄을 파헤치고 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폭탄을 제거하고 있어?’
아인이 시킨 일이라면 폭탄을 심어 놓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울 텐데. 어째선지 그녀는 폭탄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중이었다.
제레미는 그날 힐레인을 황자궁에 데려다준 뒤 다시 광장으로 나와 남은 폭탄을 제거했다. 그녀가 굳이 수고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게.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을 없애기 위해.
제레미의 마법으로 폭탄은 손쉽게 제거되었지만, 머릿속에 감도는 의문은 끝내 뿌리 뽑지 못한 채였다.
‘폭탄을 제거하는 게 아인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힐레인의 독자적인 행동이었을까.’
내내 고민에 빠져 있었던 제레미는 오늘에서야 답을 찾았다.
카렌을 노리는 자객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카렌을 보호하고 있는 힐레인을 보면서.
‘힐레인은 지금 아인의 뜻에 반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광장에서 폭탄을 제거했던 것도, 지금 카렌을 지켜주고 있는 것도 전부 이해가 됐다.
‘하지만 어째서?’
제레미의 얼굴이 의문에 물들어가던 그때, 모두 제거했다고 생각했던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굉장한 위력을 발휘하며 주변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이게 대체…… 폭탄은 분명 모두 제거했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폭탄이 제거된 걸 누군가 눈치챘고 다시 광장에 폭탄을 설치했다. 지금은 그 가설이 제일 정확해 보였다.
‘내 불찰이야.’
한 번 더 확인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연이은 폭발로 주변은 먼지가 자욱했다.
‘힐레인은? 카렌은 어디 있지?’
제레미가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고개를 내리자 눈에 익은 한 사람이 시야에 걸렸다.
“레틴!”
피투성이가 된 제복, 창백해진 얼굴. 뼈를 드러낼 정도로 패인 어깨 위의 상처가 특히 더 심각해 보였다.
제레미는 지체없이 레틴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그의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번져 들었다.
‘이미 죽음이 드리운 상태라면 치료마법이 통하지 않을 텐데…….’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듯, 그의 마력이 레틴의 몸을 뒤덮었을 때였다.
정신이 든 레틴이 스르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감겨 있던 제레미의 눈도 떠졌다. 고난이도의 마법, 게다가 꽤 많은 양의 마력을 소비한 탓에 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감돌았다.
“황자님?”
완벽에 가까운 치료 마법 덕에 그는 곧장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상의를 바라보던 그가 흠칫하며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치료마법을 쓰신 겁니까? 이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회복시키신 거면…… 마나 소모가 심했을 텐데…….”
강력한 치료마법은 신의 권능이라 불릴 정도로 고도의 마법이었다. 그리고 신의 영역을 넘본 대가는 반드시 ‘제약’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레틴이 걱정하는 부분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괜찮아, 아직 조금은 남아 있어. 지금은 급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레틴.”
레틴이 제레미의 상태를 채 확인하기도 전, 그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투시 마법으로 자욱한 연기 속을 들여다보던 제레미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어깨를 움찔했다.
“황자님……?”
레틴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 제레미가 걸음을 뗐다.
“황자님! 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
레틴은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제레미를 뒤따랐다. 중간중간 안개를 뚫고 들어온 자객들의 검을 걷어내면서.
위험천만한 전쟁터를 뚫고 달려간 곳엔 카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카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땅이 갈라진 틈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보였다.
‘황자비잖아?’
그리고 그때 또다시 땅을 뒤흔드는 폭발이 이어졌다. 위태롭게 땅을 붙잡고 있던 힐레인이 손을 놓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제레미의 주변으로 푸른 마나가 피어올랐다.
‘마법을 쓰시려는 건가? 저 상태로?’
레틴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주변에 안개가 자욱한 탓에 들킬 확률이 적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누군가가 이 장면을 보면 어쩌려고?
더군다나 지금 마법을 사용하면 꼼짝없이 제약에 걸리고 말 텐데!
“안 됩……!”
제레미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한발 늦어버렸다. 레틴은 제레미의 몸을 휘감은 푸른빛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휘오오-.
그 빛은 거친 파도처럼 제레미를 집어삼켰다. 하늘과 땅이 처음 시작되던 태초의 순간처럼 역동적이고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잠시 후 빛이 걷히고, 스무 살의 청년은 온데간데없이 조그만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없이 무력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제레미가 가진 ‘제약’이었다.
저 모습일 때의 제레미는 마법을 쓰지 못했다. 더 난감한 건, 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다.
작아진 제레미를 보며 레틴이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 모습을 황태자의 첩자 앞에서 들켜 버리다니. 이를 어쩐다…….’
레틴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힐레인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 지금이라도 나서서 황자님을 데리고 도망칠까도 생각해봤지만, 황자님이 순순히 따라줄지도 의문이었다.
‘지금 황자님의 상태로는 기억 소거 마법도 쓰지 못할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자님의 옷이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체구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상태였다면 황자비가 한 번쯤 의심해 볼만도 했지만,
제약에 걸릴 때를 대비해 준비한 마법 물품 덕에 그의 옷은 10살 소년의 체구에 딱 맞게 줄어들어 있었다. 먼지를 많이 뒤집어쓴 상태라 옷의 디자인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고.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그때, 뜻밖의 사람이 제레미의 정체를 숨겨주었다.
“먼 친척인데…… 언니는 잘 모를 거야.”
카렌을 보는 레틴의 눈이 반짝였다. 저렇게 기특할 데가…….
‘나도 한마디 거들면 좋을 텐데.’
가만히 고민에 잠겨 있던 레틴은 자신이 나설 타이밍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걸음을 옮겼다.
“황녀님, 황자비님. 여기 계셨군요. 황자님께서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얀 소후작님도 저와 함께 가시지요.”
레틴은 방계 쪽 황족 한 명을 소환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올해로 아마 10살을 맞이했을 소년. 황자비와 특별한 교류도 없었을 테니 그만한 변명거리도 없을 듯싶었다.
레틴은 부디 힐레인이 속아주길 바라며 침착하게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 * *
“황자님이 찾으신다고?”
갑작스러운 레틴의 등장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레틴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예, 황자님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신 상태입니다. 세 분도 어서 저와 함께 대피하시죠.”
아, 황자님은 이미 대피하신 상태구나. 다행이다.
나는 레틴에게 얀이라고 불린 소년을 흘끗 쳐다보았다.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착각했었네. 역시 황자님일 리 없지.’
말끔하게 의문을 털어버린 나는 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잡아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자, 얀 소후작님도.”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얀이 내 손을 꼭 그러쥐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두 눈에는 채 지워지지 못한 눈물이 말갛게 맺혀 있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곧장 레틴의 뒤를 따랐다.
레틴은 자욱한 안개를 손으로 걷으며 계속해서 뒤를 확인했다. 이따금씩 공격해오는 자객들을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앞섶과 상의 대부분이 피에 얼룩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깨 부분이 찢어진 걸 보니 꼭 본인이 흘린 피 같은데. 하지만 찢어진 틈으로 드러난 그의 피부에는 그 어떤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뭐 하십니까? 얼른 따라붙으십시오!”
이런. 딴생각을 하느라 너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나 보다. 레틴과 벌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발을 내딛던 그 순간이었다.
쾅!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큰 폭발음이 들렸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먼지 바람을 맞으며 카렌과 얀을 품에 안았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더 큰 위험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나는 내 쪽을 향해 기울어지는 기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평상시라면 가볍게 피했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 된 일인지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거대한 돌로 이뤄진 기둥은 나와의 거리를 차곡차곡 좁히고 있었다.
‘이러다 황녀님과 소후작까지 다치고 말겠어.’
나는 다급히 손을 뿌리치며 두 사람을 양옆으로 밀쳤다. 두 사람만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라며.
바로 앞까지 기운 기둥을 보며 몸을 웅크리는데 문득 등으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채 확인해보기도 전, 기둥이 내가 있는 쪽을 덮쳤다.
쿵!
고막을 때리는 커다란 소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시야를 방해하는 먼지를 손으로 걷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문득 내 위로 다른 사람이 몸을 겹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건물의 잔해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얀이었다.
“소후작님……!”
나는 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창백한 두 뺨에 닿았다.
하얀 피부 위로 잔뜩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피로 얼룩진 붉은 입술. 꼭 감긴 두 눈을 확인한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온몸으로 기둥을 막은 그는 상처투성이였다.
“안돼!”
하얀 이마 위로 스민 붉은 핏줄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내가 눌리지 않게 상체를 살짝 일으킨 그가 작게 읊조렸다.
“다행……이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나를 훑어 내려가던 눈동자가 곧 안도감에 물들었다.
“으윽…….”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잔잔한 은빛을 머금은 속눈썹이 아래로 드리웠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 것인지 그가 내 품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뭐……뭐가 다행인데?’
나를 감싼 낯선 소년. 거기에 다행이라는 안도까지. 대체 왜? 대체 누군데 나를 감싸고, 거기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거야……?
“흐윽.”
의문과 함께 찾아든 울먹임을 누르며 얀을 무릎 위에 눕혔다.
얀이 제레미와 닮은 탓일까?
어쩐지 그 순간 제레미를 잃은 것과 똑같은 비통함이 찾아들었다. 나는 가슴을 찢어놓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쿵- 쿵-.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자 일정 간격으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간질이는 작은 울림에 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다행……다행이다.”
살아 있다. 그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거 맞지?”
어느새 옆에 다가온 레틴이 털썩 무릎을 굽혔다. 재차 얀의 숨소리를 확인한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얀을 안아 들었다.
“서두르죠, 빨리 치료사에게 보여야 합니다.”
“레틴 경부터 먼저 가요. 저는 황녀님을 데리고 따라갈게요.”
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황녀에게 손을 뻗자 그녀가 눈물을 후두둑 떨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얀 오빠, 죽은 거 아니지?”
“네, 황녀님. 살아 있어요……. 분명히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는 그 한 마디에 큰 위로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고르지 못한 바닥을 지나야 해 힘이 들 텐데도 카렌은 불평 없이 나를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역시 8살짜리 꼬마가 걷기에는 무리였나 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카렌이 무릎을 손으로 감쌌다.
“괜찮으세요?”
좀 더 미리 안아주지 못한 데 미안함을 느끼며,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지금 내 상태도 말이 아니라 혹여 함께 넘어질까 봐 업지 않은 거였는데.
이미 상당히 멀어진 레틴과의 거리를 생각해봤을 때, 지금은 이게 최선일 것 같았다.
이제 막 카렌을 등에 업고 일어나던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황녀. 찾느라 힘들었습니다.”
먼지가 날리는 폐허 속에서 비웃음 서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그곳엔 온통 검정 일색인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또각-.
아수라장이 된 공간으로 발걸음 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 어떤 폐허도 마다치 않고 직접 죽음을 내리러 오는 사신의 걸음처럼 초연하고 여유로웠다.
나는 두 자객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 다 굉장한 실력자야.’